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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9 18:05 수정 : 2019.10.30 02:38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하루 8시간 노동’은 ‘오래된 꿈’이다. 세상이 꿈꾼 지는 오래되었으나, 많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꿈이다. 이런 꿈같은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몽상가나 신기루를 찾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노동운동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로버트 오언이라는 스코틀랜드의 방직공장 사장이었다.

불과 10살의 나이에 오언은 현존하는 모든 신학은 오류라는 다소 조숙한 결론을 내리고, 세속의 공장에서 일을 배웠다. 배운 것으로 공장을 세우고, 수천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때로는 16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이 비인간적이고 비생산적인 점을 깨닫고, 남이 뭐라든 개의치 않고 노동시간을 대폭 줄였다. 그래도 생산성이 줄지 않았다. 다른 공장의 자발적 참여를 기대했지만, 곧장 포기하고 입법운동에 매진했다. 처음에는 10시간을 주장하다가, “하루 8시간 일하고, 8시간 놀고, 8시간 쉬기”로 업그레이드했다. 1817년의 일이었다. 그를 기업들은 ‘철부지’라 했고 혁명가들은 ‘공상가’라 했지만, 오언의 ‘8시간 노동’만큼 세상이 구체적으로 꿈을 꾸게 한 슬로건은 드물다.

21세기에는 방직공장 자리에 정보기술(IT) 회사들이 들어섰다. 밤낮으로 일해서 세운 회사에서 ‘중단 없는 열정’을 요구하는 젊은 사장들도 있지만, 21세기의 오언도 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6시간으로 줄이자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리처드 브랜슨은 오언의 ‘8시간 노동’을 넘어서 일주일에 3~4일 정도만 일하자고 제안했다. 오언에게 방직기계가 있었듯이, 21세기에는 이를 뛰어넘는 디지털 기술이 있다는 것이다. 너스레를 떠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임을 강조한 것이다.

올해 봄, ‘8시간 노동’의 봄이 더디게 오는 나라에서 어느 정치지도자가 말했다. 노동시간 규제는 “국민들에게는 마음껏 일할 자유”를 빼앗는 행위이며, “이제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기준’의 시대에서 경제주체가 자율적으로 맺는 ‘계약’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른바 “노동자유계약법”의 시대. ‘8시간 노동’이 ‘다가오는 꿈’이 아니라 아예 ‘잘못된 꿈’이라는 것이다. 정부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계속 나온다. 며칠 전, 4차 산업혁명을 고민하는 위원회는 주 52시간 초과근로 금지 제도가 “개인의 일할 권리를 막”고 혁신을 저해한다고 했다. 똑같은 4차 혁명일진대, 태평양 건너 저쪽에서는 장시간 노동이 혁신을 막는다고 하고, 이 나라에서는 그것의 부재가 혁신을 해친다고 한다.

“일할 권리”는 또 무엇인가. 노동권이란 통상 나라가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관련 직업능력을 획득하도록 도와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기이하게도 ‘일할 권리’가 노조활동을 제한하려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실업의 위협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장시간 노동이라는 해괴한 ‘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직원들이 원해서 한다는데, 그것은 자칫 사장이 보고 싶어 하는 현실이기 쉽고 그것이 바로 노동시간 규제의 이유이기도 하다.

4차 산업혁명의 다른 현장은 여전히 18세기 방직공장이다. 디지털 플랫폼으로 무장한 배달업체에서 일하는 청년들은 하루 12시간씩 일주일에 하루 쉬고 6일 일한다. 월 200만원도 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들은 ‘사장’이라 불린다. 오늘날의 ‘일할 권리’는 너무 편의적이다. 일자리가 필요할 때는 주지 않고, 일자리를 얻으면 내가 원하는 만큼 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오언은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8시간 노동’이라고 했다.

공장 사장을 해봤던 오언은 일찌감치 ‘자유계약’의 환상을 버렸다. 기업과 노동 간에 힘의 불균형이 있는 한 ‘자유계약’이 없음을 알았다. 기업의 자발적 규제가 가진 한계도 진즉 알고, ‘국가가 정해주는 기준’인 근로기준법을 도입하려 발버둥쳤다.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자유계약’이 가능하다면, 모든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조직하고 협상하도록 돕는 것이 우선이다. 그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에 열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자유계약’의 주창자들은 노동자의 ‘자유’ 실현에 무관심하다.

“나의 삶은 쓸모없지 않았다. 다만 내 시대를 앞서갔을 뿐이다.” 오언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다. 200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시대를 앞서 있다. 그것이 그의 위대함이고, 우리 시대의 참담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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