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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20 18:42 수정 : 2014.06.20 20:26

동남아시아는 월드컵 본선에 어느 나라도 오른 적이 없었지만 그 열기만은 유럽 못지않았다. 길거리 응원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만큼 뜨거웠다. 2004년 1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타이거컵 국제축구대회 싱가포르-라오스 경기에서 선수들이 공을 다투고 있다. AP 연합뉴스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25) 동남아 축구민족주의

“택시 기사가 인구 27만 남짓한 겔젠키르헨의 샬케를 속속들이 꿰고 있어 너무 놀랐다.”

며칠 전 방송 프로듀서로 일하는 독일 친구 게오르크 뮐러를 만났더니 뜻밖에 축구 이야기가 나왔다. 독일 프로축구에 ‘샬케04’라는 팀이 있단다. 그 택시 기사가 팬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나도 박지성이라는 한국 선수가 영국 프로축구팀에서 뛴다는 걸 택시 기사한테 들었으니. 섭섭할지 몰라도 타이 사람들 가운데 한국 대통령 박근혜는 아는 이들이 흔치 않지만 박지성은 모르는 이들이 없다. 타이 사람들 축구 열기가 그렇다. 동네 아이들까지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축구 선수 이름들을 줄줄 꿸 정도다. 방송사들은 유럽 축구 리그를 생으로 퍼 날라대고 축구만 다루는 일간지 <사커>는 늦잠 자면 끝이다. 그러니 길을 가다 카페나 술집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에 놀란다면 그건 분명 관광객이다. 그렇다면 비록 월드컵 본선에 오른 적은 없지만 동남아시아에서만큼은 일이등을 다투는 타이 축구에 대한 자부심을 건드리는 건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아무튼 게오르크와 나는 월드컵 이야기로 넘어가긴 했지만 축구에 생꾼이다 보니 부패한 국제축구연맹(FIFA)을 욕하고 철 지난 펠레의 전설을 늘어놓다 말았다. 사이좋게 지내던 친구들끼리도 월드컵 때만 되면 나라별로 갈려 마음 상한다는 외신판 이야기 끝에 우린 중계를 안 보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그이나 나나 인생에 통틀어봐야 서너 번 월드컵을 본 게 다니 다투고 말고 할 일은 없었다. 축구를 하지 않고, 축구를 보지 않고,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게 우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카타르 월드컵 개최 자극받은
2030년 아세안 공동개최 움직임
공식 개최신청도 하지 않았는데
라오스·캄보디아·버마 쪽에선
불만들이 터져나오고 난리다

월드컵 본선에 오른 적 없지만
유럽 못잖은 동남아 축구 열기
올해 쿠데타와 도박금지로 시들
언론사마다 브라질에 기자 보낸
인도네시아 사회만 예외인 듯

캄보디아, 국경에 눈길 쏠려 축구는 밀렸다

내친김에 다른 친구들은 어떤지 궁금해서 안부도 물을 겸 전화로 월드컵 이야기를 나눠봤다. “그 동네 월드컵 열기는 어때?” 다들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갑자기 축구 이야기를 꺼낸 나를 모두들 수상하게 대했다. 다들 20년이 넘은 친구들이지만 지금껏 우리는 커피숍에서도 축구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프놈펜 <교도뉴스>(교도통신)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친구 푸이 끼아는 “어, 웬 월드컵?”이라며 놀라더니 “4년 전에 비하면 조용한 편이다. 중계 시간이 너무 이른 새벽인데다 정부가 축구 도박을 금지해서 맥이 빠졌다”고 한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타이 군부가 불법 이주노동자를 소탕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10만명을 웃도는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일제히 되돌아오는 바람에 온 나라 눈길이 국경으로 쏠려 월드컵이 밀렸다”고 덧붙였다. 신문들도 예전과 달리 월드컵 기사를 한두 페이지로 끝낸다고 하니 확실히 열기가 식긴 식은 모양이다. 버마 쪽 사정도 마찬가지다. 최근 랑군에 베이스를 차린 칼럼니스트 나이투는 “타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쫓기다시피 되돌아오는 판인데다 아웅산수찌가 차기 대통령 선거 참여를 위해 개헌에 온 정열을 불사르는 통에 월드컵이 묻혀버렸다”고 전한다. 2011년부터 개혁과 개방을 들고나선 버마는 역시 정치가 중요한 모양이다. 신문들도 월드컵을 스포츠면에 그저 몇 꼭지로 다룰 뿐이라고 한다.

인도네시아는 사정이 좀 다른 듯싶다. <템포> 친구 아맛 타우픽은 “시중 분위기만 놓고 보면 전만 못한 게 분명한데 그렇다고 월드컵 열기가 식었다고 볼 순 없다”고 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7월9일 대통령선거가 걸려 있다. “대통령선거와 월드컵이 인도네시아 사회를 양분했다”는 게 그이 뜻이었다. 다만 언론사들 경쟁은 전에 없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방송이나 신문들이 저마다 브라질 현장에 기자들을 보내 월드컵 소식을 전하는 가운데 최대 일간지 <자와 포스>는 6월18일치에 여덟 면을 월드컵으로 메웠고 웬만한 신문들도 대여섯 면씩 까넣었다고 한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매체인 <템포>가 기자를 둘씩이나 브라질에 보냈고 같은 날 일간신문 <코란 템포>가 다섯 면을 월드컵으로 때웠다는 건 흔치 않은 일임이 틀림없다. 이런 현상을 타우픽은 “언론이 그 전엔 축구만 따라갔다면 이번엔 아마존에 더 큰 비중을 둔 것처럼 보인다”며 “브라질이라는 이상향을 좇아 각박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 심리를 언론이 꿰뚫어본 것 같다”고 풀이했다.

타이 사회는 한 달 전 쿠데타로 아직도 뻑뻑한 기운에 사로잡혀 있다. 그동안 월드컵에 목을 맸던 타이답지 않게 이번엔 열기가 끓어오르지 않는다. <네이션> 친구 수팔락 깐짜나쿤디는 “쿠데타로 뒤집힌 게 어제인데 월드컵에 열광한다면 미친 거지. 게다가 군인들이 모든 도박을 금지시켰으니 축구 볼 맛이 나겠나?”라고 되물었다. 듣고 보니 그렇다. 월드컵 때마다 대형 조직을 낀 불법 도박뿐 아니라 동네, 학교, 직장에서 벌이는 내기 도박까지 난리를 피웠던 게 타이다. 이번에도 비록 쿠데타군이 강력한 도박금지령을 내리긴 했지만 타나왓 폰위차이(경제산업예측센터 소장)는 판돈이 1조4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이건 오히려 2010년 월드컵에 비해 16% 증가한 수치다. 타이가 유럽 축구 리그에 몸살을 앓아왔던 까닭도 바로 이 도박 탓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다.

‘유료 시청’ 풀어버린 타이 쿠데타군의 선물

쿠데타 군인들은 도박금지령으로 마음 상했을 사람들에게 선물을 내놨다. 군부 방송인 <채널5> 사장인 찻우돔 띠타시리 중장은 “모든 타이 사람들이 2014년 월드컵 게임을 보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모두가 보고 즐기길 바란다”며 64게임 모두를 <채널5>와 <채널7>을 통해 공짜로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정책을 마련했다. 본디 타이의 월드컵 중계권은 아르에스국제방송이란 회사가 22게임을 공짜로 보여주고 나머지는 시청자가 5만원짜리 수신기를 구입해야 볼 수 있는 독점권을 지녔는데 쿠데타군이 130억원을 배상하고 풀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압박이 있었느니 어쩌니 말썽이 일기도 했다. 아무튼 이 선물은 쿠데타 군인들이 그동안 ‘타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돌려주자’는 프로그램 아래 공짜 쇼, 공짜 이발, 음식을 베풀어온 포퓰리스트 정책 가운데 가장 통 큰 놈으로 꼽을 만하다. 시민들이 월드컵이야 잘 보겠지만 그렇다고 쿠데타 군인들한테 지지를 보낼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월드컵 열기가 끓어오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되돌아보면 지금껏 동남아시아는 비록 월드컵 본선에 아무도 오른 적이 없었지만 그 열기만은 참가국들 못지않았다. 길거리 응원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만큼 뜨거웠다. 타이는 전통적으로 영국이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들을 응원했고 인도네시아는 아시아를 외치며 한국에 열광했던 것 같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때는 지역 언론도 또렷하게 편이 갈렸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 타이 언론들은 한국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강호들을 꺾자 홈그라운드 텃세라며 삐딱하게 다룬 데 비해 인도네시아 언론들은 아시아의 자존심을 지켰다며 손뼉을 쳤다. 그건 평소 한국에 우호적인 인도네시아 언론과 그 반대인 타이 언론이 논조를 그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속살을 뜯어보면 축구를 놓고 늘 으르렁댔던 두 나라의 기 싸움이기도 했다. 이른바 축구민족주의다. 동남아시아의 주도권을 다퉈온 두 나라는 축구 시합을 할 때마다 늘 팽팽한 긴장감을 몰고 다녔다.

1997년 자카르타에서 벌어진 동남아시안게임(SEA Game) 때는 관객들이 축구장에 불을 지르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축구민족주의는 두 나라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전역에 흘러다니는 해묵은 이념이다. 지난해 12월 버마에서 열린 동남아시안게임 때도 버마와 인도네시아 축구 결과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길바닥을 누비며 난동을 부렸듯이 타이-버마, 타이-베트남, 말레이시아-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어디 할 것 없이 축구는 붙었다 하면 꺼림칙한 뒤끝을 남기곤 했다. 훌리건이 등장하는 유럽 축구를 너무 많이 봐서들 전염된 것 같기도 하고. 1969년 월드컵을 놓고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무력대결을 벌였던 이른바 축구전쟁처럼 막가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스러울 정도다. 축구가 전쟁처럼 공격성과 집단성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1960년대 베트남전쟁 반전운동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전쟁 대신 섹스를’(Make love, not war)이란 구호를 이젠 ‘축구 대신 섹스를’로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흔히들 유럽에서 나온 축구란 게 대개 종교나 인종적 단일성을 지닌 좁은 패거리들로 출발했다는데 동남아시아 축구판이 국가라는 형태로 커졌을 뿐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싱가포르축구협회의 “한 게임만 배당” 발표에…

그렇게 축구 한판 같이 즐기지 못하는 마당에 2015년 아세안 경제통합(AEC) 대망은 또 어디로 튈지, 그래서 많은 이들이 회의적으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축구만 붙으면 서로 예민해지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카타르의 월드컵 개최에 자극받아 2030년 아세안 공동개최를 공식 의제로 채택했다. 아세안의 월드컵 공동개최가 가능할지 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또 얼마나 서로 삐치고 다툴지 걱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아직 공식적으로 개최 신청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싱가포르축구협회가 라오스, 캄보디아, 버마에는 한 게임씩만 배당하겠다고 밝히자 그쪽에서는 벌써부터 불만들이 터져 나오고 난리다. 2002년 한국과 일본 월드컵 공동개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알 수 없듯이, 전투적인 축구민족주의에 짓눌린 동남아시아가 월드컵을 개최한들 또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

애국의 이름 아래 호전적인 축구민족주의가 판치는 게 과연 동남아시아뿐일까? 유럽은, 아프리카는, 북·남아메리카는, 그리고 한국은 어떤가? 사실은 이 의문에서부터 오늘 이야기를 시작했다. 축구를 즐긴다는 것과 인종이나 국가를 들이댄 축구민족주의를 내세운다는 건 같은 뜻이 아니다. 멋들어진 축구 시합 속에 감춰온 축구민족주의를 걷어내는 일은 세계시민의 의무다.

지난 17일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이 제네바에서 기자들한테 했던 말이 있다.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응원하는 마음을 숨길 수야 없지만 사무총장으로서 중립을 지키는 건 매우 중요하다. … 한국 경기가 있을 때는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뛴다”며 순정을 털어놓았다. 반기문의 심장이야 평생 한국팀과 함께 뛰겠지만 머리는 조절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게 축구민족주의를 걷어내는 방법이고 이게 월드컵을 진짜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늘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을 비판적으로 다뤄왔지만 오랜만에 멋있는 모습을 보았다.

4년 만에 찾아온 월드컵 마음껏 즐기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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