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의 한 음식점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손님들. 커피숍이나 음식점의 바깥 테이블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가 없는데, 과연 이를 통해 얻는 게 무엇일까.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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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56) 절대금연 대한민국
오랜만에 서울을 들렀다. 지난해 단풍이 막 들 때쯤이었으니 일년도 더 지난 것 같다. 그사이 모든 게 서먹서먹해져버렸다. 인천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와 버스표를 사서 친구를 만나기로 한 김포공항까지 가는 동안에도 쩔쩔맸다. 마주치는 사람들 눈동자가 너무 강해 고개를 돌리기도 했고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어깨들을 피해 게걸음을 치기도 했다. 김포공항은 섬뜩했다. 이른 아침부터 잠도 덜 깬 여행객들을 향해 경고방송을 틀어댔다. 그 목소리는 결연하고도 엄숙했다. “담배를 피우지 마라. 벌금을…” 무슨 난리라도 난 줄 알았더니 고작 금연을 떠들어댈 줄이야. 아침부터 벌금 따위로 으름장을 놓을 게 아니라 잔잔하면서도 밝고 힘이 넘치는 음악들, 예컨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모차르트의 바순협주곡이나 하이든의 트럼펫협주곡 같은 것들로 아침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좋았을 텐데.
실내금연 좋다, 그래도 이건 아냐
그렇게 시월 마지막 날 내린 서울은 아주 추웠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었다. 먼저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삼십년 넘게 담배와 커피를 곁에 두고 살아왔다. 골초니 중독까지야 아니지만 그렇다고 끊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안달하지 않는 그저 편한 친구들처럼 여겨왔다. 사람들이 저마다 세상을 보는 연장을 지녔듯이 나는 커피와 담배로 한 사회를 보는 버릇이 있다. 1년 만에 되돌아온 서울이 아주 어색하고 불편했던 것도 그 탓이었던 셈이다. 내 눈에 비친 서울은 한마디로 유령 천지였다. 건물 모퉁이마다 수십명씩 떼로 몰려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이 그랬고 또 길바닥에 삼삼오오 둘러선 이들이 담배 연기를 날려대는 모습이 그랬다. 가는 곳마다 금연 스티커가 더럽게 붙어 있고 때 묻은 금연 펼침막이 휘날렸다. 이게 서울이 꿈꿔온 아름다운 도시였는지 알 순 없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표어니 경고판 같은 것들이 덕지덕지 나붙은 도시치고 민주적인 사회는 결코 없었다. 정부가 시민을 얕잡아 보는 사회란 말이다. 그러니 서울에서는 법도 그 적용이란 것도 제 맘대로였다. 담배를 피우는 이들은 커피숍 바깥 정원에 내다놓은 텅 빈 테이블에마저 앉을 수 없었다. 어떤 커피숍은 앉지 않고 서서 피우면 괜찮다고 했고, 어떤 커피숍은 정원 앞길에서 피우면 괜찮다고도 했다. 또 어떤 커피숍은 바깥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워도 커피만 마시지 않으면 괜찮다고도 했다. 한 커피숍에는 ‘건물 10미터 내 금연’이라는 경고판도 붙어 있었다. 건물을 보호하겠다는 건지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건지, 아무튼. 비싼 커피를 종이컵에 받아들고는 아무도 없는 커피숍 바깥 테이블에도 앉지 못한 채 길바닥에 서서 담배를 피워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린 이게 대체 무슨 법인가? 간접흡연 피해를 없애겠다는 모양인데 그 결과 흡연자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길 가는 이들이 모조리 뒤집어쓰는 꼴인데도.
요즘 세상 어디를 가나 공공장소와 실내는 금연이 대세다. 다만 유럽에서는 커피숍이든 술집이든 식당이든 흡연과 금연으로 나눠놓았다. 예컨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은 흡연자 커피숍으로 그렇지 않으면 금연자 커피숍으로 가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고 담배 따위로 서로 인상을 쓰고 말고 할 일도 없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커피숍이든 술집이든 식당이든 실내를 흡연석과 금연석으로 나눠둔 곳이 많다. 제한적인 실내 흡연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타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실내 흡연을 금한다.
금연경고방송으로 맞이해준 공항어딜 가나 금연, 금연, 금연
바깥 테이블까지 못 피우게 난리
최소한의 선택지 줘야 하지 않나 사적 영역 인정 못 받는 불편함
담배든 교과서든 모조리 국정화로
때려잡겠다는 전체주의의 유산
2015년 서울은 광기로 다가왔다 나는 실내 금연이 아주 옳다고 본다. 그런 법이 내 인생을 가로막는다고 여겨본 적도 없다. 그렇더라도 대한민국처럼 커피숍 바깥 테이블까지 담배를 못 피우게 난리치는 건 수상하다. 이 지구에서 내가 다녀본 곳 가운데 그런 나라는 없었다. 온갖 희한한 법으로 시민을 옭아매며 악명을 떨쳐온 싱가포르 같은 나라에서도 흡연자들이 선택할 공간의 자유는 있다. 적어도 커피숍 바깥 테이블만큼은 그렇다. 유럽이나 일본이나 싱가포르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보다 시민 건강을 덜 걱정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건 그쪽 정부가 시민의 건강 못지않게 사적 영역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바깥 테이블 금연을 통해 현실적으로 얻은 게 뭔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어디서든 결국은 담배를 피울 것이고 그 간접흡연 피해란 게 누군가한테는 돌아간다. 바깥 테이블에 앉아서 피우든, 서서 피우든, 아니면 바로 그 커피숍 앞길에서 피우든 익명의 비흡연자들한테 돌아갈 그 피해는 다를 바 없다. 커피숍 바깥 테이블 금연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바깥 테이블 금연을 놓고 11월 초 서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한 외신기자 친구들 사이에도 말이 많았다. 본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인도네시아 언론 <뗌뽀> 사장인 밤방 하리무르띠 같은 이들마저 “선택권 없는 자유는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다”며 “극단적 법치가 독재자 수하르또나 박정희 시대로 끝난 줄 알았다”고 비웃었다. 오래전 담배를 끊은 출판인 김수진은 “간접흡연 피해에도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이 있다”며 “흡연자들한테 바깥 테이블 같은 해방구를 주는 게 그나마 비의지적 간접흡연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안팎 없이 흡연 공간을 틀어막고 담뱃값을 올린 대한민국 정부의 금연정책이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 대실패가 수치로 드러났다. 정부는 올해 초 담뱃값을 올리면서 흡연율 34% 감소를 떠들어댔다. 으레 아무도 그 말을 안 믿었다. 보라. 잠깐 주춤했던 담배 판매량이 지난 7월 예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정부는 9월 현재 이미 지난해 담뱃세로 거둬들인 6조6000억원과 맞먹는 돈을 챙겼다. 연말이면 1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정부가 올 한해 동안 3조4000억원을 더 챙기면서 세수 결손의 상당 부분을 담배팔이로 메웠다. 내년에는 12조원을 바라본다. 담뱃값을 올려 흡연자를 줄이겠다는 발상이 실패했다는 건 이미 온 세상천지가 다 아는 이야기다. 상품 가격을 높여 소비자를 뿌리치겠다고? 이런 건 대한민국 정부가 신줏단지처럼 떠받들어온 자유시장경제 원리에도 자본주의 논리에도 맞지 않는, 그야말로 희괴한 창조경제 이론일 뿐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진짜 시민 건강을 걱정해서 세수 10조원을 포기할 용기가 있다면 ‘상품(담배)이 없으면 소비(흡연)도 없다’는 아주 간단한 논리를 따르면 된다. 히말라야 쪽 작은 나라 부탄을 따라하면 된다. 지구에서 전시작전권이 없는 딱 두 나라끼리 서로 사이좋게 담배정책도 공유할 만하다. 부탄 정부처럼 담배의 제조, 유통, 판매, 소지를 모조리 불법으로 선포하면 끝이다. 나는 시민으로서 마땅히 그 법을 따르고 존중할 것이다. 담배 따위로 폭동 일어날 일도 없으니 대한민국 정부가 겁낼 까닭도 없다. 이미 부탄이 증명했으니. ‘담배팔이’는 정부 직무유기 달리 대한민국 정부가 담배를 합법으로 박아놓고 이문을 챙기는 한 어떤 금연정책도 위선이고 거짓일 뿐이다. 정부가 담배팔이로 세수를 얻으면서 금연 홍보비로 300억원 가까운 혈세를 뿌려댄다는 건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예산집행의 공정성을 다룬 국가재정법을 포괄적으로 위반한 행위다. 흡연을 질병이라고까지 선언한 정부가 그 질병을 내버려둔다는 건 직무유기에다 헌법이 규정한 시민 보호 의무를 저버린 위헌적 행위다. 금연운동단체들이 흡연자를 상대할 게 아니라 정부를 고발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꿀 때가 되었다. 그게 담배를 원천적으로 뿌리 뽑는 지름길일 테니. 이쯤 되면 커피숍 바깥 테이블 금연의 정체도 드러났다. 시민 건강을 볼모로 이문을 챙겨온 정부가 어떡하든 눈에 띄는 흡연자만이라도 줄여보겠다는 위선적인 전시행정이었다. 그 결과 담배를 피우는 대한민국 시민 절반이 이 춥고 바쁜 계절에 죄인처럼 길바닥으로 내몰렸고, 길 가는 나머지 절반 시민은 영문도 모른 채 간접흡연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내 몸이 기억하는 이 어색하고 답답한 서울의 풍경은 독재자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의 것이었다. 시민의 사적 영역과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이 불편함, 담배든 교과서든 뭐든 모조리 국정화로 때려잡겠다는 이 거북한 기운은 전체주의공화국의 유산이었다. 시민사회를 향해가는 온 세상과 거꾸로 달리는 대한민국, 2015년 서울은 그래서 내게 광기로 다가왔다. ※ 필자의 요청에 따라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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