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4년 5월9일 2차 세계대전 승전 69돌 기념일을 맞아 크림반도 세바스토폴항을 방문해 연설하고 있다. 올해는 70주년을 맞아 남북한은 물론 세계 각국의 정상들을 초청한 상태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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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40) 초청장 외교
“초청장처럼 골치 아픈 게 없어. 정상급 외교에서는 받는 입장이 되면 더 그래. 가고 안 가고에 따라 정부 관계가 싸늘해질 수도 있고. 달리 다자외교로 넘어가면 그 초청장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한 나라 지위가 결판나는 꼴이니 다루기에 따라 아주 위험한 물건이지.”
꼭 10년 전이다.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 압둘라만 와히드(압두라만 와힛)가 아펙(APEC) 정상회담을 되돌아보는 자리에서 내게 했던 말이다. 초청장이란 게 성가신 물건인가 보다. 남이 나를 기억한다는 뜻을 그냥 덮어버리기도 그렇고 내키지 않는데 받아들이기도 영 마뜩잖고, 그러면서도 나만 쏙 빼놓으면 섭섭하고. 게다가 초청장은 주고받는 이들 사이에 서로 급수를 저울질하면서 이문을 따지는 영악한 속내를 지닌 물건이기도 하니. 동네 사람들끼리만 그런 가 했더니 국가대표 정치인들 사이에도 그런 모양이다.
러시아 관계 한단계 끌어올릴 기회
요즘 외신판을 달구는 화두가 초청장이다 보니 떠오른 생각들이다. 올해는 국제사회에서 초청장 외교가 한바탕 휘몰아칠 낌새다. 이 초청장 외교의 한복판에 한반도가 들어섰다. 이미 청와대도 주석궁도 피해갈 수 없는 판이 펼쳐졌다. 만약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김정은이 줏대가 있다면 이 초청장 외교에서 둘은 주인공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한반도 잔치판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첫 번째 초청장은 지난해 12월 이미 날아들었다. 러시아 정부가 올해 5월9일 대애국전쟁(Great Patriotic War) 승전 70주년 기념식에 남북 정상을 함께 초청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비에트러시아는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에게 최초로 패전을 안겨준 모스크바전투를 비롯해 300만 희생자를 내며 역사상 최대 격전을 치른 레닌그라드전투 같은 동부전선 승리로 전황을 뒤바꿔놓았다. 유럽의 해방은 그렇게 총인구 1억6천만명의 17%에 이르는 2800만 희생자를 내면서 독일을 무릎 꿇린 소비에트한테 큰 빚을 졌다. 그 전승기념일이 올해로 70년을 맞으면서 러시아 정부는 반히틀러동맹(Anti-Hitler Alliance)이었던 영국, 프랑스, 미국을 비롯해 브릭스(BRICS: 브라질, 중국, 인도, 남아공)에다 적국이었던 독일과 일본 정상들한테 초청장을 띄웠다.
근데 이 러시아 전승기념일 잔치가 제대로 굴러갈지는 아직 의문이다. 미국이 빗장을 걸고 나선 탓이다. 지난 2월9일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 벤 로즈란 자가 “대통령 오바마는 모스크바 방문 계획이 없다”고 밝히면서 “각국이 스스로 판단하겠지만 주권과 영토보존 원칙에 대해 세계가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동맹국들의 참석 반대 의사를 넌지시 던졌다. 물론 “우크라이나를 낀 불화가 공동 역사(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성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는 오바마의 말을 인용하면서 뒤끝은 남겨 놓았지만 아무튼. 우크라이나 사태를 끼고 냉전으로 되돌아간 핵무장 대국 미국과 러시아가 초청장을 놓고 우격다짐을 벌이는 셈인데 결국 우크라이나 사태 추이에 따라 70주년 전승기념식이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 탓에 2월 말 현재 미국과 유럽 동맹국 정상들은 참석 가부를 밝히지 않은 상태다. 다만 체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가 불참 결정을 한 가운데 중국, 베트남, 북한을 비롯한 20개 웃도는 나라가 참석 통보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와대는 미국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다. “대통령의 러시아 전승기념일 참석 여부는 아직까지 확정된 것이 없다. 다른 5월 일정과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말이 청와대 관계자 입에서 흘러나온 걸 보면.
그사이 외신들은 러시아의 초청장 외교를 다루면서 우크라이나 사태 못지않게 김정은의 첫 해외 나들이 가능성과 남북 정상의 만남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왔다. 박근혜-김정은이 함께 모스크바에 출현한다면 주인공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예고한 셈이다. 러시아 정부도 이번 초청장 외교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잠재울 만한 카드로 박근혜-김정은을 뽑아든 것으로 볼 만한 대목이다. 김정은이 결심한 것으로 알려지는 마당에 박근혜가 미국 눈치를 보며 머뭇거릴 까닭이 없다. 박근혜는 우크라이나와 상관없이 한반도 사안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면 된다. 그게 외교력이다. 더욱이 이번 초청은 2013년 11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까지 입에 올렸던 박근혜 입장에서 보자면 대러시아 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건 불참으로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너무 많은 초청장이다. 자주외교란 단어를 이럴 때 입에 올려야 정상이다. 남북이 만나는데 꼭 서울과 평양일 까닭도 없고 누구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은 더욱 없다. 절차가 복잡하고 어색한 게 많다면 오히려 멀리 떨어진 남의 땅이 편할 수도 있다.
4월 반둥회의 60주년 기념식5월 러시아 승전 70주년 기념식
9월 중국 항일전승 70주년 기념식
둘 다 초청장 받고 피하지 말길
국제사회 주인공으로 설 기회 “러시아 방문계획 없다”는 오바마
우크라이나 사태 끼고 어깃장
주요 동맹국들 가부 안 밝히고
중국·베트남 등 20개국 참석 통보
한국은 아직도 “종합적 검토중” 아시아·아프리카 109개국 응원 받을 기회 두 번째 초청장도 이미 날아와 있다. 러시아 쪽보다 보름쯤 앞선 4월22~24일로 날짜가 잡힌 반둥회의(아프리카·아시아회의) 60주년 기념식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09개 나라 정상들과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을 비롯한 25개 국제기구 대표를 초청하겠다고 밝혔다. 남북한 정상은 이미 초청장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언론을 비롯한 외신판에서는 김정은 참석 가능성을 높게 보고도 있다. 물론 여기도 미국이 까탈을 부리긴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 대사 로버트 블레이크는 “60주년 행사도 중요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제사회가 독재자(김정은) 초청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조심해야 한다”며 어깃장을 놨다. 청와대가 얼마나 눈치를 보는지 알 순 없지만 벌써부터 “대통령 일정이 겹쳐 힘들 것으로 보인다”는 말들이 새나오는 걸 보면 러시아 초청장과 달리 너무 일찍 찢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이 반둥회의는 1955년 인도, 중국,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아시아 29개국이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민족자결을 내건 제3세계 비동맹운동을 일으켜 미국과 소비에트러시아로 양분했던 국제사회에 대안세력을 선언했던 역사적 결정체다. 그게 오늘날 국제사회의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60주년 기념식이라고 해서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청와대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이건 21세기 아시아의 시대를 말하면서 정작 아시아의 일원인 한국이 결코 하찮게 다룰 만한 초청장이 아니다. 더욱이 초청자가 세계 최대 무슬림국가로 경제 규모 10위권 진입을 눈앞에 둔 인도네시아라는 한국의 전략적 동반자다.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의 최대 투자국이자 무역 상대일 뿐 아니라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비동맹운동을 이끌어온 나라가 바로 인도네시아다. 한국 입장에서 보자면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모든 면에서 사활이 걸린 아시아의 최대 전략지대다. 국제사회가 그 인도네시아를 잡겠다고 난리들인 게 괜한 짓들이 아니다. 중국 주석 시진핑과 일본 총리 아베 신조가 반둥회의 초청장을 기꺼이 받아든 까닭이기도 하다. 아베는 이미 대표 연설까지 준비한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한국 정부는 어디에 설 것인가? 게다가 이 반둥회의 초청장에는 박근혜-김정은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초청자인 인도네시아는 남북한과 모두 터놓고 지내는 흔치 않은 나라다. 그동안 인도네시아 정부는 비록 한국 정부가 탐탁잖게 여겼지만 남북관계 중재에 나서기도 했던 친구다. 말하자면 남북 정상이 모두 편하게 여겨도 되는 인도네시아 땅에서 국제 공룡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반둥은 남북 정상이 살벌하게 여겨온 워싱턴도 베이징도 모스크바도 아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109개 나라 정상들의 응원을 받는 박근혜-김정은 만남을 상상해 보라. 이런 기회는 다시 잡기 힘들다. 올해 초청장 외교의 대미를 장식할 게 하나 더 남았다. 중국 정부의 9월3일 항일전승 70주년 기념 초청장이다. 중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관련국 정상들을 모두 초청하는 대규모 행사를 계획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이미 푸틴과 시진핑은 유럽과 아시아 전선 전승일에 맞춰 상호 방문에 합의한 상태다. 중국 정부가 말한 그 제2차 세계대전 관련국이란 건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같은 연합국은 말할 나위도 없고 아시아 전선 쪽 인도, 버마, 필리핀, 베트남 같은 나라들을 모두 포함한다. 중국의 항일투쟁에 한몫했던 남북한이 초청에서 빠질 가능성은 없다. 아직 초청장들이 날아가진 않았지만 러시아 쪽 초청장에 비해 장애물이 없다는 장점을 지녔다. 당장 미국이 이 초청장만은 찢어버릴 거리가 없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중국의 초청장을 하찮게 여길 나라도 흔치 않아 항일전승 기념식이 규모면에서 러시아 전승기념식을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내용 면에서도 러시아 쪽 기념식이 세력 과시라면 중국 쪽 기념식에서는 실질적인 외교판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바로 한반도 사안이 고갱이로 떠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오바마와 김정은이 마주칠 만한 그림이 나온데다 북핵 문제를 낀 6자회담 관련국 정상들이 모두 한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이 초청장 외교를 통해 한반도 의제를 끌고 갈 것이라는 추측들이 그래서 이미 나오고 있다. 분단 70년사에 이런 기회 없다 박근혜-김정은 조한테는 올 한해 세 번씩이나 무대가 펼쳐지는 셈이다. 초청장 외교는 박근혜-김정은 조를 위한 잔치다. 주인공이 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모두 그 둘에 달렸다. 한반도 분단 70년사에서 이런 기회는 결코 없었다. 앞으로도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건 없이 만나야 한다. 4월에도 5월에도 그리고 9월에도 만나면 만날수록 좋다. 국내 정치에 휘둘릴 일도 없는 이런 기회를 살려야 한다. 박근혜-김정은 조는 남들이 마련해준 이런 자리마저 마다하는 속 좁은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 눈치 저 눈치보다 4월과 5월을 날리고 9월에 피할 수 없어 만나는 일도 결코 일어나서 안 된다. 4월에 손잡고 5월에 머리 맞대고 9월에 함께 웃는 대장정에 나서기를 기대하는 까닭이다. 이건 청와대 말처럼 일정이 어렵고 따위로 둘러댈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 대통령한테 남북문제를 풀어가고 통일을 준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정은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한테도 마찬가지다. 더 바쁜 일정이 있다면 반역이다. 2015년 남북이 새로운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희망, 꽃피는 4월과 5월 그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9월을 기대하는 까닭이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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