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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21 19:08 수정 : 2015.10.23 17:54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17) G2 패권싸움과 버마

‘떼젯전투/2014.02.07.15시/버마 정부군 경보병 505대대 떼젯산 공격. 따안군 223대대 반격. 버마 정부군 지휘관 탄 진 뚠 중령 포함 10여명 사살…’

‘2014.2.12~13/ 버마 정부군 경보병 99사단, 까친독립군 본부 라이자로 통하는 5여단 전략요충지 자잉양과 까우 고지 공격. 까친독립군 두 고지 상실…’

2월 들어 따안민족해방군(TNLA)과 까친독립군(KIA) 쪽에서 보내오는 전투상보가 부쩍 늘었다. 그즈음 국제 언론은 2월6일 미국 수출입은행이 밝힌 대버마 무역 신용장 개설 계획에만 열을 올렸을 뿐 버마 정부군의 소수민족 공격은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니 요즘 국경 소수민족 지도부를 만나면 언론이 버마에서 돈줄을 좇는 국제자본들 눈길로만 뉴스를 생산한다고 이만저만 불만들이 아니다. 실제로 민주화 문제와 함께 버마사회의 두 기본모순 가운데 한 축인 소수민족 문제를 풀지 않고는 평화도 복구도 불가능한 현실에서 그동안 언론이 자본과 묶인 국제정치로만 지나치게 버마를 재단해 왔다. 그 단골 메뉴가 버마를 낀 미국-중국 충돌론이었다. 복잡한 그 내용들이란 게 한마디로 압축하면 동네 고서방도 다 아는 미국의 중국봉쇄 정책인데, 마치 이 세상에 없었던 일이라도 벌어진 양 호들갑 떨었다.

그러나 버마전역(Burma theater)에서 미국과 중국의 충돌은 결코 새로운 일도 현상도 아니었다. 감추고 묻혀왔을 뿐, 이미 1950년 초부터 미국은 버마전역을 놓고 중국과 고·저강도전쟁을 벌여왔다. 그 실상을 편의상 제1기 중국 국민당 잔당의 버마 침략(1950~1962년), 제2기 네윈 장군 쿠데타(1962~1988년), 제3기 8888 민주항쟁(1988~2011년), 제4기 준군사정부의 등장(2011~현재)으로 나눠서 들춰보자.

버마·중국 국경에 펼쳐진 한국전쟁 제2전선

제1기는 1949년 10월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이어 12월 타이완(대만)으로 탈출한 장제스를 좇는 국민당 잔당들이 중국 윈난성과 국경을 맞댄 버마 샨주를 침범하면서 비롯되었다. 장제스는 그 잔당들을 본토 수복 꿈의 밑천으로 삼았고,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1950년 초부터 합동참모본부 건의에 따라 그 잔당들을 중국봉쇄 도구로 만지기 시작했다. 이어 6월 한국전쟁이 터지고 3개월 뒤 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넘자 트루먼은 중앙정보국(CIA) 정책조정실이 내민 잔당을 동원한 중국 군사력 분산 계획안을 승인했다. 시아이에이는 곧장 오퍼레이션 페이퍼(Operation Paper)라는 작전명 아래 비밀리에 국민당 잔당을 지원했고 버마 국경에 진치고 있던 리미 장군의 윈난반공구국군과 뤼궈취안 장군의 제26군이 윈난성으로 쳐들어갔다. 여전히 한국사의 공백으로 남아 있는 한국전쟁 제2전선이 그렇게 한반도에서 3000㎞나 떨어진 버마-중국 국경에 펼쳐졌다. 미국의 중국봉쇄정책(China Containment Policy)은 그렇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태어났고, 그 최초 충돌지가 바로 버마전역이었다.

그러나 비밀전쟁, 대리전쟁, 고강도전쟁 성격을 지녔던 미국의 제1기 버마전역 작전은 중국봉쇄도 한국전쟁 제2전선도 모두 실패로 끝났다. 버마의 우누 총리 정부는 미국의 국민당 잔당 지원에 불만을 품고 1953년 경제협력협정을 파기한 뒤 유엔에서 타이완과 미국 비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버마는 대신 중국과 경제·군사 협력을 맺으면서 급격히 중국 쪽으로 기울었다. 그로부터 중국은 버마전역에서 정치, 경제, 군사적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버마에서 중국과 미국 충돌이
새로운 일인 양 호들갑 떨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 태어난
미국의 대중국 봉쇄정책의
첫 충돌지가 1950년 버마였다

중국 둘러싼 나라 중 유일하게
미국과 군사훈련 않는 버마는
양국 모두가 눈독들이는 전략지
중국 의존 높은 버마에서 미국은
무장투쟁 지원하며 때를 기다려

제2기 버마전역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 장군이 중립과 반외세(서구)를 바탕 삼은 폐쇄적인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건데다 냉전이 극에 달했던 그 기간 동안 인도차이나전쟁에 매달린 미국이 버마전역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탓이다. 미국은 제2기 버마전역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마약퇴치를 앞세운 인도주의 원조와 시아이에이를 동원한 버마군 특수훈련 제공으로 명맥을 이었다.

중국도 제2기에서는 냉담기를 맞았다. 버마 정부가 그동안 버마공산당(BCP)을 지원해온 중국과 틀어진 탓이다. 네윈이 암암리에 반중국 정서를 퍼뜨리던 가운데 1967년 반중국 폭동이 터져 중국계 수백명이 살해당했고 10만여명이 버마를 떠났다. 중국이 그 폭동 배후로 버마 정부를 지목하자 네윈은 1967~1970년 사이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극단으로 맞섰다. 그러다 1973년 버마공산당과 소수민족 샨주군(SSA)이 손잡은 데 이어 카렌민족해방군(KNLA)까지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자 위기감을 느낀 네윈이 베이징을 방문해 상호불가침협정을 체결했고 이어 1978년 덩샤오핑이 랑군을 방문해 버마공산당 지원을 철회하면서 두 나라는 다시 손을 잡았다. 이 기간 동안 국제 외톨이가 된 버마는 거대한 이웃 중국의 협조 없이는 국내 정치 안정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중국은 소수민족이 지배하는 버마 국경과 맞댄 지정학적 조건을 활용하며 버마전역 현상 유지에 주력했다.

승복혁명 이후 정면돌파 시도한 미국

제3기 버마전역에서는 미국이 저강도전쟁으로 중국의 패권에 도전했다. 8888 민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버마 군사정부를 향해 국제사회가 경제제재로 압박하는 동안 중국은 국제정치와 자본이 빠져나간 버마를 메워 나가며 버마전역에서 승기를 잡았다. 중국은 버마에 무기를 제공하는 한편 안다만해의 버마령 코코섬과 인도양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관문인 틸라와를 비롯한 4곳에 해군기지를 건설해 미국과 인도를 겨냥할 수 있는 군사거점을 마련했고 동시에 오일과 가스 수송로를 확보했다.

이 시기 버마는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는 소수민족해방·민주혁명 세력들의 무장투쟁이 격렬해지면서 내전상태로 빠져들었다. 미국은 경제봉쇄와 더불어 국경 무장세력들을 지원하고 버마 내부에서 대중 봉기를 일으키는 전형적인 저강도전쟁 전략을 통해 버마전역 점령에 시동을 걸었다. 1990년대 들어 국경에는 미국 국무부와 시아이에이뿐 아니라 공화당과 민주당 관련 단체들 돈줄까지 흘러들었다. 방콕 주재 미국대사관과 시아이에이를 통로로 삼았던 그 시절 국경전선에는 온갖 스파이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 무렵 한동안 국제사회에서는 유엔군의 버마 투입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버마전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될 중국을 의식하며 침묵했다. 워싱턴 정가에서 소비에트 해체와 동구권 붕괴로 국제정치판이 불안정한 가운데 경제적으로 부상하던 중국을 잠재적 동반자로 보자는 흐름이 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2001년 9·11 공격사건 뒤 미국이 테러와 전쟁을 선언하고부터 한동안 잠잠했던 버마전역은 2007년 들어 다시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해 9월 승려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 이른바 승복혁명에서부터 미국의 저강도전쟁이 불을 뿜었다. 승복혁명을 이끌었던 전버마승려동맹(ABMA) 지도자 감비라는 거사 전 타이 국경으로 빠져나와 민주개발네트워크(NDD)를 비롯한 버마 망명정치조직들과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다시 버마로 돌아가 시위를 끌어냈다. 그 망명단체들은 미국 정부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재정 지원을 받아왔고 승복혁명 때 통신장비들을 버마로 반입해 국제사회에 실시간 시위 중계를 했던 주인공들이다. 2008년 들어 미국 정부는 버마 군사정부와 관련된 모든 재산을 동결해 워싱턴 주재 버마대사관까지 마비시켰다.

미국은 승복혁명을 기점으로 버마전역에서 보이지 않는 손과 정면 돌파라는 양동작전을 통해 치밀한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버마 군부가 2008년 신헌법 제정 국민투표와 2010년 총선을 치르는 동안 미국은 2009년 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의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버마와 건설적인 관계 설정 가능성을 처음 입에 올렸고 곧바로 워싱턴과 네피도는 물밑 접촉을 시작했다. 동시에 미국은 2010년 11월 초 총선 일주일을 앞두고 소수민족 연합체인 버마연방의회(UBP)라는 정치조직과 비상연방동맹위원회(CEFU)란 군사동맹체 결성을 비밀스레 지원하면서 버마 군부를 압박했다. 앞선 10월 소수민족 대표들이 워싱턴에 갔다 온 뒤 타이 북부 치앙마이에 사무실을 열었고 시아이에이 통신 전문 요원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곧장 까렌민족해방군 전선에는 첩보용 카메라를 비롯한 특수장비들이 깔렸다. 랑군 주재 미국대사관에서는 시아이에이와 국가안보국(NSA)이 버마의 통신네트워크를 도청했다. 버마전역의 중국 패권이 소리 없이 금가기 시작했다.

양국의 버마 집착이 낳을 비극

제4기 버마전역은 50년 동안 세계 최장기 군사독재 기록을 이어오면서 사회경제적 파탄 상태에 빠진 버마 군부가 2011년 테인 세인 준군사(quasi-military)정부를 앞세워 변화란 카드를 들고 미국과 흥정하면서부터 출발한다. 버마 정부를 손에 쥔 미국의 강공책에 중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국의 버마 투자가 급락하며 위기감을 반영했다. 2008~2011년 120억달러였던 투자가 2012~2013년 4억700만달러로 곤두박질쳤다. 그 과정에서 버마 정부는 중국과 맺었던 밋손댐, 시노-미얀마 가스오일 파이프라인, 럿빠다웅 구리광산 같은 대형 계약들을 중단했고 중국은 전략적으로 공들여 왔던 에너지 자원개발 사업에 치명타를 입었다.

이 제4기 버마전역은 지난 60년 동안 비밀작전에 치중해 왔던 미국이 공개작전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제 비로소 시야에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들어왔고 그래서 국제 언론들은 마치 새로운 일이라도 터진 양 난리를 피웠던 셈이다. 미국 국방부는 2010년 공해전(Air-Sea Battle) 전략을 채택하면서 중국통합팀(CIT)을 설치해 잠재적 적이 중국임을 분명히 했다. 2011년 오바마가 ‘태평양 세기’에서 말한 미국의 아시아 복귀나 힐러리 클린턴이 정리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추축전략’(Strategic Pivot)도 모두 중국을 목적타로 삼았다. 그 공-해전 전략과 추축전략이란 것들이 전략으로 보기 힘든 개념 수준에 지나지 않는데다 아시아 복귀론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뒤 아시아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게 아니지만 중국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2012년 오바마의 버마 방문으로 미국은 버마와 합동군사훈련을 포함한 군사협력 방안에 합의했다. 중국 정부는 그 모두를 미국의 중국포위(encircle China) 전략이라며 반발했다. 실제로 미국은 중국을 둘러싼 모든 나라들과 합동군사훈련을 해왔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군사기지에 33만 병력을 주둔시켜 왔다. 그동안 딱 한 곳이 구멍 나 있었다. 바로 버마였다. 미국이 버마전역에 집중해온 까닭이다. 바꿔 말하면 중국은 유사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자 에너지 보급선이 걸린 최고 전략지가 버마란 뜻이다. 중국이 결코 버마를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이다. 국제정치에서도 외교에서도 심지어 군사에서도 숨통만은 열어주는 게 관례다. 폭발점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다. 미국의 버마전역 강공책이 위험한 까닭이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켜낼 만큼 몸집을 불렸다. 제4기 버마전역 앞날에 짙은 어둠이 드리우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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