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현지시각) 인도네시아 깔리만딴주 빨랑까라야 부근에서 한 주민이 석탄의 한 종류인 이탄에 붙은 불을 끄고 있다. 화전에서 시작된 불이 번져 약 2개월 동안 산불이 계속됐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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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55) 인도네시아발 연기
사람들이 아우성친다. 학부모들은 애가 탄다. 정치판은 말질만 해댄다. 민족주의를 내세운 온갖 애국자들이 날뛴다. 세상은 온통 흐릿하다. 기어이 시위대가 거리로 나섰다. 앞날은 보이지 않고 눈물만 질질 난다.
그래서 나는 지난 3월말 결국 산더미처럼 밀린 원고를 끌어안고 인도네시아 반둥으로 도망쳤다. 말을 해놓고 보니 국정교과서를 놓고 난리치는 서울과 빼닮은 꼴인데, 사실은 올 한해 내내 동남아시아를 덮친 연기 이야기다. 내가 살고 있는 타이 북부 치앙마이 쪽은 지난 3월 중순 대기오염지표가 300~350㎍/㎥를 넘었다. 타이 정부의 오염표준치에 따르면 120이 해로운 한계치다. 300은 위험경보에다 비상사태가 떨어지는 수준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뜻이다. 한국은 그게 50을 넘으면 떠들썩해지지 않던가. 쉽게 말해 치앙마이의 300이란 건 시내 한복판에서 한 200~300m 앞이 제대로 안 보이고, 비행기도 끊기고, 눈물도 나고 목도 따갑고 그리하여 학교가 문을 닫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쯤 되면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총리란 자가 한번쯤은 나타나 결연한 표정을 짓고 돌아간다. 뭐, 비상사태를 선포한들 싸구려 마스크나 좀 돌리고 사람들한테 형편 되면 밖으로 나돌아다니지 말라는 말밖에 달리 한 일도 없지만.
국가간 연기오염 협정도 소용없어
으레 그 연기란 놈은 화전에서 기어나온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타이, 라오스, 버마, 캄보디아 쪽에서는 해마다 건기인 12월에서 4월 사이에 벌어지는 연례행사다. 근데 그 연기가 점점 더 탁해지고 넓게 퍼져 나가고 있다. 내가 처음 이 동네에 발을 디뎠던 한 25년 전쯤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화전이란 건 카렌 같은 소수민족을 비롯해 산간지역 농민들이 텃밭을 부쳐 먹는 게 다였다. 내가 먹을 만큼만 땅을 만지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그 전통 화전이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다. 타고 난 재가 칼슘을 보태 땅을 기름지게 하고 병충해를 막는 그 화전은 산림 파괴와 상관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생태학적으로 환경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던 게 한 10여년 전쯤부터 짐승 먹이를 만드는 옥수수 플랜테이션 같은 대규모 농산자본이 파고들면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 연기가 요즘은 인도네시아에서 골칫거리다. 지난 6월부터 인도네시아의 수마뜨라와 깔리만딴 섬에서 퍼져 나온 연기가 이웃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뿐 아니라 타이 남부까지 뒤덮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난 9월4일 수마뜨라의 리아우주를 비롯한 6개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깔리만딴 중부지역은 오염지표가 1950을 넘었다. 현재 2800만 시민이 치명적인 위험에 빠져 있고 이미 15만명 이상이 치료를 받았다. 9월 중순 무렵엔 화재 지역만도 2740군데에 이르렀다. 벌써 10억톤 웃도는 연기를 뿜어 1997년 인도네시아 대화재 기록을 쫓아가고 있다. 지난 두어달 동안 뿜은 연기가 세계 7위권 온실가스 배출국인 독일과 맞먹을 정도다.
수마뜨라 등에서 퍼져나와타이 남부까지 뒤덮은 연기
6개 지역에 비상사태 선포
2800만 시민이 치명적 위험 화전 플랜테이션을 파고든
대규모 농산자본들이 주범
413개 기업이 직간접 연루
법 있어도 처벌은 힘들어 인도네시아 쪽도 타이와 다를 바가 없다. 연기의 주범은 팜오일, 고무, 펄프용 플랜테이션으로 파고든 대규모 농산자본들이다. 인도네시아 환경산림부는 올해 화재의 90%를 사람들이 저질렀고 나머지는 토탄지대의 자연발화라고 밝혔다. 수마뜨라와 깔리만딴에서는 산림 벌채 허가를 받은 227개 회사와 플랜테이션 186개를 포함해 모두 413개 기업이 직간접으로 화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제임학조사원 연구원 헤리 뿌르노모는 “화전이 기계 이용보다 10배나 싸다”며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투자회사들이 2014년 한 해 동안 벌어들인 돈만도 18억4천만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나 타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모든 나라들은 그 불법 연기를 제압할 만한 법들이 있다. 근데 아직껏 어떤 정부도 그 연기를 뿜어내는 자본을 손본 적이 없다. 기껏 동네 화전민 몇몇을 잡아 가두는 게 다였다. 그러다 온 세상이 떠들어대자 지난 9월말 인도네시아 정부는 4개 플랜테이션을 고발한 뒤 싱가포르 회사를 포함해 27개 기업과 개인 140명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제지회사 가운데 하나인 아시아펄프페이퍼도 수사선상에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 군, 공무원, 정치인들의 조직적인 부정부패가 들끓는 인도네시아에서 자본의 불법 화전이 끝날 것으로 믿는 이는 흔치 않다. 연기에는 국경 따위가 없다. 국제문제라는 뜻이다. 해서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10개 나라는 2002년 국가간 연기오염 협정(ATHP)이란 걸 맺었다. 으레 아세안의 전통적 고질병인 이른바 상호 불간섭 정책에다 각국의 이기심에 걸려 12년이나 묵혔다가 지난해에야 겨우 모든 나라가 비준했지만, 아무튼. 근데 이번 인도네시아 연기를 보면 그런 게 다 쓸모가 없다. 국가이기주의만 날뛴다. 9월25일 싱가포르가 오염수치 341에 이르자 정부는 학교 문을 닫았고 외무장관 샨무감이 나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우리 국민뿐 아니라 자기들 국민도 철저하게 무시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인도네시아 부통령 유숩 깔라는 “말만 하지 말고 나서서 도와라”며 싱가포르 정부를 되박았다. 그이는 지난 3월 “1년에 열한달 동안 인도네시아 산림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 덕을 보면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더니 기껏 한달 동안 연기로 불만들이다”라며 이웃 나라들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따지고 보면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를 향해 삿대질만 할 처지도 아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 화전 플랜테이션에 투자해온데다 주요 시장 노릇까지 하면서 배를 불려왔다. 게다가 싱가포르는 그 화전 기업들이 돈줄을 돌리고 또 감추기도 하는 특별금고 노릇까지 해왔다. 이번 인도네시아발 연기는 국제문제를 다루는 동남아시아 정부들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만 폭로한 꼴이 되고 말았다. 10월23일 대통령 조꼬 위도도는 “더 이상 토탄지대에 사업허가를 내주지 않을 것이며 피해지역 주민들을 소개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불길을 잡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3년이 걸릴 것”이라고도 했다. 정부 쪽에서는 불길을 잡는 데 337억달러가 들 것이라는 말도 흘러나오고 있다. 34조원이 든다는 말이다. 애초 혼자 해결할 수 있다며 버티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결국 10월22일 러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항공소방대의 수마뜨라 작전을 받아들인 데 이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중국, 일본한테도 도움을 받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화재 진압에 앞장서온 정치법률안보조정장관 루후뜨 빤자이딴은 “지하 5~10m에 깔린 토탄지대는 공중에서 물을 뿌려 끌 수 없다”며 시큰둥했다. 비라도 와야 할 텐데 엘니뇨 현상 탓에 올해 말까지 비 소식도 없다. 이빨도 안 맞고 하는 일마다 늦잡친 꼴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 세상은 한 고리로 엮여 있다. 인도네시아 연기를 대한민국 정부가 눈여겨봐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 많은 나라들이 인도네시아의 불길을 잡는 데 일손을 보태겠다며 달려들고 있다. 저마다 상호협력과 인도주의를 앞세웠다. 대한민국 정부한테는 그런 것 말고도 또 있다.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에서 대한민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딱 하나뿐인 나라다. 거창한 이름만 걸어놓고 실질적인 관계로 발전시키지 못해 그동안 말들이 많지 않았던가. 상대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조건 없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야 한다.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이면서 아세안과 비동맹을 이끌어온 인도네시아는 대한민국의 10번째 큰 무역상대국이자 8번째 큰 투자국이기도 하다. 그 앞바다에는 80%를 웃도는 대한민국의 원유수송로도 걸려 있다. 대한민국한테 인도네시아는 외교, 경제, 안보 모든 면에서 사활이 걸린 아시아 최대 전략지대다. 대한민국 정부한테는 시간이 별로 없다. 때를 놓치면 또 ‘허당외교’가 되고 만다. 정부가 역사책을 쓰겠다고 우기면서 국제사회로부터 비웃음거리나 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세상 돌아가는 판을 읽을 때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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