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2.25 18:55
수정 : 2007.12.25 19:38
|
김형태/변호사
|
시민편집인칼럼
틱낫한 스님의 글을 읽었다. “나는 수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그 많은 이름들 중 하나를 들었을 때 난 네, 하고 대답한다. 나는 맑은 연못에서 행복하게 헤엄치는 개구리. 또한 그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풀섶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뱀.” 서로 살려고 기를 쓰는 개구리이기도 뱀이기도, 그리고 둘 다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스님이기도 한 불성(佛性)은 이 셋 중 누구의 바람을 들어 주실까. 우주 삼라만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치’나 ‘의미’는 지극히 상대적이다. 자신이 뱀이냐 개구리냐 이를 바라보는 스님이냐에 따라 가치도 의미도 전혀 차원이 달라진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선 유력 후보들 모두 개신교 아니면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당선되게 해 달라 기도를 올렸을 게다. 하느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 주실까. 결과적으로 이 아무개가 당선되었으니 그의 기도가 통한 것일까.
엠브로즈 비어스는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지극히 부당하게도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요즈음 도봉산 암자며 강남의 성당에서 많은 어머니들이 바치는 대학합격 기원이 그렇다. 성적과 지원자 수로 결정되는 합격의 법칙을 내 자식을 위해 무효화해 달라고 바치는 기도는 보기에 안쓰럽다.
선거가 끝난 뒤 많은 이들이 민주며 정의,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과 돈을 좇아 간 국민을 탓한다. 이 역시 도도한 역사의 법칙을 무효화해 달라는 칭얼거림이란 생각이 든다. 국민의 현명이나 무지를 논할 일이 아니다. 국민은 그저 지난 5년을 돌아보면서 서민들이 뽑아 준 정권이 서민에 불리한 정치를 한 결과를 그대로 거울로 비춘 것이다. 그저 거울처럼 비춘 사실을 가지고 당위의 언어인 ‘심판’이니 ‘현명한 선택’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국민에게 아첨하는 술수이거나 여전히 국민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소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잘 먹고 잘 지내고 싶고,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 이런 우리들의 본성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여 멋지게 자유니 민주라 이름 지었다. 어느 가치 치고 상대적인 사람의 속성을 떠나서 그 자체로 지고지순한 것은 없다. 사람들은 때로는 먹고사는 데 급급해 남을 속이기도 하고, 먹고 살 만해지면 정의나 진실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굶어가면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는 인류 시작부터 끝까지 영원히 극소수다.
이번 대선에서 왜 거짓을, 돈을 선택했느냐고 국민에게 화를 내는 것은 왜 내 자식을 시험에 떨어뜨렸느냐고 부처님을,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과 똑같다. 민주·반민주는 ‘지금 여기서’는 흘러간 옛 노래다. 신자유주의가 서민들의 삶을 갈수록 힘들게 하는 이 시대에 여전히 민주대 반민주라는 흘러간 옛노래만 되뇌는 한 ‘현명한’ 선택은 기대하기 어렵다. 돈과 효율은 이제 저 보름달처럼 가득 찼다. 지난 선거날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돈과 효율은 당분간 국민을 만족시키겠으나 스스로의 모순으로 반달이 되고 그믐달이 되어 저를 선택한 국민을 괴롭히고 마침내는 국민이란 거울에서 스러져가리.
개구리이고 뱀이며 틱낫한이란 여러 이름을 가진 국민은 이 많은 이름들 중 하나를 들었을 때 네, 하고 대답한다. 그래서 오늘도 변증법이란 역사의 수레바퀴는 또 한바퀴 굴렀다.
김형태/변호사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