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31 16:38
수정 : 2019.12.31 18:11
|
2019년 2월27일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악수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하노이/AFP 연합뉴스
|
|
2019년 2월27일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악수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하노이/AFP 연합뉴스
|
해석학(Hermeneutik)은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hermes)에 어원을 둔 말이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말을 전해주는 사자다. 이 기원이 암시하는 대로 해석학이란 ‘타자의 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자라나온 학문이다. 말들의 집적물인 문헌, 곧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해석학의 본령이다.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가다머는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으로 ‘지평 융합’을 제시했다. 지평 융합이란 텍스트가 생산된 시대의 문화적 지평과 해석자의 사고를 규정하는 당대의 문화적 지평이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 텍스트를 산출한 과거의 지평과 해석자가 속한 현재의 지평이 동떨어지지 않고 맞아떨어져야만 텍스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가다머의 생각이다. 이런 의미의 해석학은 문헌 해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쩌면 외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해석학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특히 미국과 북한처럼 수십년 동안 적대하며 상대를 악마화해온 관계에서는 이해의 지평을 넓히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이해의 지평을 넓히려면 상대가 무엇을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지, 왜 그것을 요구하는지를 상대의 처지에서 알아야 한다.
지난 1년 동안의 북-미 관계는 두 나라 사이 이해 지평의 단절이 파탄에 가까운 상황을 만들어냈음을 뼈아프게 증언한다. 2월 말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은 기대와 흥분 속에 시작됐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빈손으로 끝났다. 4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미국이 ‘새 계산법’을 가져오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공언했다. 북-미 대치는 악화 일로를 걷다 결국 해를 넘겼다. 돌아보면, 하노이 결렬이 그 후의 협상 파행을 앞서 결정했음이 분명해진다. 하노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 폐기의 대가로 민생·민수 제재 5건의 해제를 요구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일괄타결을 제시했다. 북-미 협상의 구체적인 양상은 3월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평양에서 연 기자회견을 통해 드러났다. 최 부상은 북한의 제안에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를 해제했다가도 북한이 핵활동을 재개할 경우 원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내용을 더 포함하면 합의할 수도 있다는 신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측근들이 반대해 결렬됐다고 밝혔다. 이른바 ‘스냅백’을 언급한 것인데, 북한이 이런 조건을 수용해 영변 해체와 제재 완화를 맞바꿀 뜻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북-미는 그 뒤로도 제재 완화 문제를 놓고 대치했다. 10월 스톡홀름 실무회담 때도 미국은 제재 완화 문제는 뒷순위로 미뤘고, 이것이 ‘빈손 회담’의 핵심 원인이 됐다.
미국은 대북 제재를 북-미 협상의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비핵화가 충분히 진전되기 전까지는 제재 완화를 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역력하다. 그러나 미국의 ‘제재 신봉’이 북-미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임은 지난 1년의 경험이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하노이에서 미국이 제시한 ‘스냅백 정신’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따지고 보면 스냅백은 경제제재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안전보장 요구에 응해 한-미가 연합훈련을 중단하거나 유예하는 것도 군사 분야에서 스냅백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적대적 군사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위에서 북한의 요구를 일시적으로 들어주는 것이다. 한-미는 이미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 연합훈련을 중단한 바 있다. 이것이 말하자면 군사 영역에서 스냅백이 활용된 경우다. 그렇다면 제재 영역에서도 스냅백은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쓰일 수 있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이런 말을 한다. “시야가 좁은 사람은 멀리 볼 줄 모르고, 가까이 보이는 것을 과대평가한다. 반대로 시야가 넓다는 것은 바로 눈앞의 것에 갇히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줄 안다는 뜻이다.” 북-미 사이에 필요한 것이 바로 시야를 확대하고 이해의 지평을 넓히려는 노력이다. 눈앞의 불신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외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북-미가 아직도 상대를 믿지 못하겠다면, 하노이 협상으로 돌아가 스냅백을 되살리면 된다. 스냅백을 걸고 담판한다면 협상의 돌파구는 의외로 쉽게 열릴 수 있다.
고명섭 ㅣ 논설위원
michael@hani.co.kr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