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명이 모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수찐다 총리 퇴진과 민주화를 외친 1992년 5월 항쟁의 현장인 사남루앙(민주광장)은 타이의 민주화 성지다. 1999년 2월 3만명의 타이 농민들이 사남루앙에 모여 농가부채 탕감 등을 요구하며 밤샘농성을 벌이고 있다. 정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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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67) 1992년과 2016년의 타이
요즘 타이 사람들은 참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늘도 정치도 어째 마음처럼 따라주질 않는다. 4월 들어서부터 온 나라가 그야말로 불볕더위다. 북부와 중부 쪽은 날마다 40~42도를 웃돌고 수코타이는 44도까지 올라 1958년 우따라딧이 세웠던 43.5도 기록을 갈아치웠다. 여기에 가뭄까지 겹쳐 난리다. 77개 주 가운데 27개는 물이 거의 바닥났고 전국 주요 댐과 저수지들에 괸 물의 양은 죄다 30% 아래로 떨어졌다. 1994년 뒤 가장 심한 가뭄이라고들 한다. 게다가 치앙마이를 비롯한 북부는 해마다 12월~4월 사이 어김없이 날아드는 화전 연기 탓에 숨이 막힌다고 또 아우성들이다.
정치란 건 한술 더 떠 시름을 달래주기는커녕 지친 사람들을 더 짓눌러대고 있다. 2014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인들이 얼마 전 들고나온 새 헌법 초안이 큰일이다. 군사정부는 헌법 초안을 8월7일쯤 국민투표에 부치려는가 본데, 정작 사람들은 그 속살을 따져볼 수도 없는 형편이다. 군사정부가 헌법을 헐뜯거나 마다하는 모든 행위를 불법이라 옥죄는 탓이다. 한마디로 헌법이 뭘 담았는지 따위는 알 것도 없고 그냥 ‘좋다’에 찍으라는 뜻이다. 군사정부가 공적으로 삼아온 친탁신 프아타이당의 전 하원의원 와타나 므앙숙은 페이스북을 통해 헌법을 나무랐다가 군대 출두 명령을 받았다. 쿠데타 군인들이 반대자들을 군대로 끌고 가서 ‘의견조정’을 한답시고 으름장을 놓는 압박술이다.
피로 물들었던 1992년 ‘5월 항쟁’
더구나 사람들은 이 헌법을 마다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조차 모른 채 투표장으로 가야 할 판이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그 대안을 밝히라고 다그쳐왔지만 군사정부는 아무 말이 없다. 장군총리 쁘라윳 짠오차는 “내 마음속에 계획이 있다”고만 했다. 헌법 만드는 일이 특급비밀일 줄이야. 새 헌법이 거부당하면 기존 헌법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지만 제왕적 절대권력을 지닌 장군총리는 그마저 따르지 않을 모양이다. 현 임시헌법 제44조는 국가평화질서평의회(NCPO) 의장한테 ‘개혁, 통합, 화해, 평화, 질서, 안보, 경제, 정부에 필요한 명령과 집행 권한’을 무제한 안겨주면서 ‘모든 명령과 집행이 합법, 합헌, 최고 권위를 지닌다’고 못 박아 두었다. 이건 입법, 사법, 행정 위에 군림하는 아주 특별한 신정헌법이다. 바로 그 국가평화질서평의회 의장이 쁘라윳이다.
요즘 타이 정치판 돌아가는 꼴을 보노라면 1992년이 자꾸 떠오른다. 24년 전 꼭 이맘때였다. 그날도 타이는 땡볕에 쪼였고 가뭄에 허덕였다. 그해 4월 중순이 지날 무렵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남루앙으로 몰려들었다. 앞선 4월7일 총리 자리를 차지한 수찐다 크라쁘라윤 장군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탐마삿대학을 옆구리에 낀 사남루앙은 타이 현대사에서 늘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이었고 피로 물들었던 성지였다. 수찐다는 그보다 1년 전인 1991년 2월 쿠데타로 찻차이 춘하완 총리 정부를 몰아내고 날치기 헌법을 만들어 권력을 잡았다. 4월 말로 접어들면서 이른바 사남루앙 정족수 10만이 채워졌다. 의회정치를 대신한다는 시민항쟁의 상징이었다. 수찐다의 그릇된 토지 배치 계획으로 땅을 잃은 동북부 농민들, 경제적으로 따돌림당한 도시 노동자들, 학생들, 지식인들, 예술가들이 사남루앙을 빼곡히 메웠다. 사남루앙 정치에 처음으로 넥타이부대도 등장했다. 5월 들어 20만 가까이로 불어난 사람들은 수찐다 퇴진과 민주화를 외쳤다. 5월18일 자정이 지날 무렵 수찐다가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즈음 사남루앙에서 육군본부로 향하는 길목인 민주기념탑 쪽에서 첫 총성이 울렸다. 새벽 4시쯤에는 군인들이 무차별 발포를 해댔다. 정부는 52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물론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 가운데 그 숫자를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5월20일 수찐다와 시위대를 이끌었던 짬롱이 국왕 앞에 불려가 평화를 약속하면서 시위는 잦아들었다. 나흘 뒤인 24일 수찐다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그 5월 항쟁을 블랙메이(Black May: 검은 5월)라는 별명으로 불러왔다.
그날 현장을 되돌아보면 20만 시민을 이끌 지도부가 없었다. 짬롱이 그저 유명세를 업고 나섰던 건 사실이지만 30인 시민항쟁위원회라는 것도 실질적인 조직이 아니었다. 그 30인 가운데 군인들 발포 뒤에도 유일하게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예술가 와산 시티켓은 “내가 30인 지도부에 들었다는 건 군인들 발표로 알았다”고 했을 정도다. 말하자면 군인들이 만든 수배자 명단이었던 셈이다. 빈민운동가 와니다 딴띠위타야피탁이나 가수 앳 카라바오도 저마다 “30인에 들긴 했지만 현장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털어놓았다.
내 기억에 1992년 사남루앙은 비록 어수룩한 시민항쟁이었지만 그만큼 정갈했다. 독재 타도를 외쳤고 오직 민주화와 정의를 앞세웠을 뿐 정치적 잇속을 따지는 이가 없었다. 뒷날 탁신 정부에서 부총리가 될 짜뚜론 차이생, 민주당 정부에서 총리를 할 아피싯 웨차치와, 그리고 친탁신 레드셔츠를 이끌게 될 위라 무시까퐁과 짜뚜폰 프롬판, 짬롱과 함께 반탁신 옐로셔츠를 끌고 나설 피폽 통차이와 수리야사이 까따실라도 그날 사남루앙에서만큼은 모두 하나였다. 그자들이 2000년대 들어 제멋대로 해석한 민주주의를 우기며 죽으라고 다툴 사이가 되리라 여겼던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2014년 쿠데타 집권한 군사정부8월 중 헌법 초안 국민투표 예정
뭘 담았는지도 모른 채 ‘좋다’ 강요
반대자에 ‘군대 출두명령’ 압박술 1991년 2월에도 군사 쿠데타 비극
이듬해 5월 사남루앙 시민항쟁으로
절대권력 수찐다 장군총리 몰아내
쁘라윳 짠오차, 같은 운명 맞이할까 1991년과 2016년, 두 ‘군용헌법’ 그리고 24년이 지났지만 그 1992년 사남루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타이 사회는 그날과 똑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 헌법의 위기 탓이다. 1991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수찐다의 국가평화유지평의회(NPKC)가 만든 헌법이 선거를 거치지 않은 총리를 인정했다. 시민항쟁을 부른 밑바탕이었다. 2014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쁘라윳의 국가평화질서평의회가 지금 그 길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다. 1991년과 2016년 두 ‘군용헌법’은 오직 쿠데타 군인들의 권력 창출만을 목표로 삼았다. 더구나 쁘라윳이 들고 나선 2016년 헌법은 민주주의 기본 개념마저 짓밟아 버렸다. 선거를 거치지 않은 총리를 인정할 뿐 아니라 상원의원 250명을 국가평화질서평의회가 뽑는다는 대목까지 덧붙여 놓았다. 또 이 헌법은 시민이 뽑은 의회와 정부를 무효로 만드는 권능을 헌법재판소에 쥐여주면서 삼권분립 원칙을 원천적으로 깨뜨렸다. 정작 그 헌법재판소를 제어할 만한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이 헌법은 개헌마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정당들이 최소 10% 지지를 해야 개헌 발의를 할 수 있도록 못 박아 버렸다. 한 정당만 반대해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2017년 총선에서 친군부 정당의 등장을 떠올린다면 아예 개헌 불능으로 직결된다. 이쯤에서 장군총리 쁘라윳이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 나온다. 1992년 수찐다도 군대와 정당까지 주무르는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결국 총리 자리에 앉은 뒤 47일 만에 시민항쟁으로 쫓겨났다. 헌법을 잘못 건드린 결과였다. 불법권력은 반드시 부메랑으로 되돌아와 제 목을 친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한 셈이다. 쁘라윳도 국민투표로 헌법을 통과시키고 계획에 따라 2017년 총선을 치른 뒤 비선출로 총리 자리를 낚아챌 수 있다. 다만 그때쯤이면 지금처럼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연장인 임시헌법 제44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자유를 짓밟고 시민을 맘대로 옭아매고 누구든 군대로 불러들여 으름장을 놓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다. 이게 시민을 얕잡아보다 시민 손에 쫓겨난 수찐다가 남긴 교훈이고 1992년 사남루앙의 경고다. 1932년 유럽 유학파 관료와 청년 장교들이 개혁을 외치며 무혈 쿠데타로 쁘라차티뽁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로 바꾼 뒤 19번 쿠데타에 17번 헌법을 뜯어고쳤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탱크를 몰고 나왔던 군인들은 모조리 개혁을 외쳤다. 그 군인들이 정치판을 주무른 기간만도 59년째다. 타이 현대사를 스쳐간 총리 29명 가운데 16명이 장군이었다. 이 길고 지루한 장군의 시대는 언제쯤 막을 내릴 것인지, 그 끝은 있기라도 한 건지?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말문을 닫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만 있을지? 2016년 헌법이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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