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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16 20:35 수정 : 2006.07.16 20:35

김갑수 문화평론가

세상읽기

“민주 발전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관용의 시대’를 통과할 때다. 민주주의는 괜히 주는 것 없이 밉고 도저히 같이 지내기 싫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을 때 결정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적 단계는 ‘반대파 용인의 단계’이다.”

1997년 8월, ‘마침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든 대선이 치러지던 해 〈신동아〉에 게재된 글이다. 같은 해 글쓴이의 논지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아울러 흡사 전기의 음극과 양극처럼 김대중의 건너편에는 이미 타계한 박정희가 있었다. ‘한동안 버림받은 독재자였다가 이제 박제된 영웅으로 기억되는 박정희’를 심리인류학이라는 방법론에 입각해 생애와 사상을 규명해 보니 ‘심리적 고아의식’이 그 행동양식의 밑바탕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한 논문이 발표된 게 2001년이다. 저자의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그리고 이중섭. 어린이나 문맹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중섭 예술이 이상하게도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진 까닭을 ‘순수의 극단’을 밀고나간 때문으로 본 그는 본격적인 평론서와 더불어 꽤 여러 편의 이중섭론을 남겼다.

이쯤 해서 글쓴이의 이름이 떠오르기를 소망해 본다. 한국인이라면 좋고 싫고를 떠나 그 존재감이 너무도 큰 이중섭, 박정희, 김대중을 집중적인 연구대상으로 삼아 각각의 저서로 출간한 이 글쟁이의 이름은 전인권이다. 그의 다른 저서 〈남자의 탄생〉이나 〈독립신문 다시 읽기〉 등은 독서가에 비상한 관심과 더불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정치학자나 미술평론가 이전에 대중적 글쓰기의 품질을 한 단계 높일 존재로 그가 받은 기대는 매우 컸다.

하지만 나는 엊그제(14일) 성균관대 교수식당에서 열린 그의 타계 1주기 추모식을 다녀와야 했다. 실제 일상생활을 통해 ‘죽도록 미운’ 사람들과도 서슴없이 교유했던 그였다. 80명 정도의 지인과 학계 인사들이 모인 그 행사는 각각 〈박정희 평전〉과 〈전인권이 읽은 사람과 세상〉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유고집 2권의 출간기념회 자리이기도 했다. 가족과 지인들의 애틋한 회상도 있었지만 행사장의 전반적인 발언 내용은 정치 세미나장을 방불케 했다. 그가 남긴 메시지와 생존시기의 정황 탓이리라. 좌중에는 징역의 별을 달고 사는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일찍이 시인 황동규는 벗의 죽음을 두고 이런 시를 썼다.

“이제 죽은 자를 경애하지 말고 죽은 자의 죽음을 생각하라.”

그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니 한국 현대사의 양지쪽이다. 1970년대는 문학의 시대요, 80년대는 이념의 시대요, 90년대는 카오스의 시대라는 규정을 따른다면 고인은 참으로 행복한 시절을 살다간 것이다. 개인적 독단을 발휘해 보자면 70년대 이전은 뼈저린 궁핍과 미몽이, 2000년 이래로는 정신적 퇴행과 황폐함이 지배적인 세상으로 다가온다. 문학·이념·카오스가 휘몰아친 시대에는 인간이 위대했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직후 김수영이 예언처럼 썼던 표현이지만 전인권의 활동기가 바로 그랬다. 인간의 가능성이 극대화된 그런 역동을, 그런 격정을, 그런 총체성을 이 사회가 다시 한번 맞이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자기 시대를 부풀려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니 전인권의 시대 30년에 대한 뜨거운 의미 부여를 ‘경험자의 애착’쯤으로 치부해도 할말은 없다. 하지만 변화된 시대의 다른 ‘전인권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 탈정치의 시대이니 모두 영화판이나 경영계에 가 있는가? 자기 시대를 온몸으로 껴안아 역사와 하나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전인권의 시대라 이름 붙인다.


김갑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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