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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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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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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건 우주의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수십억 평범한 지구인 중의 한 명인 나였기에, 막상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니 무엇이 그를 미국 대통령으로 이끌었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무릇 세상일에는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고 깊은 이유와 맥락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 트럼프주의의 대중적 연원
왜, 어떻게,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까? 트럼프의 유세 연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정치적으로 타락한 엘리트 계급 대신 우리가 통치하는 미국.” 미국인들은 성차별, 인종주의, 탐욕 등 갖가지 도덕적인 결함을 지녔지만 적어도 정치적으로 타락한 엘리트 계급에서 벗어나 있는 개인을 선택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다음날 저명한 정치평론가 나오미 클라인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트럼프 승리의 핵심 요인은 신자유주의,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엘리트 신자유주의’의 해악에 있다. 클라인의 표현을 따르면, 트럼프는 ‘모든 게 지옥이다’라고 화낸다. 반면 클린턴은 ‘모든 게 잘되고 있다’며 확신에 넘친다. 현실은,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듯이, 모든 게 지옥처럼 엉망이다. 고로 사람들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의 중핵적인 수혜자인 클린턴의 위선 대신 현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적나라하게 대변해주는 트럼프를 선호한다.
물론 트럼프가 그간 불이익을 받아왔던 백인-노동자 계급에게 잃어버린 땅을 되돌려 주고 그들의 자부심과 희망을 되살려 주리라는 맹신, 인종적 폐쇄성을 주장하면서 그간의 세계화의 흐름이 미국사회에 가져다 준 부와 이점을 부인하는 이중성, 백인 노동자뿐 아니라 더 많은 약자들이 받게 될 차별과 고통에 대한 묵인 등, 많은 지점에서 미국 유권자들은 착오를 범했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승리를 오로지 배운 것 없고 가난하며 오기에 찬 백인 남성 노동자들의 복수로 치부하는 해석은 단편적이고 제한적이다. 트럼프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단순한 변덕이나 착각이기보다는 현 자본주의 체제에 모순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 문제는 민주주의다
<한겨레>는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트럼프 당선 소식을 대대적으로 다루면서 여러 관점에서 전하고 분석했다. ‘미국까지 덮친 반세계화 해일 ··· 국제질서 대격변 예고’(11월10일치)에서는 트럼프 승리를 ‘반세계화 우파 포퓰리즘이 해일이 되어 미국까지 덮친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 세계적인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 되었지만, 그 대응으로 오히려 “극히 퇴행적인 우파 포퓰리즘의 기승”이 야기된 것으로 설명되었다. 또한 이는 단지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 등의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전 세계적인 우경화 양상의 일환으로 해석되었다. 아울러 트럼프 행정부, 미국의 기성 엘리트, 주요 동맹국 등의 갈등과 이해관계 국면에 따라 야기될 지정학적 위기가 예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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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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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원인과 향후 전망을 입체적으로 조망한 기사들과 더불어, 국내 선거 기사에서도 빈번히 지적되는 현상이기도 하듯이, 미 대통령 선거를 후보자 간 경쟁이나 지역·인종·성 등의 범주에 따른 정체성 집단 간의 과열된 갈등 현상으로 틀 짓는 경향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민주당파와 공화당파 사이의 선거 전략의 비교로 단순화되거나 보수와 진보 사이의 이념 분극으로 묘사되는 식이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미치게 될 영향을 추론하는 기사들도 아쉬움을 낳는다. 국제뉴스가 해당 지역의 국지적인 특수성에 따라 재해석되는 현상은 당연할 뿐 아니라 때로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 권력 체제에서 어떤 민주주의가 가능한지, 현 체제에서 소외되고 고통당하고 있는 시민의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즉 ‘정치’를 고민하는 본질적 사유는 희박하다.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인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나라들에서 우경화가 심화되는 국제적인 상황에서 공통적으로 대두하는 문제, 요컨대 ‘타락한 엘리트 계급을 여전한 민주주의의 망령으로 떠받을 것인가’아니면 ‘저들을 비난하며 성가신 약자들을 해치워주는 악인을 영웅화할 것인가’라는, 현재 각국의 시민 주체들이 보편적으로 봉착한 현실적 질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누락되어 있다. 대신 경제와 국방의 정책 및 외교에 관한 단기적인 추측과 협소한 전망이 주를 이룬다.
누가 트럼프와 클린턴을 찍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통계를 세심히 보더라도 심층적인 접근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백인 남성 63%, 백인 여성 53%가 트럼프를 지지했다. 그러나 유권자 집단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복잡한 층위들이 발견된다. 세대 기준으로 45세 미만 유권자의 40%가 트럼프를 지지한 데 비해 45세 이상 유권자의 53%가 트럼프를 선택했다. 흑인 남성 80%가, 흑인 여성 94%가 클린턴을 지지했지만, 히스패닉계 남녀 모두 60% 이상이 클린턴을 선호했다. 더욱이 여기에는 교육 정도와 지역성과 같은 매개 요인들도 개입된다. 이제 단지 백인-남성-하위층의 둔탁한 틀만으로는 트럼프의 승리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정치이념 지형과 함께 세대, 지역, 젠더 등의 범주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중첩 국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만이 이번 선거의 본질을 해명할 수 있다. 나아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린 상상이 가능해진다.
■ 다른 민주주의를 위한 희망
트럼프의 승리는 단순히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백인 남성의 어리석은 분노 표출이 아니다. 영국의 일간지인 <가디언>에 실린 정치 평론가 조너선 프리들런드의 해석처럼, 미국인들, 어쩌면 지구화 체제의 다중들은 지금의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으로 좌절, 분노,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민주주의를 원한다.
이는 단지 먼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정치인(그리고 온갖 사이비 정치인)-재벌이 결탁한 타락한 권력 체제에서 양산된 부정부패의 극단을 체험하고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당선과 박근혜 대통령의 추락 사이에는 비극적인 공통성과 함께 매우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한다. 지배적인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미국에서는 부적합한 대통령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반면 한국에서는 부당한 대통령을 단죄하는 흐름으로 개진되고 있다. 희망이 있다면, 이 갈림길에서 싹튼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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