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시가지를 둘러보는 외신기자들. 현장에 가지 않은 기자들은 표절의 유혹을 받기 쉽다. 정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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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46) 표절
‘한국 소설가 표절 비난에 사과하다’(<뉴욕 타임스>), ‘한국 작가 신경숙 표절 논란 뒤 사과하다’(<비비시>), ‘한국 수상 작가 표절로 책 회수’(<월스트리트 저널>), ‘한국 소설가, 일본 작가 표절 인정하다’(<에이비시 뉴스>), ‘한국 소설가 신경숙,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 표절 인정하다’(<저팬 타임스>), ‘한국 스타 작가 표절 스캔들로 사과, 출판사 인쇄 중단’(<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한국 스타 작가 표절 스캔들 사과’(<방콕 포스트>), ‘한국 소설가 일본 작가 표절 인정하다’(<자카르타 포스트>)….
지난 6월23일 하루 동안 국제 언론이 뽑아든 기사 제목들이다. 이쯤 되면 서울발 ‘빅뉴스’로 꼽을 만하다. <에이피>, <아에프페>, <로이터>를 비롯한 모든 뉴스에이전시들이 주요 기사로 뿌려댔으니 온 세상 구석구석 다 퍼졌을 만도 하다. 근데 그 제목들을 눈여겨볼 만하다. 하나같이 ‘한국’을 걸고 나왔다. ‘맨아시아문학상(Man Asian Literary Prize) 수상 작가 표절 법석 뒤 사과하다’. 이렇게 영국 신문 <가디언>처럼 ‘한국’이란 단어 없이 제목을 뽑은 기사는 달리 없었다. 내가 훑어본 40개 넘는 국제 언론 가운데는 그렇다는 말이다. 표절 혐의를 받은 건 작가라는 한 개인인데 모조리 ‘한국’을 걸고넘어진 꼴이다.
‘다빈치 코드’와 ‘해리포터’ 표절소송
내 기억엔 소설 표절을 놓고 외신이 이렇게 떠들어댄 건 <다빈치 코드>와 <해리 포터> 뒤 처음이 아닌가 싶다. 44개 언어로 찍어 6천만권 넘게 판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4억권을 팔아치운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는 2000년대 중반부터 표절로 소송을 당하면서 난리를 피웠지만 외신들이 작가의 고향인 미국과 영국을 걸고 나온 적은 없었다. 표절을 작가 개인 문제로 다뤘다는 뜻이다. 비록 신경숙이 국제사회에 잘 알려진 바 없다손 치더라도 지나치게 초점을 ‘한국’에다 맞춘 이번 기사들과 좋은 비교거리가 될 만하다. 독자들이 이런 제목과 마주치면 소설가 하나보다는 한국이 표절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다. 이게 외신판이나 국제 언론들이 지닌 교묘한 인종주의 습성이다. 예컨대 2007년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때 봤듯이 국제 주류언론들이 모조리 범인을 ‘한국계 아무개’로 보도했던 적이 있다. 그는 7살 때 이민 가서 미국에서 자랐고 한국과 아무 상관이 없는 미국 시민일 뿐이었다. 미국 언론이 사건을 다루면서 범인을 ‘영국계’라든지 ‘독일계’ 같은 식으론 결코 쓰지 않는다. 어쨌든 이런 게 외신판 돌아가는 꼴이고 그 외신에 오르내리는 씁쓸한 대한민국 꼴이기도 하다.
내친김에 표절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남의 시가, 문장 등을 훔치거나 제가 지은 것처럼 발표함’이라고 적고 있다. 그 한자를 뜯어보면 표(剽)란 놈은 사납다는 뜻과 함께 협박이나 겁탈을 일컫는데 오른쪽엔 칼까지 쥐고 있다. 절(竊)이란 놈은 한마디로 도둑질이다. 표절이란 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도둑질이란 뜻이다. 그래서 남들은 그 표절을 문학이나 예술 같은 창작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학술 분야에서도 지독하게들 물고 늘어져왔다. 오죽했으면 내뱉는 말까지도 표절로 다뤄왔을까.
독일에서는 2011년 국방장관 카를테오도어 추 구텐베르크에 이어 2013년 교육장관 아네테 샤반이 학위 논문 표절로 쫓겨났다. 가까이는 올 1월 존스홉킨스대학 신경외과 전문의이자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을 성공해 ‘신의 손’으로 불리며 차기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오르내리던 벤 카슨이 저서 <아름다운 미국>이 표절 혐의에 엮이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1987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조 바이든이 연설에서 영국 정치인 닐 키넉의 말을 표절하면서 결국 물러났던 걸 보면 벤 카슨의 꿈도 물 건너간 셈이다. 2014년 미국 상원의원 존 월시도 석사 논문 표절로 끝장났다. 정치인뿐 아니라 성직자도 예외 없었다. 2013년 프랑스 유대교 조직을 이끌던 최고성직자 질 베르네임이 저서 <유대인의 명상 40개>를 쓰면서 몇몇 책들을 표절한 게 드러나 밀려났다.
질 낮은 아시아(아프리카) 언론?그렇게 타박하면서도 그것들을
적당히 예술적 언어로 바꿔치기해
보도해온 게 바로 국제주류언론 하나같이 ‘한국’을 걸고넘어진
외신들의 신경숙 사건 보도제목
미·영 작가엔 국가 딱지 안 붙여
국제언론들의 교묘한 인종주의 이런 것들이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장관 후보자 가운데 논문 표절 혐의 한 번 안 받았던 이들이 오히려 흔치 않았지만 ‘관행’이니 ‘실수’라는 말로 웬만하면 넘어갈 수 있었던 걸 보면. 표절 감시 기능을 지녀온 언론은 어떨까? 지난해 11월 프랑스 언론인 아그네스 쇼보는 <허핑턴 포스트>에 칼럼을 쓰면서 <르몽드>를 비롯한 몇 몇 기사를 표절한 끝에 언론학교로도 유명한 정치과학연구소(Sciences Po) 이사 자리에서 밀려났다. 앞선 5월에는 <시엔엔>이 국제면 뉴스 에디터 마리루이즈 구무치언을 <로이터> 표절 혐의로 해고했다. 그 무렵 <시엔엔>이 성명을 통해 ‘신뢰, 정직과 신용을 주는 건 언론의 교의 가운데 하나’라며 유감을 밝히자 방콕 외신판 친구들이 모두 웃었던 기억이 난다. 뉴스에이전시나 외신 지국들이 내남없이 현지 언론을 인용하거나 취재 내용을 따라가서 덧붙여 온 현실을 <시엔엔>이 모른 척하며 아주 엄숙하게 굴었던 탓이다. 국제 주류 언론들이 늘 ‘질 낮은 아시아(아프리카) 언론’이라 타박하면서도 그것들을 적당히 예술적 언어로 바꿔치기해서 보도해 온 게 바로 국제 뉴스였다. 현장을 취재하다 보면 “<시엔엔>이/<로이터>가/<뉴욕 타임스>가 내 취재 내용과 기사를 그대로 베껴 갔다”는 현지 기자들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아그네스나 마리루이즈는 그저 운이 나빠 걸린 희생양쯤이었던 셈이다. 표절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언론판에서는 특히 내가 일해온 외신 쪽에서는 몸 성히 살아남을 기자들이 흔치 않을 듯싶다. 고백하건대, 지난 25년 동안 외신판을 뛰어온 나도 수상하긴 마찬가지다. 남들 기사를 대놓고 베낀 적이야 없지만 현지 기자들이 앞서 나간 취재물을 따라가서 내 눈으로 깎고 덧붙이며 재가공하는 일을 수도 없이 해왔으니. 한마디로 현지 기자들 도움 없이는 어떤 취재도 하기 힘들었던 현실을 놓고 보면 그 사이 정보, 아이디어, 자료, 현장, 취재, 기사, 보도라는 전 과정에서 어떤 걸 어디까지 표절로 볼 것인가에 따라 혐의를 받을 만한 일도 적잖을 듯싶다. 국제전화라도 죽어라 돌려야 하는 이걸 우리 언론사들 국제부 쪽으로 돌려놓으면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그나마 감시 장치가 있는 국내 뉴스들이야 덜할지 몰라도 외신이나 현지 언론 기사를 짜깁기로 만들어내는 국제면은 그야말로 표절지대다. 출처 감춘 기사만 문제가 아니라 출처를 밝히더라도 허락받지 않은 채 문장을 끌어다 쓰는 건 모조리 저작권 침해고 표절에 해당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외신판에서 까다롭게 표절을 따지고 들면 예컨대 ‘6월20일 세계 난민의 날에 맞춰 유엔이 기념행사를 한다’는 <워싱턴 포스트>의 공적 정보를 담은 기사 한 문장을 <한겨레>가 그대로 옮겨도 낚이게 된다. 전화로라도 유엔에 확인했다면 표절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이쯤 되면 국제부 기자나 외신기자들은 내남없이 도둑놈 팔자를 벗어나기 힘들다. 일일이 현장 취재를 할 수 없는 형편인 국제부 기자들은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니 현실 속에서 표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제전화라도 죽어라고 돌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간접적이나마 현장을 확인하고 필요한 인터뷰를 따야 겨우 도둑놈 신세는 면할 수 있다. 사실은 바깥에서 뛰는 외신기자들도 그렇게들 하고 있다. 외신기자라고 다 현장을 확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니까. 그게 소설가든 학자든 기자든 남의 글을 훔치는 데는 저마다 속사정들이야 다 있었겠지만 세상은 그 도둑질을 결코 용서한 적이 없다. 물론 사과를 받아들일 만큼 너그럽지도 않다. 결국 글을 만지며 밥을 먹는 이들은 가혹한 자기 매질로 유혹을 뿌리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걸 명예라 불러도 좋고 자존심이라 여겨도 좋다. 한참 늦었지만 언론도 이제 도둑질에서 손을 끊을 때가 됐다. 세상의 ‘신경숙들’과 결투를 하겠다면 내 속에 감춰온 ‘신경숙’을 먼저 걷어내는 게 정정당당하지 않을까 싶다. 대결은 같은 체급 같은 조건 아래 이뤄져야 옳을 테니.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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