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의대 교수 이름이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인식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 한반도에 ‘건강’(健康)은 없었다. 그런 단어가 그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병(未病), 장수(長壽), 양생(養生) 등의 단어가 사용됐지만, 이들은 지금 우리가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건강’이란 단어는 19세기 중반 네덜란드 의학(난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오가타 고안 등 일본 난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건강’은 일본 의학계의 서양의학 수용 과정에서 나타난 200년도 안 된 근대적 발명품인 셈이다. 그렇지만 이제 현대인들은 ‘건강’을 영어의 ‘health’(헬스), 독일어의 ‘Gesundheit’(게준트하이트)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세계보건기구는 1948년 헌장에서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온존(well-being)한 상태”라고 규정했다. 이 정의는 건강에 ‘사회적 온존’을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정의지만, 정의 중 ‘완전’이란 단어 때문에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온존한 상태’를 가진 사람은 있을 수 없고 인류 역사상 존재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나서 불완전하게 살다 종국에는 죽는다. 그런 점에서 세계보건기구의 건강의 정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본질인 불완전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 완벽함에 대한 지향은 ‘우생학적 강박’과 깊은 친화성을 가지며 결함을 가진 자로 만든다. 또한 ‘건강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기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질병, 장애를 가진 이들을 차별하고 낙인찍는다. 완벽함을 지향하는 건강은 신화일 뿐이다. 그런 신화가 가장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는 곳이 한국 사회다. 식당 메뉴마다 이 음식이 심장에 좋으니, 간장에 좋으니 하는 설명이 붙어 있고, 목욕탕에도 혈압에 좋으니 당뇨병에 좋으니 하는 설명이 빠지지 않는다. ‘완벽한 얼굴과 몸매’로 변신하라는 광고가 지하철 칸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래서인지 성형외과술이 가장 성황을 이루는 곳도 한국이다. 우리 영혼을 침식하고 있는 소위 ‘완벽한 몸 만들기 프로젝트’는 우생론의 현대적 발현일 뿐이다. 그 자체가 우리 사회의 병적 현상이며 무너짐이 예정된 바벨탑 쌓기다. 건강이란 말이 범람하고 건강 산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나약해지고 아프다. 이른바 ‘건강의 패러독스’다. 영리적 의료산업은 매일 새로운 질병명을 양산해 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그럴수록 내 건강검진 결과지에 써지는 병명 수도 늘어나고 의료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건강한 신체의 추구는, 과거 국민국가의 등장에 따른 대의명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체력은 국력’이라는 정치·경제적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더 나아가 기업이 앞장서고 국가가 밀어주는 의료산업이란 이름으로 우리 몸을 빠르게 점령해 가고 있다. 오늘날 주요 병원체는 건강한 신체를 추구하는 그 자체이며 의료산업은 병을 만들기 위해 인간의 몸을 다시 구성하고 있다는 이반 일리치의 예언적 설명은 한국 사회에서 이제 현실로 다가왔다. 오해 말자. 건강이 없다고 고통마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건강’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에 강박적으로 집중하기보다 우리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공동의 인식 위에서 개인과 사회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과 질병 역시 무조건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50대 중반부터 한쪽 뺨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종양을 치료하지 않고 살다 갔는데, 이런 신념을 따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는 그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개인과 인류의 긍정적 변화는 무엇보다 고통 속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환자들은 병든 것이 아니라 늙은 것이다”라는 의학박사 구트의 말도 의미가 있다. 완벽한 건강을 추종할 때, 질병은, 장애는, 늙음은 ‘부담’으로 전락하고 인간은 초라해지며 마침내 죽음으로써 모두 실패자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존적 당위는 ‘완벽한’ 건강이나 질병과 장애의 ‘박멸’이 아니라 본질적 불완전성과 함께 ‘온존’하기 위한 존재들의 끝없는 연대가 돼야 한다. 건강은 없다.
칼럼 |
[세상읽기] ‘건강’은 없다 /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이름이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인식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 한반도에 ‘건강’(健康)은 없었다. 그런 단어가 그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병(未病), 장수(長壽), 양생(養生) 등의 단어가 사용됐지만, 이들은 지금 우리가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건강’이란 단어는 19세기 중반 네덜란드 의학(난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오가타 고안 등 일본 난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건강’은 일본 의학계의 서양의학 수용 과정에서 나타난 200년도 안 된 근대적 발명품인 셈이다. 그렇지만 이제 현대인들은 ‘건강’을 영어의 ‘health’(헬스), 독일어의 ‘Gesundheit’(게준트하이트)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세계보건기구는 1948년 헌장에서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온존(well-being)한 상태”라고 규정했다. 이 정의는 건강에 ‘사회적 온존’을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정의지만, 정의 중 ‘완전’이란 단어 때문에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온존한 상태’를 가진 사람은 있을 수 없고 인류 역사상 존재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나서 불완전하게 살다 종국에는 죽는다. 그런 점에서 세계보건기구의 건강의 정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본질인 불완전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 완벽함에 대한 지향은 ‘우생학적 강박’과 깊은 친화성을 가지며 결함을 가진 자로 만든다. 또한 ‘건강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기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질병, 장애를 가진 이들을 차별하고 낙인찍는다. 완벽함을 지향하는 건강은 신화일 뿐이다. 그런 신화가 가장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는 곳이 한국 사회다. 식당 메뉴마다 이 음식이 심장에 좋으니, 간장에 좋으니 하는 설명이 붙어 있고, 목욕탕에도 혈압에 좋으니 당뇨병에 좋으니 하는 설명이 빠지지 않는다. ‘완벽한 얼굴과 몸매’로 변신하라는 광고가 지하철 칸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래서인지 성형외과술이 가장 성황을 이루는 곳도 한국이다. 우리 영혼을 침식하고 있는 소위 ‘완벽한 몸 만들기 프로젝트’는 우생론의 현대적 발현일 뿐이다. 그 자체가 우리 사회의 병적 현상이며 무너짐이 예정된 바벨탑 쌓기다. 건강이란 말이 범람하고 건강 산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나약해지고 아프다. 이른바 ‘건강의 패러독스’다. 영리적 의료산업은 매일 새로운 질병명을 양산해 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그럴수록 내 건강검진 결과지에 써지는 병명 수도 늘어나고 의료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건강한 신체의 추구는, 과거 국민국가의 등장에 따른 대의명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체력은 국력’이라는 정치·경제적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더 나아가 기업이 앞장서고 국가가 밀어주는 의료산업이란 이름으로 우리 몸을 빠르게 점령해 가고 있다. 오늘날 주요 병원체는 건강한 신체를 추구하는 그 자체이며 의료산업은 병을 만들기 위해 인간의 몸을 다시 구성하고 있다는 이반 일리치의 예언적 설명은 한국 사회에서 이제 현실로 다가왔다. 오해 말자. 건강이 없다고 고통마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건강’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에 강박적으로 집중하기보다 우리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공동의 인식 위에서 개인과 사회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과 질병 역시 무조건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50대 중반부터 한쪽 뺨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종양을 치료하지 않고 살다 갔는데, 이런 신념을 따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는 그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개인과 인류의 긍정적 변화는 무엇보다 고통 속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환자들은 병든 것이 아니라 늙은 것이다”라는 의학박사 구트의 말도 의미가 있다. 완벽한 건강을 추종할 때, 질병은, 장애는, 늙음은 ‘부담’으로 전락하고 인간은 초라해지며 마침내 죽음으로써 모두 실패자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존적 당위는 ‘완벽한’ 건강이나 질병과 장애의 ‘박멸’이 아니라 본질적 불완전성과 함께 ‘온존’하기 위한 존재들의 끝없는 연대가 돼야 한다. 건강은 없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