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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9 09:30 수정 : 2019.11.09 13:24

<한국방송>(KBS) 최장수 연예 정보 프로그램 <연예가중계>가 36년 만에 방송을 종료하고 내년 상반기 새로운 형태로 시청자들에게 돌아올 예정이다. <연예가중계> 진행자와 리포터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오브더티브이
<연예가중계>종료에 부치는 편지

사생활 캐는 케이블 연예프로
지상파도 가십성 방담 신설해
지상파이길 포기한 내용 방송

<연예가중계> 폐지 뒤 내년 부활
인터넷언론·유튜브와 경쟁보단
분석성 보도와 선명한 기획 필요

<한국방송>(KBS) 최장수 연예 정보 프로그램 <연예가중계>가 36년 만에 방송을 종료하고 내년 상반기 새로운 형태로 시청자들에게 돌아올 예정이다. <연예가중계> 진행자와 리포터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몇년 전 한 케이블 채널의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고정 패널 출연 제안이 들어왔다. 매주 연예계를 달군 핫 이슈 중 하나를 골라 토론하는 20분짜리 생방송 코너를 만들 참인데, 토론 패널로 섭외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후발주자 입장에서 타사와 차별화된 새롭고 독특한 시도를 해보고 싶다며, 연예계의 각종 이슈를 놓고 뜨겁게 토론해보자던 그 제안은, 꼼꼼히 뜯어볼수록 수락할 이유보단 거절할 이유가 더 많아 보였다. 일단 생방송을 잘해낼 자신도 없었거니와, 토론 같은 토론을 하기에 20분은 너무 짧게 느껴졌다. 핫 이슈라는 말도 여러모로 신경 쓰였다. 연예 정보 프로그램이 다루는 ‘핫 이슈’ 중 상당수는 연예인들의 사생활이나 가십일 텐데, 그게 범죄나 사회정의를 거스르는 일이 아닌 이상 연예인의 사생활에는 관심을 안 쏟는 게 건강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터였다. 말 그대로 남의 사생활 아닌가.

그냥 그때 거절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려던 나는, 문득 제작진이 내 맞은편에 앉을 패널로 누구를 섭외할 생각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주제나 포맷이 변변치 않아도 상대가 괜찮은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다 싶었으니까. 패널을 묻는 내 질문에 전화기 너머의 작가는 한 기자의 이름을 댔다. 여자 연예인들의 사진을 최대한 선정적인 각도로 찍고는 선정적인 제목을 붙여 기사화하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던 기자였다. 순간 제작진이 바라는 그림이 무엇인지 단숨에 이해가 갔다. 한쪽에는 엄숙하고 재미없는 표정으로 젠더 감수성이나 정치적 공정성 같은 이야기를 중얼거리는 사람을 앉혀 두고, 맞은편에는 방송에서 공공연하게 여자 연예인의 몸매를 품평하고 그것으로 커리어를 쌓아 올린 사람을 앉혀서 두 사람이 극과 극의 이야기를 하며 싸우는 모습을 연출해 보겠다는 심산이었겠지. 이러나저러나 연예계 가십은 풍성하게 다룰 수 있을 테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테고.

그렇게 어영부영 두 사람의 말이 같은 선상에 올려져서 싸우면, 여자 연예인을 성 상품화하는 일도 마치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의견인 것처럼 비칠 것 같았다. 끝까지 제작진이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면 내가 말릴 방법은 없겠으나, 굳이 내가 그걸 거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작가에게 “생방송 토론이 좋은 포맷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생방송을 잘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닌 것 같지만, 무엇보다 그분과는 같이 출연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당황한 작가는 내게 무슨 뜻인지 다시 물었고, 나는 재차 “죄송하지만 그분과 함께 방송하시든지, 저와 함께 방송하시든지 둘 중 하나만 하셔야 할 것 같다”고 답했다. 작가는 화급히 내부에서 다시 논의해보고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연락은 다시 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글쟁이에게 방송 출연 기회를 주는 걸 대단한 은혜를 베푸는 행위 정도로 생각하는 방송계 관행으로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글쟁이가 상대 패널과의 매칭을 문제 삼아 출연을 거절하는 일 자체가 어이없었을 테니까.

2020년 부활 예고

나야 사람이 둥글지 못해서 들어온 제안을 거절했지만, 소위 ‘대중문화평론가’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는 동종업계 종사자들과 연예부 기자들 상당수는 그런 포맷의 쇼에 기꺼이 출연했다. 기자들이 우르르 모여서 자사의 기사로는 말 못할 온갖 가십을 이니셜 뒤에 숨겨 흘리면서 자기들끼리 그걸 용감하다고 추켜올리는 프로그램이나, 풍문으로 떠도는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내면서 자신들이 팩트를 전달하고 소신 발언도 덤으로 얹어준다고 자부하는 프로그램이 케이블과 종편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스타들의 열애설과 자질구레한 가십을 캐던 지상파 연예 정보 프로그램들도, 기자들이 모여 방담을 나누는 포맷의 코너를 신설해 시류를 쫓았다. 연예부 기자들은 이제 지상파 채널에서도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공공연하게 어떤 연예인이 인터뷰 태도가 안 좋았는지, 제 보기에 누가 평소에 사생활이 별로였는지를 떠들어댔다. 지상파가 지상파답기를 포기하고, 기자가 기자 윤리를 포기한 채 사석에서나 몰래몰래 할 법한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전파에 태우는 광경은 꼴불견이었다.

새삼스레 몇년 전 기억을 꺼낸 이유는, 최근 <한국방송>(KBS)이 36년간 방영해 온 최장수 연예 정보 프로그램 <연예가중계>의 방송을 종료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2000년대 들어 연예계를 다루는 인터넷 언론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슈를 실시간으로 커버하는 속보 경쟁을 벌이는 동안, 일주일에 한차례 방영되는 연예 정보 프로그램의 경쟁력은 날로 약화되었으니까. 더군다나 해외 스타들의 내한 인터뷰조차 요즘은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다시피 하지 않았나. 서툰 한국말로 “사랑해요, 연예가중계”를 말하던 많은 해외 스타가, 이제는 서툰 한국말로 “오늘은 여기까지”(유튜브 채널 ‘영국 남자’ 클로징 멘트)를 말하는 시대이니 말이다. 속도 경쟁이나 단독 경쟁에서 지상파 프리미엄이라 할 만한 걸 상실한 상황에서, <연예가중계>만의 경쟁력이라 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재고해 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02년 10월부터 2003년 6월까지 <연예가중계> 진행을 맡았던 김병찬(왼쪽)씨와 김유미씨.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한국방송 쪽은 <연예가중계>의 마지막을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인 ‘폐지’나 ‘종영’ 대신 ‘종료’라는 단어로 수식했다. ‘폐지’와 ‘종료’의 차이를 정확하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2020년 상반기에 새로운 형태의 연예 정보 프로그램을 선보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 선택이었으리라. 그리고 새 프로그램을 선보인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수년 전 내게 들어왔던 그 이상한 제안을 떠올렸다. 속도 경쟁이나 단독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만한 상황이 아닌데, 대중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나 색깔이 선명한 기획을 선보일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결국 남는 건 얼마나 더 지독하게 가십을 파고들 수 있느냐의 싸움일 것이다. 연예 정보 프로그램의 후발주자라서 뭔가 새롭고 파격적인 시도를 하고 싶다면서, 나보고 여자 연예인 몸매 품평을 하던 사람과 같이 연예계 핫 이슈를 토론해보자던 그 기괴한 제안의 속내처럼 말이다. 종료 소식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2020년에 돌아온다는 이야기 앞에서 불안해진 게 나 하나일까?

언론 아닌 흉기

우리는 연예인들이 루머나 근거 없는 공격에 시달리느라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관성적으로 악플을 탓하고 날로 도를 더해가는 사이버불링(인터넷 공간에서의 괴롭힘)을 탓한다. 최근 설리의 부고에 많은 이가 인터넷 실명제 같은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그를 향한 누리꾼들의 악플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과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악랄하리만치 보도하며 가십을 확대 재생산하고 그에게 ‘트러블메이커’라는 이름을 붙여준 한국의 연예 저널리즘이 없었다면 악플의 수가 그토록 많았을까? 스타들의 소셜미디어에 알림 설정을 걸어 놓고, 새 글이 올라오면 바쁘게 받아쓰기식 기사를 쓰고, 그걸 다시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공공연하게 다루는 일련의 흐름에서 연예인의 삶은 사생활까지도 공공재로 전락한다. 한국의 연예 저널리즘과 그 종사자들은, 이제 언론이라기보단 흉기에 가깝다.

한국의 연예 저널리즘 형성에 큰 몫을 담당했던 <연예가중계>가 그 후신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그 프로그램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연예 저널리즘을 더 치열하게 고민하는 프로그램이었으면 한다. 가십이 아니라 작품과 산업을 말하고, 연예인의 사생활에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대신 연예인의 공적인 발언과 행동을 더 치열하게 뜯어보고, 홍보가 아니라 선명한 관점과 분석을 담아내는 프로그램이 되기를 바란다. 연예 저널리즘을 흉기에서 언론으로 되돌리는 첫걸음을, 누군가 먼저 떼어야 한다면 기왕이면 36년 전통의 <연예가중계>의 후신이 떼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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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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