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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30 17:21 수정 : 2019.10.31 15:36

전병유 한신대 교수·경제학

‘아르(Recession)의 공포’나 ‘엠(Minus)의 공포’는 과장이지만, 경기침체와 저성장에 따른 우울함이 올가을 우리 경제를 덮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연 1.25%로 내렸고 물가는 두달째 마이너스로 나타났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2%를 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성장률과 금리, 물가 모두 경제위기 시기를 제외하고는 역대 최저치다.

‘우울한 경제’가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90%가 경기침체로 빠져들고 있다. 많은 국가가 제로 금리 상황이다. 유럽연합(EU) 경제의 일본화 우려가 나오는가 하면, 미국도 내년 경기 전망이 좋지 않다.

경제학 대가들도 ‘우울한 경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먼저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의 장기 침체론이 주목받는다. 이 연구로 다음 노벨 경제학상 후보가 될 것이라는 성급한 이야기도 나온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가 이를 비판하면서 ‘논쟁 아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둘 다 케인스 학파로 경기부양을 위한 재정 투입의 속도와 규모에 견해 차이로 보이지만, 실제 차이는 장기 침체론을 “이 시대의 이슈”로 볼 것인지에 있다. 물론 서머스가 스티글리츠를 세계은행 의장에서 그만두도록 로비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스티글리츠는 서머스 대신 옐런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 추천했다는 악연도 있겠지만.

서머스는 낮은 이자율이 장기 침체의 신호이고, 그 원인은 고령화와 생산성 저하, 불평등 심화, 독과점 심화 등이 초래하는 수요 부족과 저성장에 있다고 본다. 장기 침체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역동적이었던 아시아 경제가 자본의 순수출국이 되기 시작한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의 닷컴 버블 이후 이미 시작됐다고 본다. 정부 개입이 없으면 장기 침체로 빠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양적완화) 이외에 재정지출 확대와 민간투자 촉진 정책이 동원돼야 한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서머스의 장기 침체론이 글로벌 금융위기 때 더 적극적으로 재정확대를 못 한 오바마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에 대한 변명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저성장은 장기 침체 때문이 아니라 경제구조 전환 과정에서 정책 실패가 불러온 것으로 본다. 제조업 주도에서 서비스업 주도 성장으로 전환하던 중 적절한 교육 훈련 투자, 사회안전망 확충, 중소기업 지원정책 등을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논쟁에 로버트 고든(노스웨스턴대 교수)과 같은 공급 측면의 장기 침체론자도 끼어든다. 그는 기술의 한계생산성 체감과 인구고령화, 소득과 교육에서의 불평등, 정부 부채 증가로 향후 30년 이상 미국 경제가 침체 국면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한다.

경제의 우울함은 상당수 고소득 국가들에서 일반적 현상이지만, 그 원인과 대응은 지역별·국가별로 달라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 이상인 오이시디 20개국 중 2017년에 3% 이상 성장한 나라가 5개국, 2.5% 이상 성장한 나라도 10개국에 이른다. 개방적 이민정책을 편 오스트레일리아는 지난 30여년간 경기침체와 낮은 이자율을 거의 겪지 않았다.

우리 경제의 우울증을 치유하려면 그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일시적 수요 부족에 따른 경기침체인지 구조적 요인에 따른 장기 침체 진입 국면인지 판단해야 한다. 물론 최근 상황은 국내총생산(GDP) 갭(공급 대비 수요 부족)의 확대와 잠재성장률 하락(공급 능력 정체)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어서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경기부양 정책에 구조 전환 성격을 결합하는 방식이 최선이 아닐까 한다. 통화정책은 한계와 부작용을 고려할 때 정부 재정을 확대하되 생산적으로 쓰는 것이 정답이라고 경제학계는 뜻을 모은다. 정답이긴 하지만 매우 어려운 정답이다.

이번 기회에 국채 발행을 통한 재정확대를 세계적 수준의 공공 인프라와 공공 서비스, 그리고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수단과 계기로 삼는 야심 찬 비전과 전략을 만들 수도 있다. 다만 ‘삽질’도 타이밍이라 ‘준비된 삽질’ 프로젝트를 미리미리 찾아둬야 하며, 과감하고 강력하게 집행할 수 있는 정책 역량도 사전에 준비돼 있어야 한다.

정부 재정이 생산적으로 쓰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정부가, 야성적 충동이 공공선을 위해 창의적으로 발휘되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 스스로 기회를 포착하고 장악하는 동물적 본능을 갖춰야 할지도 모른다. 정부가 경제의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위험 감수 기능을 수행하려면, 더 정교하게 설계된 경제정책과 함께 상호 신뢰와 타협에 기초한 합의의 정치가 먼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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