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1.06 17:25
수정 : 2018.11.06 19:12
박병수
논설위원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최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보상하라”고 말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때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보상과 배상을 책임지기로 하고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를 받았으니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이다. 새로울 것 없는 논리다. 일본이 ‘개인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는 기존 주장을 고수할 때부터 예고된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대법원 판결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강제징용이 “불법”이라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청구권협정이 불법행위까지 포괄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불법 강제징용으로 정신적 신체적 피해가 생겼으니 위자료를 줘야 한다는 것이고, 이 위자료는 1965년 청구권협정의 5억달러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김세은 변호사는 “한국 정부가 대신 줄 수 없다. 설혹 그렇게 하더라도 가해자의 배상 책임이 면책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노 외무상의 주장은 대법원 판결에 기속될 수밖에 없는 한국 정부에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책임지라고 하는 것이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3년8개월만에 피해자들의 승소 판결이 난 30일 오후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4)씨가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일본이 그동안 청구권협정을 방패 삼아 한국인의 청구권을 모두 배척해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이 처음부터 개인 청구권을 부인한 건 아니다. 1990년대까지는 외교 보호권만 소멸했고 개인 청구권은 살아 있다는 입장이었다. 야나이 지 외무성 조약국장은 1991년 8월 참의원에서 “외교 보호권을 상호 포기한 것이며 개인의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 의미에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이런 입장이 2000년대 들어 “개인 청구권 문제는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로 바뀐다.
애초 일본이 청구권 소멸을 부인한 건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나 1956년 10월 소련-일본 공동선언에도 ‘청구권 상호 포기’ 조항이 들어 있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다. 일본 내 원폭 피해자와 전후 시베리아 억류 일본인 등이 이 조항을 근거로 일본 정부에 소송한 것이다. 일본인 변호사 야마모토 세이타는 일본 정부가 일본인 피해자의 보상 청구 때는 ‘조약으로 청구권이 소멸된 게 아니다’라고 발뺌하고 외국인 피해자가 소송하자 ‘조약으로 다 해결된 것’이라며 피해갔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의 입장도 일관된 건 아니었다. 애초 입장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5년 뒤늦게 징용 피해 사망자 유족에게 1인당 30만원씩 모두 91억원을 보상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징용 소송이 정치 쟁점이 되면서 “개인 청구권은 살아 있다”로 정부 입장이 바뀐다. 1995년 9월 공노명 당시 외무장관은 국회에서 “개인 청구권에 대해선 정부가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8월 “위안부 등 불법행위,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등 세가지를 빼곤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으로 정리했다. 그러고는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최대 2천만원씩 보상해, 6만6985명에게 5400억원이 지급됐다.
일본에선 “한국이 골대를 옮겼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도 제 논에 물 대기 식 해석에서 자유롭지 않다. 법리 논쟁으로 해법을 찾을 단계는 지난 것 같다. 일본인 변호사 93명은 5일 성명을 내어 “징용 피해자 문제의 본질은 인권 문제”라고 규정했다. 인권을 침해당한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suh@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