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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7 18:24 수정 : 2006.06.09 15:03

홍세화 시민 편집인

홍세화의 시민편집인칼럼

<한겨레>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처지에 서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이 겪는 아픔을 증언하고 이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 인간성의 확대를 꾀해야 한다. 그것이 한겨레의 존재이유다.

지난주부터 한겨레는 ‘사형제에 사형선고를’이라는 기획물을 연재하고 있다. 우리는 사형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사형제를 찬성하는 사람은 대개 낙태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거꾸로, 사형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대부분 낙태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 생명에 대해 사람들이 모순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특히 사회의 역할과 책임을 누구의 시각으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가”라는 성찰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형제에 사형선고를’ 기획물은 한겨레만이 할 수 있는 한겨레의 결실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지난 1월 ‘아침햇발’에 실렸던 ‘지율, 박 대표 그리고 근본주의’라는 제목의 칼럼에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처지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근본주의의 범주에 함께 묶고 있기 때문이다. 지율 스님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근본주의적 행태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서 시대의 아픔을 증언하려는 사람과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나란히 놓고 견줄 수는 없는 일이다. 겉으로 드러난 행태의 동질성에 주목하여 한데 묶었겠지만, 정치인의 권력적 행위와 순수한 개인의 자기희생적 행위를 함께 묶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를 낳는다. 그 점은 ‘생명을 자주 거는 편’이라는 표현 자체의 진정성이 의심스럽듯이, 실제로 두 사람 모두 ‘생명을 자주 거는 편’인지 의심스러운 점으로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도 남쪽을 바둑판처럼 쪼개놓은 수많은 개발에 대해서도 말이 없”고, “북한산 국립공원에서 거대한 불사가 벌어지고 있을 때도 천성산 생명만을 이야기했”던 지율 스님에게 일관성의 부재를 지적한 칼럼에서 오히려 근본주의적 시각을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그릇된 해석이 될 것이다.

‘한겨레는 일관성을 지키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끝없는 긴장’이 한겨레와 한겨레 구성원이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는 답변을 요구한다. 새만금에 대해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도, 평택 미군기지 확장과 이에 따른 박래군·조백기 인권평화 활동가들의 구속 사태에 대해서도, 또 불균형한 노사간 힘의 역학 관계와 그리하여 오늘 고속철도(KTX) 여승무원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도 한겨레가 충분히 대처하고 있지 못하다는 부채의식이 구성원들에게 ‘긴장’을 포기하도록 작용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한계적 상황 아래서 구성원들은 더욱 긴장할 일이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긴장의 끈을 놓을 때 자칫 냉소로 흐르게 되고, 냉소주의는 한겨레의 존재이유의 상실을 뜻한다.

한겨레는 잘 알고 있다. 세상을 바꾼다면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기 전에 스스로 바뀐다는 사실을. 권력을 잡으려고 스스로 변하고 권력을 잡은 뒤에 또 변한다. 그렇게 권력은 적어도 두 번 사람을 변하게 한다. 그렇다면 한겨레는 스스로 변하지 않은 채 세상을 바꾸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가? 지워진 몫에 비해 힘이 약해 불만과 초조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겨레는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홍세화/시민편집인 publicedi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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