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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12 18:43 수정 : 2015.06.15 14:09

로버트 워크 미국 국방부 부장관(가운데)이 지난 3일 탄저균 배달사고를 수습하는 담당 간부들과 함께 나와 이 사고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미국 국방부 누리집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45) 미국의 탄저균 배송

2016년 5월27일,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한국 국방부,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탄저균 배송 실수 인정’(<워싱턴 포스트>), ‘오바마 대통령 분노, 미국 시민 위협한 용서할 수 없는 일’(<에이비시 뉴스>),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 워싱턴 사과 방문 추진’(<로이터>), ‘한국 국방부 유타주에 위장회사 설립해 세균 실험’(<시엔엔>), ‘미 육군 에지우드화학생물학센터 전 연구원-탄저균 미군 용산기지 65의무연대 실험 거쳐 한국 국방부 통해 미국으로 반입 의혹’(<유에스에이 투데이>)….

질 낮은 소설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왜? 대한민국 국방부가 미국 정부 눈 밖에 날 짓을 할 만큼 간이 크지 않으니까 현실성이 없는 탓이다.

꼭 1년 전인 2015년 5월27일, 미국이 난리다.

‘국방부, 유타주 더그웨이 육군 실험실 부주의로 활동성 탄저균 메릴랜드 비롯한 9개 주 실험실과 주한 미군 기지에 배송’(<워싱턴 포스트> 5월27일치), ‘국방부 대변인 스티브 워런, 한국 오산공군기지 내 주한미군연합 포털통합위협인식(JUPITR) 프로그램에 탄저균 배송. 노출 가능성 지닌 요원들 예방 조처’(<에이비시 뉴스> 5월27일치), “미 육군 참모총장 레이먼드 오디에어노-더그웨이 요원들은 탄저균 배송 전 절차에 따라 비활성으로 만들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람 실수가 아니었다는 것”(<로이터> 5월28일치), “국방부, 페덱스(FedEx) 비롯한 민간업체 통해 탄저균 배송. 공공 위협 없다”(<시엔엔> 6월3일치), “국방부 부장관 로버트 워크-17개 주 51개 실험실과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에도 탄저균 배송. 숫자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유에스에이 투데이> 6월4일치), ‘국방부 대변인, 오산기지 빼고는 해외 미군 기지 어디에도 탄저균 샘플 받은 적 없다’(<성조> 6월4일치)….

박 대통령은 워싱턴에 가야 옳다
단 조건이 있다, 미국 정부한테
왜 탄저균 배송했냐 따져야 한다
그리고 절대로 웃으면 안된다

남북전쟁 천연두로 태어난 미국
1920년대부터 생물무기 개발하고
1930년대 731부대 자료 넘겨받고
1950년대에 한반도에 세균 퍼뜨려

731부대가 고마운 사람들

이건 소설이 아니다. 왜? 미국 국방부는 세상 눈치를 볼 까닭이 없으니까 현실이다.

여기까지 드러난 언론 보도를 놓고 의문을 달아보자. 미국 국방부는 왜 탄저균을 나라 안팎 그 많은 군 관련 연구소들과 주고받았을까? 유타주 군 실험실이 어떤 실수로 살아 있는 탄저균 발송을 장기간 되풀이할 수 있었을까? 현재 63개국에 865개 군사기지와 156개국에 25만명에 이르는 군대를 파견한 미군이 왜 오직 오산기지에만 탄저균을 보냈을까? 미국 육군 참모총장 말처럼 사람 실수가 아니라면 뭘까?

근데 그 답은 오래전부터 나와 있었다. 계획적이었다. 미국은 생물무기금지협약(BWC) 가맹국 182개(비준 173개국) 가운데 하나로 이미 1975년에 비준한 나라다. 그 협약 제1조는 ‘(1)원천과 생산 방식에 상관없이 형태나 양이 질병 예방과 보호 또는 평화적 목적에 합당하지 않은 미생물, 세균, 독소 (2)적대 목적이나 무력충돌에 세균이나 독소를 사용하고자 만든 무기, 설비 또는 수송수단을 가맹국이 어떤 경우에도 개발, 생산, 비축, 획득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인 1970년 생물무기 국내 개발과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그럼에도 미국 국방부는 ‘상대국의 생물무기 포기 압박’과 ‘선제공격 시 보복’이라는 방어 개념으로 포장한 생물무기 유지정책을 포기한 적이 없다. 미국 국방부가 1990년대 말부터 들고나온 바이오디펜스(Biodefense)라는 개념도 민간인보다는 군인들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춰 결국 생물무기 실험과 개발용 핑계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2000년대 들어 떠들어대는 바이오테러리즘(bioterrorism)이란 말도 마찬가지 구실거리다. 본디 생물무기 실험이란 게 방어용과 공격용으로 구분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 까닭이다. 그렇게 미국 국방부는 국제법이고 국내법이고 모조리 짓밟은 채 공공연히 생물무기를 실험, 개발, 확보, 운반해 왔다. 이게 이번 탄저균 배송 사건의 본질이다.

미국이란 나라는 남북전쟁 때부터 천연두를 무기 삼아 서로 치고받았으니 애초 생물무기에서 태어난 셈이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아주까리에서 뽑은 독을 포탄에 실어 나른 뒤 1920년 화학전국(CWS)을 만들어 생물무기 개발에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인 1943년에는 육군 생물학전실험실을 메릴랜드의 포트디트릭에 설치해서 생물무기 개발 심장부로 삼았다. 종전 뒤 미국 정부는 1930년대부터 일본군 731부대가 만주에서 3천~2만여명에 이르는 생체실험을 통해 얻은 세균전 자료를 넘겨받아 본격적인 생물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 대가로 731부대 핵심들은 모두 전범 신세를 면했다. 사령관이었던 이시이 시로는 훗날 메릴랜드로 가서 세균무기 자문 노릇을 했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 3차례나 비밀스레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부사령관이었던 기타노 마사지는 녹십자로 흔히 알려진 미도리주지 설립자로, 또 다른 생체실험 부대인 100 책임자였던 와카마쓰 유지로는 니혼이야쿠 공장장으로 모두 일본 제약판을 주름잡았다.

이어 한국전쟁에서 그 말썽 많은 미국의 세균전이 등장한다. 1952년 중국, 북한, 러시아 정부는 미군이 콜레라, 흑사병, 천연두 같은 세균을 북한과 중국 접경지역에 퍼뜨린 사실을 고발했다. 중국이 요청한 저명한 영국 과학사학자인 조지프 니덤이 이끄는 국제과학위원회(ISC)가 조사한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보고서를 통해 세균전 실상이 드러났다. 미국 쪽 조사자인 유엔과 적십자사는 증거 불충분이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의 거짓 선전이라 몰아붙이며 조지프 니덤을 빨갱이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그게 오늘날까지 미국 정부를 지지해온 한국전쟁 연구자들이 논쟁거리라고 부르는 단골 주제다.

‘유감 성명서’ 발표도 못하는 청와대

미국 국방부는 한국전쟁 세균전 논란 속에서도 생물무기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1950~1960년대 샌프란시스코만과 뉴욕 지하철 그리고 워싱턴 공항에서 대도시 인구 대상 탄저균 가상 바실루스(간균) 실험을 했고 1954~1973년 사이에는 오퍼레이션 화이트코트(Operation Whitecoat)란 이름 아래 야토병을 실험했다. 1962~1973년 사이에는 중앙정보국까지 끼어든 ‘프로젝트 112’라는 대규모 세균전을 준비했다. 그 프로젝트는 태평양, 알래스카, 오키나와,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최소 50개 실험지역에서 탄저균을 비롯한 18개 생물무기를 실험했다. 그 일환이었던 프로젝트 샤드(SHAD)는 함정 13대를 동원해 6천여명에 이르는 해군을 세균전 실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은 ‘소리 없는 전쟁’ ‘가난한 자의 핵폭탄’이라 불러온 세균전을 위해 내 땅 남의 땅 가리지 않았고 내 국민이든 남의 국민이든 내키는 대로 실험용으로 삼아왔다. 물론 모두 비밀작전이었다.

그리고 80% 웃도는 치사율을 지녔다는 바로 그 살아 있는 탄저균을 미군이 대한민국 땅에 몰래 들여왔다. 본디부터 불평등 협정이긴 하지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이 그나마 규정한 통관·관세나 탁송화물에 대한 정보제공 의무마저 위반했을 뿐 아니라 2013년 체결한 ‘한-미 공동 생물무기감시포털(BSP) 구축협약’ 따위도 무시한 채.

그런데도 청와대나 국방부는 그 미군한테 찍소리 한 번 못했고 그 흔해빠진 외교용 유감 성명서 하나 못 날렸다. 시민 생명 보호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교도 모르는 이런 희한한 걸 정부라 불러야 할까? 과연, 우리는 독립국가에서 살고 있기나 한 걸까?

그래서 가야 한다. 대통령 박근혜는 워싱턴으로 가야 옳다. 단, 조건이 있다. 미국 정부한테 “왜 그랬냐고?” 낱낱이 따지고 대들어야 한다. 그리고 웃으면 안 된다. 이건 웃는 낯으로 다룰 사안이 아니다. 박근혜가 좋아한다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미국 정보국이 자신의 전화를 도청했다는 사실을 오바마한테 거세게 따지면서 웃지 않았다. 시민은 웃을 때와 아닐 때를 못 가리는 대통령을 바라지 않는다. 단 한 번만이라도 대한민국 시민으로 자존심 세워주기를 바랄 뿐. 그게 대통령한테 주어진 의무인 시민 생명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 기사 속에 등장하는 ‘녹십자’는 국내 제약전문업체인 (주)녹십자와는 다른 회사임을 알려드립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정문태 1990년부터 타이를 베이스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 전문기자. 23년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훈센 캄보디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2004년), <현장은 역사다>(2010년)가 있다. 격주로 국제뉴스의 이면을 한겨레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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