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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10 22:47 수정 : 2006.06.09 15:02

홍세화 시민 편집인

홍세화의 시민편집인 칼럼

솔직히 ‘시민편집인’이란 이름으로 칼럼을 쓴다는 게 나로선 고역이다. 신문과 독자 사이의 중간자로서 〈한겨레〉에 독자의 의사를 반영하는 게 시민편집인의 소임이라 하겠지만, 과연 한겨레 독자들의 평균 시각이라는 게 있기나 한 것일까? 설령 그것을 가늠할 수 있다손 쳐도 그것이 의미를 갖는 것일까?

가령 한겨레 독자는 세계화 문제에서 한겨레가 어떤 시각을 갖기를 바랄까? 4월4일치 ‘김선주 칼럼’과 다음날인 5일치 ‘아침햇발’은 세계화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화라는 환상’과 ‘세계화 바로보기’라는 제목에서부터 시각의 편차를 드러낸다. 그것은 글 내용에서 두드러져, 김선주 칼럼은 “… 그러나 빈부격차가 동남아나 남미처럼 더욱 커지고 가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대물림될 가능성이 현재로선 더 커 보인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세계화인지 우울하다”로 끝맺고 있는데, 아침햇발은 “이제 세계화라는 사회 경제 현상을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조명할 때가 됐다. 세계화를 관념적이고 감상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 얻는 것을 너무 부각시켜도 안 되지만 부정적 측면만 강조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독자는 헷갈릴 수 있는데, 이때 시민편집인은 한겨레에 세계화 문제를 두고 심층토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그 구실을 마쳐야 할까? 그렇지 않고 한겨레를 비판하는 칼럼을 써야 한다면 어느 편에 서야 할까? 따라서 나는 뚜렷한 함의를 갖지 못한 시민편집인이란 이름에 기대기보다는 ‘나’를 밝히는 편이 차라리 솔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뜨거운 지지에서 나온 비판이기에 차가울 수 있으며, 애당초 ‘주례사 비평’은 내 무덤에서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어차피 악역은 피할 수 없게 돼 있다.

이처럼 악역을 맡은 자는 4월7일치 신문에서 노중기 한신대 교수의 기고 ‘참여정부의 노동탄압’을 오랜 가뭄에 단비처럼 만났다. “민주정권을 자처하는 ‘참여정부’의 반민주성, 반노동자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라는 글에 내가 반가워함은 그 역설의 크기만큼 한겨레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을 반영한다.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한겨레 지면은 나에게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 특히 참여정부의 노동탄압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나는 〈한겨레〉를 통해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생생한 긴장감도, 굴종을 강요당한 노동자들의 분노와 저항의 몸짓도 느끼기 어려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사용자 쪽으로 기울어진 노사관계를 임기 말까지 균형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변화의 전망과 기대 앞에서 노사 양쪽은 물론 사회가 긴장했다. 그러나 대미 관계 등 다른 현안에서도 그렇듯이, 노 대통령의 공언(公言)은 공언(空言)이 되었고, 사회변화 기대 속에 꿈틀댔던 긴장감은 한겨레 지면에서도 점차 사라졌다. 그 자리에 냉소주의와 ‘3S’나 대리만족을 위한 읽을거리들이 대신 들어섰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최근 편집국 조직 개편이 있으면서 노동팀이 보강되었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고 속에서 우리 노동계가 헤쳐나갈 길을 ‘노동 밖에서’나 ‘노동 위에서’가 아닌 ‘노동 안에서’ ‘노동과 함께’ 분석하고 전망하고 모색하는 데서 오는 긴장감을 한겨레 지면을 통해 느낄 수 있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바란다. 이 바람은 악역을 맡은 자만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publicedi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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