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4.27 20:16
수정 : 2016.04.2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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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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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온라인 사이트에는 주요 뉴스들을 배열한 띠 모양의 서비스 메뉴가 있다. 기사 본문 윗단에 배치되어 주요 뉴스들의 제목과 이미지가 제시되는 형식이다. 그런데 나는 주요 뉴스 서비스에 자주 ‘낚이곤’ 한다. 그리고 이 불운은 내 실수이기보다는 주요 뉴스 서비스, 나아가 <한겨레>의 취재 및 보도 방식의 결함에서 기인한다고 믿는다.
낚시성 기사의 일면들
주요 뉴스 서비스의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주요 뉴스 서비스에 나온 제목과 본기사 제목 사이의 불일치에 있다. 심지어 주요 뉴스 서비스의 제목, 본기사 제목, 기사 내용이 각기 다른 사례까지 종종 발견된다. 예컨대 ‘박근혜의 7시간, 아베의 26분…참사 대처하는 태도’(4월20일치)라는 주요 뉴스 서비스 제목을 클릭할 때 뜨는 본기사의 제목은 ‘지진 ‘26분’ 만에 나타난 아베, 4일간 ‘9차례’ 직접 브리핑’이었다. 더욱이 기사 본문에는 대통령의 행적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김용옥 인터뷰 기사에 대한 주요 뉴스 서비스 제목은 ‘도올 “더민주, 지들이 잘해 이긴 줄 알면 폭삭 망한다”’였다. 그러나 막상 실제 기사를 클릭했을 때 나오는 기사 제목은 ‘중국이 미국보다 조금 더 리니언트한 제국 되지 않을까’였다(4월23일치).
주요 뉴스 제목과 기사 제목이 일치하지만 기사 내용과 동떨어진 경우도 왕왕 있다. ‘우리는 왜 설현의 손짓과 송중기의 눈빛에 무너지나’라는 주요 뉴스 제목을 클릭했을 때 등장한 기사는 신경경제학을 설명하는 정재승 교수의 과학 칼럼이었다(4월23일치). 이 칼럼에서 송중기와 설현은 광고 사례로 짧게 언급된 정도다. 제대로 낚인 이가 비단 나뿐만은 아닌가 보다. “제목으로 낚였음(…) 아무데나 송중기 이름 팔지 맙시다”나 “와 제목 한번 기가 막히게 뽑았네”같이 빈정 상한 댓글들이 이어진 걸 보면. 정말이지 이런 제목 수법은 송중기의 남용일 뿐 아니라 독자에 대한 배신이고 칼럼 필자에게 무례하다. 어쩌면 사소하다고 넘겨버릴 수 있지만 그대로 쌓이면 신뢰에 흠이 갈 실수들도 빈번히 발견된다. ‘“돈줄 통장, 추선희 차명계좌”… 전경련 돈 입금되자 일’의 제목 경우에, 기술적인 한계나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있었을 거라 짐작은 해보지만, 독자로서 해독할 수 없는 기사 제목을 대면하는 경험이란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4월22일치).
낚시성 기사, 본능인가? 무능력인가?
백번 양보해서 주요 뉴스 제목의 목적이 제목들의 기계적인 일치에 있지 않고 기사의 ‘관전 포인트’를 안내하는 친절에 있다고 호의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이 기능성을 적용하기엔 일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주요 뉴스 제목과 기사 제목은 때론 일치하지만 어긋나기도 해서 그저 제각각으로 뒤죽박죽이다. 이쯤 되면 자신이 기대했던 기사를 실제 접할 수 있을지 여부는 매번 클릭의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불규칙성이 단지 우연적이지만은 않게 보이는 경향성을 띤다는 점에 있다. 대체로 어려운 경성 기사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제목으로 재가공되지만, 기사 자체가 오락적이거나 쉽게 흥미를 끌 만한 것이어서 더 이상의 가공이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제목들이 일치하는 편이다.
물론 클릭 수에 따라 거액의 광고수입이 좌지우지되는 인터넷의 주목경제 질서로부터 어느 언론사인들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저급한 언론일수록 선정적이고 과장된 기사 제목을 띄워서라도 독자의 관심을 끌어모으려는 욕구를 본능적으로 발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언론사라면 올바른 기사로 독자의 충실한 관심을 형성하고 그렇게 싹튼 독자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지키고 굳건하게 키우는, 품위 있는 적극성으로 대응한다. 이 점에서 <한겨레>가 천박한 상업적 언론의 저속한 기술을 답습하는 양태는 매우 우려스럽다.
또한 저널리즘의 품질이라는 면에서 볼 때, 의도만 앞서지 기사로 충실히 뒷받침하지 못하는 취약함도 개선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박근혜의 7시간, 아베의 26분” 기사가 격을 갖추려면 ‘박근혜의 7시간’에 관한 본격적인 탐사보도가 이루어져야 했다. 이 일이 정 어렵다면 양국의 정치인 비교가 지니는 함의에 관한 해설이라도 나왔어야 했다. 이와 달리 보도의 실질적인 깊이는 결한 채 제목으로 분위기만 키우는 식의 기사란, 정치적 야망은 크지만 그것을 지지할 취재력과 해석력은 미흡한 부실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언론의 근본 자세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는 비판정신의 작가로 유명한 조지 오웰은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할 만큼 급진적인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그가 노동자들의 고통 어린 삶을 취재하여 남긴 통렬한 르포르타주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는 수개월간 광부의 집이나 싸구려 여관에 머물며, 절망과 탐욕에 젖은 채 질병과 기아에 허덕이는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한 여인의 얼굴이 지금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지칠 대로 지친 해골 같은 그 얼굴은 더없이 비참한 신세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 참담한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아이 여럿을 깨끗이 기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나더러 온몸에 똥을 뒤집어쓴 기분을 느껴보라고 말하는 듯했다”라는 한 묘사처럼, 똥을 뒤집어쓰는 듯한 절절한 체험과 날카로운 통찰이 뒷받침되었기에, 계급모순 비판 및 사회주의적 대안을 역설하는 그의 급진적 주장이 비로소 설득적일 수 있었다.
한편 “우리 이 정도면 통하잖아?”라며 ‘윙크’하는 언론은 허황되고 불성실하다. 다양한 성격의 독자들에게 정확하고 심층적인 정보와 의견을 폭넓게 전달해야 하는 본질적 책무는 망각한 채, 끼리끼리의 폐쇄적 소통코드를 유도, 강화하는 폐해를 낳기 때문이다. 설사 이런 코드가 사회 안에 해석공동체를 구성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또한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의 명언대로 작은 ‘눈짓’의 미묘한 의미가 잘 통하기 위해선 엄청난 깊이의 ‘두꺼운 묘사’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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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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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좋은 언론이란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그 답은 단순하다. 또 그만큼 절대적이다. 미셸 푸코가 설명한, ‘두려움 없는 발화’의 뜻을 지닌 ‘파레시아’(parrhesia)의 요건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그 근본성을 깨달을 수 있다. 푸코에 의하면 파레시아는 솔직, 진실, 용기, 비판, 자발의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즉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바를, 외부의 강요나 위협에 맞서, 오로지 자발적인 의지에 힘입어 자유롭고 투명하게 말함을 뜻한다. 이 원칙은 오늘날 언론에도 필수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덕목이다. 반면 진보정치를 외치면서도 자기 노력에는 게으른 낚시 언론은 거짓, 허위, 두려움, 아첨, 유혹과 강요라는 값싼 미끼에 스스로 낚여 병들어 간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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