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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26 19:26 수정 : 2013.12.26 19:26

시민편집인의 눈
국가기관 대선개입·전두환 재산추적 보도 등 올 한해 노력 돋봬
제2의 유신시대 펼쳐지는 상황, 새롭게 ‘세상 바꾸기’에 나설 때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그 시대는 어두웠다. ‘민주주의’는 교과서와 헌법에만 존재했다. 언론은 제 목소리를 잊은 지 오래였다. ‘안녕’은 권력과 그 주변의 전유물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폭압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시민들의 열망은 뜨거웠다.

25년 전 <한겨레> 창간 시절의 이야기다. 그 열망 속에 태어난 <한겨레>는 시민들의 믿음에 화답했다. 지면은 거칠었지만, 활기가 넘쳤다. 광고 탄압, 논설고문 구속 등 갖은 억압에도 굽히지 않았다. ‘세상을 바꿔보자.’ 그 다짐과 믿음은 <한겨레> 공동체 안에 넘쳤다. 그 순수한 열정은 언론계의 풍토를 바꾸고,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데 한몫했다.

30년 군부정권이 막을 내리고, 시민들은 헌정사상 첫 정권교체도 경험했다. 언론도 눈에 보이는 굴레에서 벗어났다. 무슨 말이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한때는 언론의 조직적인 공세에 정권이 시달릴 정도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세상은 돌고 돌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아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형국이다. ‘제2의 유신시대’가 펼쳐지고 있다는 탄식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순리가 사라졌다. 염치도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왕조시대의 제왕이다. 그 신하들은 왕 앞에서 바른말을 꺼내지 못한다. ‘법과 원칙’은 백성을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약자를 탄압하는 도구로만 쓰인다. 정권과 한 몸이 된 언론은 ‘나팔수’로 되돌아갔다. 서민 살림살이는 팍팍하다. 사람은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대원칙은 사라지고 있다. 젊은이들에겐 꿈꿀 겨를이 없다.

<한겨레>가 다시 한 번 ‘세상 바꾸기’에 나설 때다.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은 <한겨레>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새삼 창간정신을 곱씹어 볼 일이다.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려는 노력도 필요할 터. 독자들은 다소 무디어진 필봉을 걱정한다. ‘기계적 중립’의 오류, ‘조중동’ 닮아가기 등도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한겨레>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시민들의 신뢰도와 기대치가 높다는 점은 축복이다. 올 한해 지면을 살펴보았다.

<한겨레>는 올해도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 백미는 국가기관이 개입된 ‘부정선거’ 의혹 보도다. 지난 대선 직전부터 1년 남짓 동안 양파 껍질 벗기듯, 부정의 전모를 파헤쳐간 끈질긴 추적이 돋보였다. 한 국정원 직원의 ‘개인적 일탈’로 묻힐 사건에서 국가기관이 주도한 ‘헌정유린’ 음모를 캐냈다.

그 과정에서 거둔 가외 성과도 옹골찼다. 국가기관의 중대한 범법행위에 대한 대통령의 불감증, 집권여당의 무능과 무소신, 정권의 노골적인 검찰 수사 훼방 등을 통해 박근혜 정부의 국정철학과 실체를 가늠케 하는 데도 <한겨레>는 한몫했다. 대통령은 단호히 대국민사과조차 거부했지만, 그것은 ‘법과 원칙’에서 벗어난 억지였다.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옹고집을 설득하려는 노력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진실에 접근하려는 검찰총장과 수사팀장을 갈아치운 건 부질없는 일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인 것을.

끝내 천주교 사제들이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기에 이른 것은 물론 불행이다. 이는 <한겨레>의 땀과 열정이 빚어낸 아이러니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가는 세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진통이다. 요즘 ‘안녕’ 열풍도 부조리한 세상에 눈감는 언론에 대한 안타까움의 다른 표현 아닌가.

군 사이버사령부 등 또다른 국가기관들의 대선 개입 행위도 <한겨레>가 밝혀냈다. 남북정상회담 녹취록을 대선에 악용한 ‘범법’ 역시 거대한 음모의 한 가닥이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상황에 이르렀다. 마지막, 거대한 퍼즐 풀기 과제가 <한겨레>에 던져진 셈이다. 그 ‘찌라시’가 궁금하다. 그런 찌라시가 존재할 개연성이라도 있는가. 집권당 실력자의 얼토당토않은 변명에 거대한 음모의 답이 숨어 있다. 한국판 ‘워터게이트’는 아직 진행중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숨겨진 재산을 환수케 한 공도 결코 작지 않다. 시효 만료를 코앞에 두고, ‘가진 게 ‘29만원뿐인 노숙자’의 지갑에서 1500억원이 넘는 거금을 끌어낸 것이다. 아직 ‘법과 원칙, 정의’가 사멸하지 않았음을 입증한 <한겨레>의 열정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특별취재팀은 5월부터 9월까지 집요하게 은닉재산에 매달렸다. 그들은 전두환 일가의 재산목록과 등기부 등본, 전두환·노태우 내란음모 사건 재판기록과 제보, 내란음모 사건 수사 검사와 주변 인물 등 방대한 자료와 인맥의 산과 씨름했다. 검은 베일도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전두환 추징법’ 여야 합의, 전두환 일가의 추징금 완납계획서 제출로 이어졌다. 이 특별취재는 독자와 시민을 참여시킨 ‘크라우드소싱’ 실험의 개가였다는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감정노동’의 애환에 주목한 ‘마음을 짓밟는 감정노동’ 시리즈, 보조출연자(엑스트라)의 비인간적 일터를 다룬 ‘엑스트라 쥐어짜는 드라마 왕국’도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감정노동’ 시리즈는 현대노동의 또다른 세계를 조명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감정노동의 폐해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기폭제가 될 법하다. 기업, 노동계 모두에 새로운 화두를 던진 신선한 기획물이었다.

‘엑스트라’ 시리즈는 엑스트라의 숨결까지 전달되는 생생한 기사였다. 잠입취재 열정이 뜨겁게 느껴졌다. 몇 년 전 취재원과의 ‘짜장면 약속’을 지킨 기자정신도 정겹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인간다운 배려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기자의 시선이 따사롭다.

‘권력에 춤추는 통계’ 시리즈는 보도에 등장하는 숫자가 어떻게 생명력을 얻게 되는가를 보여줬다. 과학성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숫자의 허구, 통계의 함정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한 제보를 지렛대 삼아, 권력이 통계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실태를 심층적으로 접근한 점이 돋보인다.

언론이 한 시대의 ‘사회 안녕’을 주도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물론 미래의 안녕을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존재다. 2014년 <한겨레>의 활약이 자못 기대된다.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매월 마지막 금요일치 신문에 실리는 ‘시민편집인의 눈’은 시민편집인실의 <한겨레> 지면 감시 결과를 공개하고 <한겨레>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시민편집인실과 독자센터 등에 들어오는 독자들의 의견을 소개하고 온라인(www.hani.co.kr)에서 각 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중계합니다.

또 ‘사실확인’난은 오보나 단순 사실관계의 오류 체크를 독자에게 맡긴다는 취지에서 만들었습니다. 오류를 잡아내 시민편집인실로 보내주시면 한 편을 뽑아 소개하겠습니다. 뽑힌 독자께는 한겨레신문사가 발행하는 <한겨레21>, <이코노미 인사이트> 중 한 잡지의 6개월 구독권을 드립니다.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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