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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1.22 19:17 수정 : 2013.11.23 10:12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⑪ 타이-캄보디아 영토분쟁

꽤 오래된 이야기지만 방콕 커피숍에 앉은 예닐곱 외신기자들이 열대과일 망고를 놓고 느닷없이 핏대를 올린 적이 있다. 타이·필리핀·인도·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출신 기자들이 서로 제 나라 망고가 맛있다고 우긴 끝에 얼굴을 붉힌 사건이었다. 다들 진보적 논조를 지닌 이들인데 농담으로 시작한 망고를 놓고 나라를 들먹이는 걸 보면서 크게 놀랐다. 그로부터 나는 ‘망고내셔널리스트’라는 말로 그 친구들을 놀려왔지만, 사실은 내 속에 든 ‘복숭아 맛’을 일본이나 중국 친구들 앞에서 과연 순순히 포기할 수 있을까 되묻곤 했다.

망고니 복숭아 같은 이런 육질적 민족주의가 쉽사리 국제정치판 제물이 되는 꼴을 봐오면서도 내 입맛의 기억은 심심찮게 머리와 심장을 따로 놀게 만든다. 직업상 국제관계 속에서 내 입맛이 걸린 사안까지 다뤄야 는 외신기자들은 그래서 내남없이 괴로울 때가 많다. 외신판 이야기를 꺼낸 건 타이-캄보디아 국경선 분쟁을 오늘 화두로 잡고 보니 두 나라 외신에서 뛰는 친구들이 떠오른 탓이다. 내친김에 전화를 걸었다. <교도통신>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친구 푸이 끼아는 “우린 늘 국적과 직업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들이잖아. 프놈펜 쪽 안보가 걸린 군사배치 같은 걸 어디까지 올릴 건지 고민중”이라며 긴 한숨을 뿜었다. <네이션>에서 외신을 만지는 타이 친구 수팔락 깐차나쿤디는 “내가 타이 사람이라고 타이에 이롭게 사실을 꾸밀 수 없듯이 균형 잡는 게 숙제고, 싸움질 못하도록 평화, 평화 외치는 게 우리 몫”이라며 웃었다. 여차하면 매국노니 반역자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이미 수없이 들어온) 두 친구는 이웃을 적으로 삼는 폭력적인 민족주의가 가장 골칫덩어리라고 입을 모았다.

딘 애치슨 내세운 캄보디아 법률단

지난 11월11일로 돌아가 보자. 제네바 국제사법재판소(ICJ) 소장 페테르 톰카가 이끈 17인 재판정은 만장일치로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 판정에 따른 프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을 낀 영토 주권은 캄보디아 몫이다. 타이는 그 영토로부터 군인·경찰·수비대·관리인을 철수하라”고 판결했다. 900년 묵은 힌두사원 둘레 땅을 놓고 타이와 캄보디아가 벌인 분쟁에서 기대했던 솔로몬의 판결은 없었다. 게다가 국제사법재판소는 캄보디아 정부가 제소했던 프레아 비헤아르(타이명 쁘라삿 프라 위한·Prasat Phra Wihan) 사원 아래 언덕 프놈 트라프(타이명 푸 마케우)를 낀 4.6㎢ 분쟁 영토에 대한 주권 판결 없이 “캄보디아와 타이는 국제사회와 협력해 세계문화유산 지역을 보호하라”는 훈수로 때워 여전히 불씨를 남겨 두었다.

그 판결문 해석에서만큼은 온갖 솔로몬이 등장했다. 제네바에서 타이 외무장관 수라퐁 또위짝차이꾼은 “두 나라 모두 받아들일 만한 판결이었다”며 윈윈을 강조했고, 캄보디아 외무장관 호르 남홍은 “아주 좋은 결과다. 만족스럽다”며 에둘러 승리감을 드러냈다. 잉락 친나왓 타이 총리는 판결이 나자마자 방송을 통해 “두 나라가 협상하되 타이 주권은 보호될 것이다. 국경은 우리 군대가 잘 통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훈 센 캄보디아 총리는 “중대한 진보다.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판결이다. 우리는 서로를 긴장시킬 어떤 자극적인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서를 날렸다. 어감은 다르지만 두 정부가 평화와 협상을 내세우며 저마다 승리를 강조한 셈이다. 그리고 현재 국경은 고요하다. 두 쪽 다 군대를 움직일 조짐은 없다.

국제사법재판소는 11월11일
‘프레아 비헤아르’ 주변 영토가
캄보디아 땅이라고 판결했다
타이군 주둔·옛 지도의 존재나
‘실효적 지배’는 중요치 않았다 

민족주의를 내세운 정치 탓에
양국은 심심찮게 부딪쳐왔고
국경 무력 충돌까지 일어났다
평화공존을 가르치지 않는 한
영토분쟁은 피를 부를 수 있다

민족주의를 내건 우익 세력들도 해석에 동참했다. 캄보디아 공보장관 키우 칸하리트는 “모든 국민의 승리고 캄보디아 정부의 정치적 성숙에 대한 보답이었다”고 자찬했다. 방콕 쪽 우익 역사학자 텝몬뜨리 림빠파욤은 “이번 판결로 타이가 영토를 잃었는데 정부가 그 속뜻을 숨기고 있다. 1962년 판결은 사원만 캄보디아 소유라고 했지 그 주변을 포함하지 않았다”며 정부가 모든 진실을 밝히라고 압박했다.

이쯤에서 관전평이 빠질 수 없다. 1962년과 2013년 두 차례 국제사법재판소를 찾은 타이-캄보디아 국경선 분쟁에서 두 가지를 눈여겨볼 만하다. 하나는 영토 분쟁에서 흔히 말해온 ‘실효적 지배’니 ‘옛 지도’ 같은 것들이 결정적 단서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1962년 판결 무렵 프레아 비헤아르는 타이 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타이 정부는 온갖 옛 지도와 자료를 들이댔다. 결과는 캄보디아의 손이 올라갔다. 다른 하나는 법률단 구성의 중요성이다. 1962년 캄보디아 법률단을 이끈 변호사가 제2차 세계대전 뒤 냉전기를 쥐고 흔들었던 미국 전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었고 캄보디아를 식민지배하며 국경 지도를 그렸던 프랑스가 뒤를 받쳤다. 타이는 국제사회에 생소한 영국 정치인 프랭크 소스키스를 법률단 대표로 내세웠다. 타이는 국제사법재판소가 유엔 산하 기구고, 그 유엔은 예나 이제나 미국이 쥐락펴락해 온 국제 정치 도구란 사실을 놓쳤던 셈이다. 타이는 졌다. 2013년을 보자. 타이는 제네바 주재 자국 대사를 대표로 미국과 프랑스 학자들을 동원한 대규모 법률단을 꾸렸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이번에 싱가포르-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영토 분쟁 변호를 맡았던 전문적인 다국적 로펌인 에버셰즈를 앞세웠다. 캄보디아는 다국적 로펌들이 지배하는 달라진 세상을 꿰뚫어본 셈이다. 캄보디아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만약, 영토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면서 세계적인 다국적 전문 로펌으로 진용을 짠 뒤 미국 전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을 법률단 얼굴로 내세우는 나라가 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훈 센 총리와 반탁신 진영의 정치적 속셈

타이와 캄보디아는 그동안 민족주의를 내세운 정치 탓에 심심찮게 충돌해 왔다. 그 좋은 본보기가 2003년 1월 프놈펜 폭동이다. 방콕 쪽 한 배우가 “캄보디아가 훔쳐간 앙코르와트를 타이에 돌려주지 않는 한 캄보디아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기사가 캄보디아 언론에 퍼지면서 시민들이 타이 대사관을 불태운 사건이었다. 그 무렵 10여일 동안 이미 폭동 조짐을 보였지만 캄보디아 정부는 손을 놓았고 타이대사관이 불타는 동안에도 바라보기만 해 정치적 배경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방콕에서도 수많은 이가 캄보디아대사관을 에워싼 채 난동을 부렸다. 이렇듯 두 나라 사이에는 소문만으로도 폭동이 일 만큼 도발적인 민족주의 기운이 흘러 왔다. 2008년엔 캄보디아 정부가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자 타이 정부와의 사이에 정규군을 동원한 무력 충돌이 이어졌고 2011년까지 군인과 시민을 포함해 사망자 41명과 중상자 200여명이 발생했다.

저명한 타이 역사학자 찬윗 까셋시리는 “프레아 비헤아르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역사적으로 크메르(캄보디아 왕국)가 만들었고, 법률적으로 1962년 판결이 캄보디아로 났다. 민족주의를 내세운 방콕과 프놈펜 정치인들 다툼에 국경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꼴이다”라며 현실을 보라고도 했다. “선동하는 정치세력 빼고 보통 시민들 사이에 관심 가진 이들이 거의 없지 않는가.” 무력 충돌 배경이 두 정부의 정치적 속셈이란 뜻이다. 실제로 캄보디아 총리 훈 센은 2006년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 친나왓 전 타이 총리를 경제고문으로 임명해 방콕 쪽 군부와 반탁신 진영을 자극해 왔다. 2008년 캄보디아 정부가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리겠다고 밝히자 반탁신 우익민족주의 단체인 민주민중동맹(PAD)은 탁신이 훈 센과 결탁해서 타이 영토를 팔아먹었다고 외치며 국경으로 몰려가 거칠게 항의했다. 두 나라 관계는 2008년 12월 타이에서 반탁신 군부 지원을 받은 민주당(DP)의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등장하면서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소규모 총격전이 벌어지던 국경은 2009년부터 유탄발사기가 등장하더니 2011년 들어서는 120㎜ 포 같은 중화기를 동원한 무차별 포격전으로 달아올랐다. 캄보디아군은 타이 국경에서 11㎞ 떨어진 품사론마을에까지 포격을 해댔고 타이군은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으로 직격탄을 날려 유적에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렇게 무력 충돌이 시작된 2008년은 두 나라 모두 격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방콕 쪽은 반탁신 군부 기운을 업고 집권한 민주당이 취약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프놈펜 쪽은 캄보디아인민당(CPP)을 끌고 장기 집권해 온 훈 센이 그해 총선을 노려 저마다 민족주의에 불을 붙여 결국 국경 충돌로 이어졌다. 그 무력 충돌이 2011년 8월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총리로 등장하면서 잠잠해졌다는 사실을 되짚어볼 만하다.

그러나 두 정부 사이 앞에 놓인 협상이 순조로울 것 같지 않다. 캄보디아 내각자문회의 대변인이자 프레아 비헤아르 사안을 맡아온 파이 시판은 인터뷰를 통해 “타이가 일방적 지도를 들이대며 도발했을 뿐 영토 분쟁은 없다. 이미 1904년, 1907년 쌍방 합의한 지도로 1908년에 국경선을 그었다. 또 1946년 워싱턴협정과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이 있다. 국제법을 따르면 되고,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밝혀 협상 가능성을 닫아버렸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강한 민족주의 기운을 뿜어온 방콕 쪽이 호락호락 물러나리라고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두 나라 정치 상황에 따른 지루한 ‘협상’과 ‘포격전’이 되풀이되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분쟁뿐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어림잡아 200여개 웃도는 영토 분쟁 지역이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만도 70여개에 이른다. 편협한 민족주의를 걷어내고 평화공존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한 이 분쟁들은 대를 이어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일 것이다. 정치에 주눅 든 타이 불교판에서 거침없이 내질러온 끼띠삭 끼띠소파노 스님 말을 귀담아들어볼 만하다. “처음부터 나라를 가르는 지도란 게 어디 있었나. 세상 만물이 변하는데 지도라고 변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그깟 지도란 건 다시 그리면 그뿐이야. 사람을 중심에 놓고 지도를 그리란 말이야.” 그 옛날 식민 종주국들이 그려놓고 달아나버린 그 국경선에 언제까지 목을 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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