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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19 18:49 수정 : 2014.09.20 10:22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31)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

▶ 정문태 1990년부터 타이를 베이스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 전문기자. 23년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훈센 캄보디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2004년), <현장은 역사다>(2010년)가 있다. 격주로 국제뉴스의 이면을 한겨레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14시20분. 국민투표 중 투표장 낙서로 유권자(반독립) 협박’(인디펜던트), ‘14시44분. 출구조사 없는 국민투표, 민주주의 결함 아닌가?’(가디언) ‘14시55분, 유권자 등록 97%인 423만5323명, 스코틀랜드 선거사에서 최대 기록’(비비시), ‘15시14분. 온라인에서 일부 투표장 이미 100% 투표 완료로 폐장 소문’(미러)….

9월18일 목요일 스코틀랜드 국민투표를 7시간 시차가 나는 타이 방콕에 앉아 외신을 통해 지켜본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게다가 방콕에서 2시간 앞서가는 서울 시간 19일 금요일 오전에 토요일치 기사를 마감해야 하는 탓에 뜬눈으로 지새운들 투표 결과를 담기는 힘들 것 같다. 이미 방콕은 19일로 넘어가고 있다. 현장이 없는데다 시차까지 속 썩이는 마당에 외신들 선거보도란 것도 아주 짜증스럽기만 하다. 무엇보다 영국 언론은 신문 방송 가릴 것 없이 선거보도를 아예 대놓고 ‘반독립’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국민투표 말이 나오고부터 스코틀랜드 독립을 매우 부정적으로 다뤄왔던 영국 언론은 기어이 투표날까지 반대가 우세한 온갖 여론조사 결과를 버젓이 달아 올리며 유권자들이 공포를 느낄 만한 어두운 독립 뒤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결과와 상관없이 아주 즐거운 경험

어쨌든 세계시민사회는 이번 스코틀랜드 국민투표를 통해 결과와 상관없이 아주 즐거운 경험을 하는 셈이다. 한 시민사회가 국가를 세우자 말자를 놓고 자결권을 행사한다는 건 교과서에서나 봐온 민주주의가 아니던가! 현대사에서 전쟁과 학살을 거치지 않은 독립국 탄생을 보기 힘들었던 경험에 견줘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해온 인류사에서 20세기와 21세기를 분열기로 볼 만한데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노르웨이를 신호탄 삼아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식민 지배를 당해왔던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했다. 냉전이 숙진 20세기 말부터만 따져도 30여개에 이르는 새로운 독립국가가 태어났다. 특히 세계시민사회는 1990년대 초 소비에트 러시아가 큰 탈 없이 15개로 쪼개지는 세기적인 사건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에리트레아나 1990년대 미국이 앞장선 나토의 유고연방 침공과 해체 끝에 태어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는 말할 것도 없고 1999년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한 동티모르 그리고 2011년 수단에서 독립한 남수단처럼 거의 모든 신생국들이 오랜 전쟁과 학살 끝에 독립하는 비극을 거쳤다.

그러니 정치적 혼란이나 전쟁 없이 국민투표를 끌어낸 스코틀랜드의 유쾌한 독립 실험을 놓고 그동안 분리독립을 외쳐온 프랑스의 바스크와 코르시카나 스페인의 카탈루냐(카탈로니아), 스위스의 제네바, 독일의 바이에른(바바리아), 이탈리아의 사르데냐(사르디니아), 스웨덴의 스코네(스카니아)를 비롯한 유럽에만도 100여개에 이르는 소수 시민사회가 흥분할 수밖에. 1990년대부터 분리독립 기운이 만만찮게 일고 있는 미국의 텍사스나 캐나다의 퀘벡 시민사회가 스코틀랜드 국민투표에 눈길을 꽂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국 정부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정부들이 속내를 곧이 드러내진 않았지만 독립 도미노를 두려워하며 온갖 부정적 정보를 흘리면서 스코틀랜드 독립을 필사적으로 저지해 왔다. 국제 주류 언론들도 이 세기적인 사건을 두고 축소·왜곡 보도로 맞장구쳤다. 그 좋은 본보기가 독립 스코틀랜드 추락론이었다. 이건 언론사들의 아주 편파적이고 의도적인 공포전략이었다. 언론은 오직 독립 스코틀랜드가 잃을 것들만 강조했을 뿐 영국이 잃을 대목에는 입을 닫았다. 그 과정에서 언론이 흘린 단골 메뉴가 독립 스코틀랜드로부터 금융과 해외자본 철수설이었다. 초기 몇몇 영국과 연동된 자본이 철수할 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본질적으로 자본이 이문 나는 땅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데다 새로운 자본이 이문을 보고 몰려간다는 것쯤은 굳이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언론은 오늘 당장 독립하더라도 일인당 국민소득이 4만5000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8위고 국내총생산 2490억달러로 핀란드나 이스라엘과 맞먹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왜 자본이 철수하는지 그 구체적인 근거를 내놓지 못했다.

사실은 스코틀랜드가 떨어져 나가면 오히려 영국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될 형편이다. 부채만도 1조파운드(1712조원)에 이르는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가 차지해온 경제가 10%에 못 미친다고 떠들어댈 입장이 아니다. 당장 영국 정부는 지난해 기준 스코틀랜드에서 거둬들인 세수 570억파운드(98조원)가 날아가 버린다. 그것도 그동안 영국 시민한테 일인당 연평균 9000파운드 세금을 거두면서 스코틀랜드 시민한테는 1만700파운드를 짜낸 불평등한 돈이다. 게다가 독립 바람이 일자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가 갖게 될 북해유전 매장량을 줄여가며 경제성을 낮추고자 안간힘을 써왔지만 현실적으로 영국 경제의 사활이 걸린 곳이 바로 그 북해유전이다. 영국은 북해유전을 잃게 되면 세수를 잃을 뿐 아니라 원유의 안정적인 조달을 위한 막대한 정치적 비용까지 부담해야 할 처지다.

영국 입장에서는 군사적으로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영국 보복핵전략의 심장인 핵잠수함 4척의 기지가 바로 스코틀랜드에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잃는다면 근본적인 군사전략이 흔들리게 된다. 국민투표를 이끌어낸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은 이미 비핵 선언을 한 상태라 영국은 스코틀랜드가 독립한다면 핵잠수함 기지를 옮겨야 할 판이다. 전문가들은 새 잠수함 기지와 부대시설 건설에 최소 10년이 걸리고 그 비용만도 500억파운드(85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영국 정부는 그런 엄청난 비용을 쉽사리 끌어댈 수도 없거니와 지역주의가 강한 풍토에서 냉전 시절처럼 아무 데나 핵잠수함 기지를 집어넣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오죽했으면 벌써부터 영국 국방부 안에서는 스코틀랜드가 독립하면 새 기지를 마련할 때까지 핵잠수함과 핵미사일을 미국으로 옮기겠다는 말까지 나올까.

모든 부문을 따져보면 논쟁거리야 한둘이 아니겠지만 영국이 독립 스코틀랜드의 추락을 입에 올리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받을 치명상을 더 걱정해야 할 처지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독립 스코틀랜드 추락론은
편파적이고 의도적 공포전략
언론은 오직 독립 스코틀랜드가
잃을 것들만 강조했을 뿐
영국이 잃을 대목엔 입을 닫아

아시아를 눈 닦고 뒤져봐도
소수민족들한테 국민투표라는
자결권을 안겨줄 정부는 없다
그렇다고 독립의지가 사라지나
스코틀랜드는 아시아와 너무 멀다

아시아 현실에 가까운 동티모르 모델

이쯤에서 스코틀랜드 국민투표를 아시아의 눈으로 살펴볼 만하다. 그동안 분리독립을 외쳐왔던 버마의 카렌, 인도네시아의 아체, 타이의 빠따니, 인디아의 타밀나두, 카슈미르, 중국의 티베트, 신장 위구르 같은 아시아의 50개를 웃도는 분쟁지역에서도 저마다 스코틀랜드 국민투표를 눈여겨보고 있다고들 한다. 스코틀랜드가 아시아 쪽 정파들한테 던지는 심리적 자극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동티모르 독립 때도 그랬다. 동티모르가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결정하자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외쳐왔던 아체, 웨스트파푸아, 말루쿠 같은 분쟁지역뿐 아니라 필리핀의 민다나오를 비롯해 20여개에 이르는 버마의 소수민족들도 일제히 동티모르식 국민투표를 모델로 들고 나섰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스코틀랜드 독립투표가 아시아 쪽 분리독립에 영향을 끼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국민투표를 끌어낼 수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조건과 아시아 사정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역사적 배경부터가 다르다. 스코틀랜드가 1707년 잉글랜드 왕조와 대등한 관계에서 합병했다면 분리독립을 외쳐온 아시아의 모든 지역은 무력을 통한 합병 과정을 거쳤다. 예컨대 티베트처럼 중국이라는 다수민족이 소수민족을 무력 합병했거나 인도의 미조람처럼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남긴 최악의 유산인 국경(국가) 개념이 충돌해온 공통점을 지녔다. 따라서 스코틀랜드는 비록 300년 넘게 영국의 일부였지만 이번처럼 국민투표를 끌어낼 수 있는 결정적 동력이 된 독립적인 헌법과 자치정부를 지녀온 데 비해 아시아 쪽은 모든 소수민족이 중앙정부의 압제에 갇혀 왔다는 중대한 차이가 난다. 그러니 애초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외칠 수 있는 스코틀랜드국민당 같은 민족주의 보수 정당이 자랄 만한 기름진 토양이 있었다면 아시아 쪽은 합법적인 민족주의 보수 정당이 발도 붙일 수 없는 황무지였다. 그래서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냉전기간 동안 사회주의 이념을 지닌 정파들이 불법 지하조직을 통해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아시아 분쟁의 뿌리다. 말하자면 현재 아시아에서 분리독립을 외치는 소수민족 가운데 스코틀랜드 모델을 좇아 평화적인 국민투표로 미래를 결정할 만한 조건을 지닌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뜻이다. 불행하게도 아시아 현실에 가까운 건 동티모르 모델이다. 동티모르는 국민투표를 하기까지 일본과 인도네시아 침략자들한테 인구의 4분의 1인 20만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거쳤다. 타밀, 팔레스타인, 쿠르드를 비롯한 거의 모든 아시아 소수민족들이 겪는 현실이 바로 동티모르 학살사와 닿아 있는 탓이다. 현재 아시아를 눈 닦고 뒤져봐도 소수민족들한테 국민투표라는 자결권을 안겨줄 정부는 없다. 그렇다고 소수민족의 독립 의지가 사라질 가능성도 없다. 아시아의 분쟁이 끝날 수 없는 까닭이다. 스코틀랜드는 아시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노동자 삶과는 무관한 지배구조의 변화

독립. 숱한 민족분쟁 현장을 취재해온 나는 이 독립이란 말만 들어도 늘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러나 정작 그 ‘독립이 누구를 위한 일인가?’ 이 의문에 나는 아직도 선뜻 할 말이 없다. 스코틀랜드만 하더라도 보수 민족주의 스코틀랜드국민당과 스코티시사회당(SSP)은 독립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모두들 스코틀랜드를 노동자 천국으로 만들겠다고 떠들었다. 국민투표의 향방을 노동자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당은 반전, 반핵, 친팔레스타인 정책을 내걸면서도 정작 미국을 최대 동맹국이라 부르며 금융과 자본 붙들기에만 매달렸지 노동자 천국을 위한 정책은 내놓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영국 사회평등당(SEP)은 이미 이기적인 자국중심주의로 변질된 철 지난 구호인 노동자 국제연대로 자본주의를 물리치자며 반독립 캠페인을 벌여 전선을 교란시켰다. 노동자의 삶과 무관하게 지배구조만 바뀌는 스코틀랜드 독립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동티모르를 보자. 1975년 인도네시아 무력합병에 맞선 독립운동 조직들은 저마다 사회주의 이념을 내걸고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동티모르 독립 영웅들인 현 총리 샤나나 구스망과 전 대통령 하무스 오르타는 마오를, 전 총리 마리 알카티리는 마르크스-레닌을 가슴에 품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독립 뒤 모두들 투쟁의 발판이었던 사회주의 정치 이념을 버리고 자본을 좇았고 그 결과 12년이 지났지만 동티모르에 남은 건 부정부패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동티모르로 국호와 정부가 바뀌었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1975년을 살아가고 있다. 이게 독립 실험에 뛰어든 스코틀랜드에 던지는 질문이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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