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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7 17:06 수정 : 2019.08.07 19:09

전병유
한신대 교수·경제학

올해 한국 경제는 미-중 무역분쟁으로 시작해 일본 수출규제로 인한 동북아 생산분업체계 붕괴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당장은 외교적 해법을 찾고 부품·소재 국산화와 수입처 다변화로 급한 불을 끄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는 동북아 생산가치사슬의 붕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약화 또는 재편될 것을 전제하고 한국의 산업전략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선 국내가치사슬(DVC)의 재구축이다. 외환위기 이후 새롭게 형성된 동아시아 생산분업체계에 올라타 경제적으로 성공한 기업은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다. 현대차는 대내적으로 업스트림(부품·소재와 같은 후방산업)을 강화해 다운스트림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취했다. 철저한 수직계열화 시스템을 구축해 중국 등 판매시장에 현지 공장 형태로 진출하는 모델이다.(현대차의 기민한 생산방식, 조형제 울산대 교수) 삼성전자는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는 탈추격형의 성공모델을 보여주었다. 다운스트림에서 원천기술 개발이라는 새로운 경로를 개척해나가는 모델이다.(경로창출형 탈추격모델, 이근 서울대 교수) 그러나 중국 시장의 위축과 시장환경 변화(환경규제와 모빌리티 생태계의 변화)로 현대차 모델이 먼저 위기에 직면했다. 삼성전자 모델도 일본의 수출규제로 뒷문(업스트림)이 열리는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다.

그렇다고 부품·소재의 수직계열화 체제를 강화하는 현대차 모델이 대안은 아니다. 부품·소재 국산화를 폐쇄적 생태계에 의존하는 것은 또다른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다. 단시간에 대기업과 정부의 물량투자로 부품·소재 국산화가 빨라지긴 하겠지만.

따라서 기존 방식과는 차별화된 부품·소재 생태계 구축 전략을 설계해야 한다. 부품·소재의 기술력은 현장 숙련 축적의 시간, 원천기술 기초연구 시스템, 그리고 전쟁과 제국의 경험을 토대로 한다고 한다. 우리에게 많이 부족한 조건들이다. 물량투자에 기초한 전통적인 수직계열화 방식의 부품 국산화 전략보다는 개방형 혁신과 플랫폼 전략의 지능 제조업 모델을 생각해보자. 이미 글로벌가치사슬(GVC)은 디지털플랫폼, 사물인터넷, 인공지능(AI)을 포함한 새로운 기술과 국경 간 데이터 흐름에 의해 재형성되고 있다. 디지털경제에서는 여전히 규모가 중요하다. 그러나 독점하거나 폐쇄적이어서는 안 된다. 대기업은 내재화할 것인지 외주화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인프라를 제공하고 더 많은 참여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이자 에이전트의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이미 정부도 빅데이터+인공지능 기반의 ‘디지털 시뮬레이션 플랫폼’을 구축하고 소재·부품의 물성, 설계방식 등 최적의 개발방식을 제시했다. 이 플랫폼에서 중소기업들이 자유롭고 대등한 위치에서 개발 제품을 실험하고 성과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정부나 기업 모두 마음은 급하겠지만,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미래의 변화를 주도하는 부품 국산화 방식에 집중하는 냉정함도 필요하다.

둘째, 근접국가와의 생산가치사슬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 디지털기술이 새로운 개발 경로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면, 지역 간 협력과 통합은 가능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정치적으로는 멀지만 경제적으로는 가까운 중국과 일본을 옆에 둔 우리는 니어쇼어링(Near-shoring, 근접국가 간 거래)의 최대 수혜자였다. 거의 동시간대 일일생활권으로 대면거래가 가능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 간 오프쇼어링(Off-shoring)이 초래하는 신뢰와 불확실성의 문제를 줄일 수 있었다. 장비가 고장나거나 품질에 문제가 있으면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역설적이게도 여기에 인질로 잡힌 것이다. 신남방정책으로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와의 거래를 다변화한다고 해도 중국과 일본은 지리적 숙명 국가다. 동북아의 정치·안보 협력체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동북아의 생산가치사슬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관한 장기 ‘플랜 비’(Plan B)도 준비돼 있어야 한다.

한국전쟁 때도 천막에서 수업을 한 것이 한국 경제성장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단기 신속대응 티에프(TF) 외에 장기 국가전략 티에프도 당장 필요하다.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향후 20년의 경제·사회 시스템이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외환위기 때 충분히 학습했다. 우리 세대의 위기를 다음 세대의 기회로 만들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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