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3.25 20:15 수정 : 2016.03.27 09:53

버마 수도 네피도의 의회 앞에 지난 새 대통령으로 당선된 띤쪼(왼쪽)와 아웅산수찌 여사가 나란히 서 있다. 띤쪼는 대통령에 뽑힌 뒤 “승리다. 이건 아웅산수찌의 승리다”라며 감격해했다. AP 연합뉴스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65) 버마 차기 대통령 띤쪼

“테이아웅, 띤쪼가 누구야? 띤쪼라고 들어봤어?”

“우리도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국경 쪽 소수민족해방군이나 민주혁명단체 쪽에서는 그이를 아는 이가 없었다.

“윈민, 띤쪼가 뭐 하던 사람이야?”

“우리도 잘 몰라. 확인한 바로는 아웅산수찌 어머니 이름 딴 킨찌재단 이사고, 아웅산수찌와 중학교 동문이고, 그 두 가족이 옛날부터 친하게 지냈다는 정도….”

랭군 쪽 기자들도 잘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지난 3월10일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 쪽에서 띤쪼(Htin Kyaw)를 대통령 후보로 올릴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버마(미얀마) 안팎 언론들은 한바탕 난리를 쳤다. 3월15일 그 띤쪼가 버마 대통령에 뽑혔다. 한 나라 대통령이 나오기 5일 전까지 기자들도 그 후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몰랐다는 뜻이다. 대통령 후보 이름이 뜨고서야 기자들도 부랴부랴 그 인물을 뒤지기 시작했으니 헷갈릴 수밖에는. 가끔 띤쪼가 아웅산수찌를 태우고 다녔다는 랭군발 보도를 딴 외신들은 대통령 후보를 아예 아웅산수찌의 운전기사로 소개하기도 했다. 띤쪼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란 것보다는 대통령 후보를 하원 등록 하루 전에 밝히는 아웅산수찌 식 정치가 문제라는 말이다.

수찌 운전기사로만 소개된 띤쪼
후보에 띤우·띤묘윈·슈웨만 등
올랐다가 모든 선택지가 사라지자
군부 입맛까지 생각한 막판 카드

58년만에 첫 민주선거를 통해
시민 대통령을 뽑았다는 버마
거기엔 오직 수찌만 있을 뿐
메가와띠-박근혜 잇는 불통 대가

수찌가 대통령 할 수 없는 헌법 59조

아직 버마 정부나 민족민주동맹이 공식적인 대통령 약력을 올리지 않았지만 지금껏 드러난 걸 보면 띤쪼는 올해 예순아홉이며 랭군대학에서 경제학, 런던대학에서 컴퓨터를 공부한 뒤 1992년까지 산업부와 외교부에서 관료로 일했다. 띤쪼와 달리 그이 아버지 민뚜운(Min Thu Wun)은 시인으로 잘 알려져 왔고 1990년 총선에서 민족민주동맹 후보로 당선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이 장인 르윈(Lwin)은 군인 출신으로 재무장관을 지냈고 민족민주동맹 창당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다. 띤쪼의 아내 수수르윈(Su Su Lwin)은 현재 민족민주동맹의 인민의회(하원) 의원이다. 만만찮은 정치가문 출신인 셈이다. 핏줄을 앞세우는 버마 사회에서 이쯤 되면 띤쪼라는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도 했는데 ‘스텔스후보’로 나타났다는 건 그이의 성격을 드러내주는 게 아닌가 싶다. 현지 언론은 그이를 아웅산수찌의 아주 가까운 조력자였다고 하는데 사실은 공적인 장에 나타난 적이 거의 없다. 굳이 따지자면 2000년 아웅산수찌의 만달레이 여행을 따라나섰다가 랭군역에서 붙잡혀 4개월 동안 인세인 감옥에 갇혔던 게 공적인 행적으로 볼 만할까.

민족민주동맹은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80% 가까운 지역구를 휩쓸면서 전체 의석 가운데 59%를 차지했다. 그 결과 제1당으로서 올 4월1일부터 새 정부를 꾸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이 영국인이었고 두 아들이 영국 여권을 지닌 아웅산수찌는 2008년 군인들이 만든 헌법 제59조 ‘자신과 부모, 배우자, 자식 가운데 외국 시민권자가 있으면 대통령을 할 수 없다’에 발목이 잡혀 대리 대통령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총선 승리 뒤부터 “대통령 위”에 있을 것이라고 했던 아웅산수찌는 띤쪼를 내놓으며 “정직함, 충성심, 훌륭한 교육”을 꼽았다. 15일 대통령에 뽑힌 띤쪼는 “승리다. 이건 아웅산수찌의 승리다”라고 화답했다. 몰표를 던져 제1당을 만들어준 시민보다는 아웅산수찌였다. 아웅산수찌가 이끌 버마 정치가 어디를 향해 갈지 이번 대통령 뽑기에서 이미 드러난 셈이다.

돌이켜보면 총선이 끝나자마자 시민들은 아웅산수찌가 내세울 대통령 후보를 놓고 온갖 추리전을 벌여왔다. 민족민주동맹 안팎에서는 예닐곱 이름들이 오르내렸지만 민족민주동맹 창당 주역인 부의장 띤우(Htin Oo), 아웅산수찌의 주치의 노릇을 해왔던 띤묘윈(Tin Myo Win)과 전 인민의회 의장 슈웨만(Shwe Mann)을 꼽는 이들이 많았다. 차기 버마 대통령 조건은 둘로 볼 만했다. 하나는 아웅산수찌를 향한 절대적 충성심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나눠 가져야 할 군부와 매끄러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웅산수찌가 편하게 다룰 수 있는 인물이면서 군부 눈 밖에 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웅산수찌는 지난 네 달 동안 후보를 놓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사이 민족민주동맹 안에서 띤우는 서서히 멀어져 가는 분위기였다. 군 출신으로 국방장관을 지낸 띤우는 군과 관계야 그렇다 쳐도 아웅산수찌가 부리기에 맘 편한 상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록 충성심이야 익히 알려져 왔지만 허수아비로 내세우기엔 너무 큰 이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띤묘윈은 충성심에서야 둘째가라면 서러울 테지만 8888 민주항쟁에 참여한 뒤 3년 동안 정치범으로 복역했던 이력을 군부가 마땅찮아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은 건 슈웨만이었다. 군사독재 서열 3위 장군 출신으로 군부정당인 집권 연방단결개발당(USDP) 대표였던 슈웨만은 지난해 8월 테인세인 대통령과 벌인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인물이다. 개헌 가능성을 입에 올리면서부터 군부한테 미움을 사고 쫓겨난 슈웨만을 아웅산수찌는 ‘개혁주의자’라 추겨 세우며 아주 가까이해 왔다. 그러나 군 최고사령관 민아웅흘라잉(Min Aung Hlaing)이 아웅산수찌와 밀담에서 “배신자를 인정할 수 없다”고 우기면서 슈웨만도 물 건너갔다. 그동안 시민사회도 후보 이름에 오르내리는 슈웨만을 강하게 거부해 왔다.

달리 아웅산수찌는 지난 네 달 동안 스스로 대통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헌법 제59조 수정을 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매달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아웅산수찌는 여전히 군부를 쥐고 흔드는 독재자 탄슈웨(Than Shwe)나 민아웅흘라잉을 비롯한 군 지도부와 줄기차게 밀담을 나눠 왔다. 그러자 한동안 군부가 헌법 제59조 개헌을 받아들였고 아웅산수찌가 대통령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흘러 다녔다. 아웅산수찌가 군부 지정 의석 25%를 후무린 헌법 제141조와 109조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에 합의했다는 구체적인 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제59조 개헌 없이 군부가 아웅산수찌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초헌법적 소문도 나돌았다.

버마 정치엔 독심술사가 필요할 뿐

그러나 결국 군부의 개헌 거부로 아웅산수찌는 띤쪼라는 대리대통령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띤쪼는 처음부터 아웅산수찌가 찍었던 인물이라기보다 모든 선택 가능성이 사라지자 군부 입맛까지 생각하며 막판에 꺼내든 카드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게 58년 만에 첫 민주선거를 통해 시민 대통령을 뽑았다는 의미로 포장된 버마 정치의 현실이다. 거기엔 오직 아웅산수찌만 있을 뿐 시민은 없었다. 시민은 그 허수아비 대통령을 뽑는 과정에서도 그저 밀실정치와 불통의 위력만 맛본 셈이다. 오죽했으면 민족민주동맹 중앙위원이자 인민의회 의원이기도 한 아무개가 “모든 건 레이디(아웅산수찌) 혼자만 알고 있다. 그이가 대통령 후보를 놓고 누구와 상의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을까. 이게 혼자 결정하고 혼자 선언해온 아웅산수찌 식 정치였다. 이게 ‘민주주의 어머니’ ‘민주 화신’ ‘민주주의의 꽃’ ‘민주 아이콘’ 같은 온갖 이름으로 포장된 아웅산수찌의 모습이다.

“버마 정치는 분석이 필요 없다. 아웅산수찌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독심술사가 필요할 뿐.”

오래전부터 외신기자들 사이에 나돌았던 말마따나 앞으로 아웅산수찌가 끌어갈 버마 정치판이 시민들을 또 얼마나 골탕 먹일지.

장군의 딸들, 불통의 대가들인 아시아판 장군의 딸을 다음주면 버마에서 또 보게 된다. 메가와띠 수까르노뿌뜨리와 박근혜를 잇는 아웅산수찌의 버마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까닭이다.

※ 필자의 요청으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정문태 1990년부터 타이를 베이스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 전문기자. 26년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훈센 캄보디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2004년), <현장은 역사다>(2010년)가 있다. 격주로 국제뉴스의 이면을 한겨레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