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무슨 까닭인지 나는 번번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장미의 전쟁’으로 쓴다. 분명 전자를 의도했건만, 말과 글로 드러나는 것은 늘 후자다. 심오한 소설을 부부의 시끌벅적한 일상을 다룬 드라마로 격하하는 꼴이니 내심 당황스러워서, 15세기 영국의 장미전쟁과 헛갈린 탓이라고 ‘고상하게’ 우겨 본다. 이것으로도 ‘자위’가 되지 않으면(스스로를 위로한다는 뜻이며 최근 회자되고 있는 ‘정치적 개념’과는 무관하다), 나는 소설의 제목을 탓한다. 어차피 저자가 별생각 없이 멋있게 보이려고 지은 제목이란다. 에코가 또 그러지 않았나.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인데, 여기에 엄청난 근본진리가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끔찍해진다고. 이번 여름에 휴가 삼아 ‘조국’(내 나라를 뜻하며 특정인과 무관하다)을 잠시 찾았을 때 나는 에코를 읽었다. 그에 대한 심리적 부채감을 덜어내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의 귀향에 대한 시시콜콜한 기록을 좋아한다. 그의 냉철하고 논쟁적이며 희화적인 문체는 그의 고향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하면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해진다. 가령 이런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휑하고 활기가 없는 커다란 공간들로 이루어진 도시이다. 하지만 … 도시가 자욱한 안개에 휩싸이면 텅 빈 공간들이 사라지고 예기치 않던 벽면과 모서리와 모퉁이가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우윳빛의 단조로운 배경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난다. 마치 갓 그려진 형태들이 무에서 튀어나온 느낌이다. … 알렉산드리아는 어둑어둑해져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도시이다. 이 도시의 진면목은 햇빛이 아니라 안개 속에서 찾아야 한다.”(이세욱 번역,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알렉산드리아의 광장은 낮은 건물들로 둘러서 있다. 낡았지만 포근하게 광장을 감싼다. 공터가 광장이 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낮게 임한 건물 덕분이다. 낮에는 오롯이 광장에만 공간을 내어주고, 밤이 되어서야 은은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에코가 안개 속의 알렉산드리아를 아름답다고 한 이유다. 문득, ‘조국’의 커다란 공간, 광화문 광장에 가 보고 싶었다. 뙤약볕을 피해 어둑어둑해질 때 갔다. 마침 비안개가 내렸고 가로등도 켜졌다. 몇년 전 추운 겨울을 달구었던 촛불이 사라진 텅 빈 공간에서 나는 그곳의 “예기치 않던 벽면과 모서리와 모퉁이”를 찾았다. 여기는 광화문 광장이다. 빌딩은 여름날 대나무 숲처럼 무자비하게 솟으며 거친 불빛을 쏟아내었고, 그 뒤로는 더 높은 건물들이 쓰나미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광장을 덮칠 기세였다. 그 언저리에는 ‘애국’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광장의 점령’을 외쳤다. 바깥의 음모와 안쪽의 불화 때문에 광화문 광장은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그 너머로 청와대가 흐릿하게 보였다. 다시 광장을 본다. 광장은 같이 나누고 같이 이루는 곳이다. 대낮에 외치는 맨목소리의 크기는 같고, 늦은 밤에 들어올리는 촛불의 높이도 같다. 물론 광장의 주위에 자리한 자신의 삶터로 돌아가면, 먹고사는 일에 차이가 있다. 광장의 건물에도 층계가 있고 방마다 조망도 다를 터이다. 하지만 고층으로 가는 층계가 열쇠를 가진 몇몇에게만 열려 있고 그들에게만 증축이 허용된다면, 저 건물들은 더 이상 광장의 수호자가 아닐 것이다. 광장 주위로 포진한 고층 빌딩의 대형 광고판은 마치 빨간 신호등 같았다. 원래 나는 높은 곳에 살았고 어쩔 수 없다는 항변이 어찌 없겠는가. 내 노력과 능력 덕분이고, 증축도 관련법과 제도에 따랐다고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없고 새로운 잘못도 없는데, 이제는 단지 저 고층 건물이 보일 뿐이다. 나도 광화문 광장에 오래 앉아 있고서야 건물의 높음을 알았다. 10층 정도이겠거니 했던 건물들이 죄다 20층, 30층을 넘었다. 고백건대, 나도 거기서 내려다봐서 그러리라. 내려다보는 높이와 올려다보는 높이는 다르다. 그리고 한번 어깨를 나눈 광장은 새로운 광장이다. 광장 밖의 불온한 음모를 이유로 광장 안의 불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광장에 가까운 사람과 멀리 있는 사람의 격차가 늘어날수록 광장은 위험하다. ‘모서리’가 아름다운 광화문 광장을 공터로 만들 수 없지 않나. 가로등 불빛이 깊어진다. 이제 나의 ‘모퉁이’로 돌아간다. 에코의 마지막 구절이다. “안개가 낀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안개를 탓하지 말고, 안개를 보며 깊이 생각해볼 때다.
칼럼 |
[세상읽기] 안개 낀 광화문 광장에서 생각한다 /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무슨 까닭인지 나는 번번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장미의 전쟁’으로 쓴다. 분명 전자를 의도했건만, 말과 글로 드러나는 것은 늘 후자다. 심오한 소설을 부부의 시끌벅적한 일상을 다룬 드라마로 격하하는 꼴이니 내심 당황스러워서, 15세기 영국의 장미전쟁과 헛갈린 탓이라고 ‘고상하게’ 우겨 본다. 이것으로도 ‘자위’가 되지 않으면(스스로를 위로한다는 뜻이며 최근 회자되고 있는 ‘정치적 개념’과는 무관하다), 나는 소설의 제목을 탓한다. 어차피 저자가 별생각 없이 멋있게 보이려고 지은 제목이란다. 에코가 또 그러지 않았나.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인데, 여기에 엄청난 근본진리가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끔찍해진다고. 이번 여름에 휴가 삼아 ‘조국’(내 나라를 뜻하며 특정인과 무관하다)을 잠시 찾았을 때 나는 에코를 읽었다. 그에 대한 심리적 부채감을 덜어내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의 귀향에 대한 시시콜콜한 기록을 좋아한다. 그의 냉철하고 논쟁적이며 희화적인 문체는 그의 고향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하면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해진다. 가령 이런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휑하고 활기가 없는 커다란 공간들로 이루어진 도시이다. 하지만 … 도시가 자욱한 안개에 휩싸이면 텅 빈 공간들이 사라지고 예기치 않던 벽면과 모서리와 모퉁이가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우윳빛의 단조로운 배경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난다. 마치 갓 그려진 형태들이 무에서 튀어나온 느낌이다. … 알렉산드리아는 어둑어둑해져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도시이다. 이 도시의 진면목은 햇빛이 아니라 안개 속에서 찾아야 한다.”(이세욱 번역,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알렉산드리아의 광장은 낮은 건물들로 둘러서 있다. 낡았지만 포근하게 광장을 감싼다. 공터가 광장이 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낮게 임한 건물 덕분이다. 낮에는 오롯이 광장에만 공간을 내어주고, 밤이 되어서야 은은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에코가 안개 속의 알렉산드리아를 아름답다고 한 이유다. 문득, ‘조국’의 커다란 공간, 광화문 광장에 가 보고 싶었다. 뙤약볕을 피해 어둑어둑해질 때 갔다. 마침 비안개가 내렸고 가로등도 켜졌다. 몇년 전 추운 겨울을 달구었던 촛불이 사라진 텅 빈 공간에서 나는 그곳의 “예기치 않던 벽면과 모서리와 모퉁이”를 찾았다. 여기는 광화문 광장이다. 빌딩은 여름날 대나무 숲처럼 무자비하게 솟으며 거친 불빛을 쏟아내었고, 그 뒤로는 더 높은 건물들이 쓰나미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광장을 덮칠 기세였다. 그 언저리에는 ‘애국’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광장의 점령’을 외쳤다. 바깥의 음모와 안쪽의 불화 때문에 광화문 광장은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그 너머로 청와대가 흐릿하게 보였다. 다시 광장을 본다. 광장은 같이 나누고 같이 이루는 곳이다. 대낮에 외치는 맨목소리의 크기는 같고, 늦은 밤에 들어올리는 촛불의 높이도 같다. 물론 광장의 주위에 자리한 자신의 삶터로 돌아가면, 먹고사는 일에 차이가 있다. 광장의 건물에도 층계가 있고 방마다 조망도 다를 터이다. 하지만 고층으로 가는 층계가 열쇠를 가진 몇몇에게만 열려 있고 그들에게만 증축이 허용된다면, 저 건물들은 더 이상 광장의 수호자가 아닐 것이다. 광장 주위로 포진한 고층 빌딩의 대형 광고판은 마치 빨간 신호등 같았다. 원래 나는 높은 곳에 살았고 어쩔 수 없다는 항변이 어찌 없겠는가. 내 노력과 능력 덕분이고, 증축도 관련법과 제도에 따랐다고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없고 새로운 잘못도 없는데, 이제는 단지 저 고층 건물이 보일 뿐이다. 나도 광화문 광장에 오래 앉아 있고서야 건물의 높음을 알았다. 10층 정도이겠거니 했던 건물들이 죄다 20층, 30층을 넘었다. 고백건대, 나도 거기서 내려다봐서 그러리라. 내려다보는 높이와 올려다보는 높이는 다르다. 그리고 한번 어깨를 나눈 광장은 새로운 광장이다. 광장 밖의 불온한 음모를 이유로 광장 안의 불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광장에 가까운 사람과 멀리 있는 사람의 격차가 늘어날수록 광장은 위험하다. ‘모서리’가 아름다운 광화문 광장을 공터로 만들 수 없지 않나. 가로등 불빛이 깊어진다. 이제 나의 ‘모퉁이’로 돌아간다. 에코의 마지막 구절이다. “안개가 낀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안개를 탓하지 말고, 안개를 보며 깊이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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