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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12 19:02 수정 : 2014.12.14 09:43

➊ 흔히들 센트럴 모스크로 불러온 바이툴라흐만 모스크. 쓰나미 때 반다아체 중심부는 이 모스크를 빼고 온전히 살아남은 게 없었다.(왼쪽) 이제 그 지역은 공원으로 변했고, 호텔 건설용 기둥들엔 색깔을 입혀놓았다.(오른쪽) ➋ 반다아체 최대 인구밀집지로 항구와 맞닿아 있던 울레레는 초토로 변하면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냈다.(왼쪽) 복구불능 판정을 받은 울레레 지역엔 어린이공원이 들어섰고 바 다와 도심 사이의 2킬로미터의 완충지 방파제 노릇을 하고 있다.(오른쪽) ➌ 반다아체에서 14킬로미터 떨어진 록응아 바닷가엔 아무것도 살아남은 게 없었다.(왼쪽) 그 바닷가엔 이제 10년째 자란 방파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오른쪽) ➍ 주검들이 나뒹굴던 람끄루엣마을의 알이슬라 모스크 앞 길.(왼쪽) 그 자리에는 대형 집단무덤이 만들어졌다. 모스크는 현재 증축 중이다.(오른쪽) ➎ 높이 15미터 부두탑 꼭대기가 부서져 쓰나미가 최소 15미터가 넘었던 사실을 증명했다.(왼쪽) 현재 어선 전용으로 사용하는 그 부둣가 뒤쪽은 인도네시아군이 병영으로 쓰고 있다. 부두탑은 수리하지 않은 채 그날의 상징으로 서 있다.(오른쪽) 반다아체/정문태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 정문태 1990년부터 타이를 베이스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 전문기자. 23년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훈센 캄보디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2004년), <현장은 역사다>(2010년)가 있다. 격주로 국제뉴스의 이면을 한겨레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사람들은 흔히 10년을 말한다. 강산이 바뀌는 것도 10년을 잣대로 삼고 세대를 나눌 때도 그렇다. 무슨 기념식들도 10년째가 되는 해엔 어김없이 큰판을 벌이곤 했다. 왜 꼭 그게 10년이어야 하는지 따져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사람들 마음속엔 10년이란 게 박혀 있는 모양이다.

내게 그 10년이란 의미는 게으름과 핑곗거리가 아니었던가 싶다. 꼭 10년 전인 2004년 12월26일 나는 빠따니를 비롯한 타이 남부지역에서 무슬림분리주의 분쟁을 취재하고 있었다. 타이 정부군의 무력 공격에 맞선 무슬림 분리주의 전사들의 도시 게릴라전이 한창이던 그 땅에서는 날마다 폭탄이 터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날 아침 자동차폭탄테러 현장을 취재하고 호텔로 돌아온 내게 현지 기자들이 ‘큰 파도’가 푸껫을 덮쳤다고 귀띔했다. 피투성이 현장을 보고 온 판에 까짓 파도가 귀에 들 리가 없었다. 호텔 로비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비비시>(BBC)의 제1보를 보면서도 지나쳤다. 내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현장이 걸려 있었던 탓이다. 이어 <한겨레> 편집국에서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나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28일 새벽 짐을 꾸려 푸껫으로 날아갔다. 푸껫은 산지옥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그런 유의 파도가 아니었다. 그 무렵 5천여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꼽고 있던 푸껫을 비롯한 타이 남부에는 이미 세계 곳곳에서 날아온 기자들이 희생자 수를 웃돌 만큼 벅적거렸다. 그러나 그 며칠 동안 푸껫을 취재하면서 내 마음은 아체에 가 있었다. 희생자 수만도 20만명이 넘는다고 들려오는 아체 소식에 푸껫 쪽 취재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2003년부터 계엄군사작전으로 아체를 들쑤셔온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쓰나미 뒤에도 여전히 외신기자 출입금지령을 풀지 않아 정확한 뉴스마저 나오지 않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다 결국 푸껫을 놓고 일주일 만에 아체로 들어갔다. 수마트라 북부 중심지 메단을 거쳐 자동차로 반다아체까지 들어가던 그 길은 차라리 곡예였다. 메단에서 시민단체 도움으로 가짜 문서와 신분증을 만들어 구호요원으로 위장해 아체로 들어갔지만 곳곳에 진 친 정부군 검문소들은 통과세를 요구하며 길을 막았다. 17시간 만에 반다아체에 닿고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어딘가를 향해야 할지도 모르는 적개심에 치를 떨었다. 수십년 동안 분쟁으로 피눈물이 마를 날 없었던 땅에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또 벌어져야 하는지…. 속울음을 참으며 부둣가로 달려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울레레 지역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주일도 더 지났지만 모퉁이마다 여전히 주검들이 뒹굴었다. 너무 미안했다. 며칠이라도 더 일찍 이 땅에 오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아체 전역을 군사작전지역(DOM, 1989~1998년)으로 선포한 뒤 처음으로 아체를 취재했던 외신기자로서, 2003년 계엄군사작전을 취재했던 유일한 외신기자로서 내가 느껴온 책임감 같은 것이었다. 그사이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를 바깥세상과 철저히 차단해 왔다. 아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바깥사람이란 건 인도네시아 정부군뿐이었고 아체 사람들이 느낄 수 있었던 건 처절한 고립감뿐이었다. 그런 인도네시아 정부는 쓰나미(지진해일) 초동단계에서 국제구호단체나 외신기자들 출입을 막으며 시간을 놓쳤고 희생자 수가 10만명을 넘어선 12월30일 아예 공식적인 집계마저 포기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정부는 즉각 구조·구호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해병대와 특전사를 비롯한 특수전 병력만도 4만여명을 아체에 주둔시켜 왔으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쓰나미로 아체 총인구의 5%가 사망하고 10%에 이르는 40만여명이 집을 잃은 극단적인 자연재해 속에서도 엔당 수와랴 아체계엄군사작전 사령관은 “아체 군사작전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진행한다”고 밝히며 전의만 불태웠다. 이런 게 내 기억에 박힌 10년 전 분노에 떨었던 아체, 그 쓰나미 현장이었다. 그날 나는 폐허로 변한 울레레를 바라보면서 늘 아체와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지난 10년 동안 아체 쓰나미와 함께하지 못했다. 기껏 9개월 뒤쯤 쓰나미를 한번 둘러보는 데 그쳤다. 그사이 나는 인도네시아 정부와 자유아체운동(GAM) 사이의 평화협정 같은 것들을 취재하면서 몇 차례 아체를 찾았지만 쓰나미를 돌아보진 못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10년 전 쓰나미 때 느꼈던 분노의 감정들은 서서히 식어갔고 그 자리엔 게으름과 핑계들만 빼곡히 들어찼다. 나는 늘 바빴고 시간에 쪼들린다고 여기며 살았다. 게다가 세상 언론도 쓰나미 4년 뒤니 7년 뒤 같은 말에 관심들이 없었다. 그러다가 쓰나미 10년을 떠올렸다. 역시 사람들 사이에 10년이란 건 통하는 바가 있었다. 급히 아체로 달려왔다. 말할 나위도 없이 아체는 변했다. 그날 피난민들로 들끓었던 초라한 반다아체공항은 이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한 국제공항으로 자리잡았다. 군용 트럭들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다니던 그 길들은 이제 도요타 자동차들 판이 되었고 반다아체 도심은 제법 깔끔하게 다듬어 놓았다. 한마디로 반다아체만 놓고 보면 쓰나미 전보다 훨씬 나아진 셈이다. 적어도 겉보기엔 그렇다는 말이다. 아직 반다아체를 떠나 시골 바닷가 마을로 가면 곳곳에 상처들이 남아 있지만.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문제는 사람이다. 길이나 집들이야 새로 지으면 그만이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안과 공포는 10년 세월도 해결해주지 못한 모양이다. “나야 가족들도 모두 무사했고 기껏 발목에 물이 잠기는 경험을 했지만 아직도 바닷가에 나서기가 겁나고 땅이 조금만 흔들려도 곧장 쓰나미 공포에 사로잡힌다.” 방송기자로 일해온 야얀 말마따나 아체 사람들은 아직도 쓰나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신을 향한 믿음이 모자랐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여겨온 아체 사람들은 더 열심히 신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0년 전 그날 나는 아체에서 사람과 자연을 싸잡아 화를 냈다. 10년 뒤 오늘 아체 사람들은 자신들을 탓한다. 신과 사람 사이에 들어선 자연현상, 그 답 없는 안타까움 속에서 아체를 본다.

이번주 아체 10년의 변화는 사진으로 보았으면 좋겠다. 글로는 그 모습을 담아낼 재간이 없는 탓이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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