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가운데)과 만난 달라이 라마(오른쪽).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에서 반중국 항쟁이 거세게 타오르던 1959년 인도로 망명한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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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3> 달라이 라마(하)
나는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20년 넘게 전쟁을 취재하면서 늘 ‘공격 당하는 쪽에서 취재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이건 피지배자, 소수, 약자 쪽에서 역사를 보겠다는 뜻이었다. 티베트 사안에서도 티베트인의 자결권을 절대적 가치로 여겨 중국의 무력정책이나 유혈통치를 비난하면서 티베트인의 자유 투쟁을 지지해왔다. 그럼에도 티베트의 상징인 달라이 라마를 이전 글에서 비판적으로 다뤘던 까닭은 역사적으로 달라이 라마라는 신정체제가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절대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티베트인들 사이에서도 달라이 라마의 친족이나 연줄에 따른 소수 엘리트들이 독점해온 정치체제에 싫증을 느낀 이들이 없지 않았다. 티베트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청년회의(Tibetan Youth Congress)를 비롯한 젊은층에선 달라이 라마의 독립 포기와 무장투쟁 부정에 관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라는 압도적인 체제가 만들어온 눈길 대신 시민의 눈으로 티베트를 보고자 했다.
티베트 요원,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투입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대티베트 비밀작전으로 들어간다. 1998년 10월1일 티베트 망명정부는 공식 성명서를 통해 “1960년대 시아이에이로부터 연간 170만달러를 받아 의용군 훈련과 게릴라작전 비용으로 썼다. 달라이 라마가 받았던 연간 18만달러는 제네바, 뉴욕 사무실 설치와 국제 로비자금으로 썼다”고 밝혔다. 이처럼 시아이에이 비밀작전은 티베트 망명정부뿐 아니라 미국 정부 문서와 당시 작전에 투입되었던 요원들을 통해 다양하게 알려져 왔으나 여전히 일부에서는 중국 정부의 흑색선전이라고 되받아치며 논란이 되어온 대목이다.
역사를 잠깐 보자. 1950년 3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캄 지역에 진입했고 10월 들어서는 라싸를 비롯한 티베트 전역을 공격했다. 그 1950년엔 국제사회 눈길이 한국전쟁으로 쏠리면서 미국 정부조차도 중국의 티베트 침공을 초기에 감지하지 못했다. 미국 국무부는 7월 초 인도대사 로이 헨더슨을 통해 “미국 정부가 중국 공산주의자의 티베트 침략에 맞서고자 티베트 정부에 비밀 지원을 약속한다”는 내용을 달라이 라마 최측근인 샤캅파에게 전하도록 했다.(Department of State cable, July Ⅱ, 1950) 그 무렵 시아이에이는 인도의 델리와 캘커타(현 콜카타) 지부를 통해 달라이 라마의 형 걀로 톤둡을 비롯한 달라이 라마 측근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어 1951년 1월 초 달라이 라마가 인도의 시킴과 국경을 맞댄 야둥에 도착하면서부터 그의 망명을 놓고 미국 정부가 나섰다.
미국 정부는 인도·타이·스리랑카와 같은 아시아 불교국가로 달라이 라마를 망명시켜 중국 공산주의의 아시아 확장을 봉쇄하는 상징으로 삼겠다는 전략 아래 3월 들어 헨더슨을 통해 불교국가인 스리랑카로 피신하길 원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5월 달라이 라마는 캘커타 미국 영사관으로 인편을 보내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지? 망명한 뒤 미국 정부가 티베트의 무장투쟁 세력들에게 무기를 제공할 수 있는지?’와 같은 조건들을 타진했다. 그러나 7월16일 중국 정부의 티베트 책임자 장징우 장군이 야둥으로 찾아와 대화를 나눈 뒤 달라이 라마는 라싸로 되돌아갔다. 그 뒤 9월28일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는 점과 티베트 정부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17개항 협정’에 마오쩌둥과 달라이 라마 특사가 서명하면서 1911년 청조의 붕괴와 함께 13대 달라이 라마가 선언했던 독립국 티베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1954년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해 부상무위원장이 되었고, 1955년 3월 티베트 자치정부를 구성할 티베트자치지역최종설치준비위원회(PCART) 설치안에 서명했다. 1956년 4월22일 라싸의 포탈라궁 아래서 달라이 라마와 마오가 파견한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설치준비위가 공식 출범함으로써 티베트는 중국의 자치구가 되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망명 뒤, 앞선 ‘17개항 협정’이 강박상태에서 체결되었고 자신의 도장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해 왔다.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캄·라싸 등 티베트 전역 공격
당시 한국전쟁 신경쓰느라
이를 제때 감지 못한 미국은
티베트 정부에 비밀지원 약속 “CIA 지원은 중국에 저항하는
이들의 사기를 높여줬지만
미국은 냉전 전술을 놓고
자신들 사안에 개입했을 뿐
티베트를 도운 게 아니었다” 달라이 라마의 협상을 통해 티베트의 정치적 지위가 결정되는 동안, 1952년 12월 캄 지역 사업가 곰포 타시는 부족들을 모아 신앙수호자민족군(NADF)-티베트 무장투쟁을 이끈 추시 강드룩(Chushi Gangdruk)의 전신-을 조직해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이때부터 시아이에이의 대티베트 비밀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57년 2월 말 달라이 라마의 형 걀로 톤둡은 인도의 칼림퐁에서 티베트인 6명을 선발해 미국으로 보냈고 이들은 특수훈련을 받은 뒤 10월과 11월 각각 티베트 본토로 공수되었다. 그로부터 시아이에이는 세인트서커스라는 작전명 아래 1965년까지 티베트인 259명(추정)을 콜로라도의 캠프 헤일에서 훈련시켜 티베트 비밀작전에 투입했고 무기와 장비 325t을 추시 강드룩에 공수했다. 한편 1960년 중국 정부의 강공에 밀린 추시 강드룩은 티베트를 떠나 네팔의 무스탕 자치지역으로 진영을 옮기면서 간헐적인 전투로 명맥만 이어갔다. 시아이에이는 1969년 공식적으로 티베트 비밀작전을 종료했다. 그 무렵 이미 워싱턴과 베이징은 국교 정상화를 놓고 물밑 접촉을 시작했고 1972년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으로 이어졌다. 이어 1974년 무스탕에 진을 쳐온 추시 강드룩이 중국 정부의 압력을 받은 네팔 정부의 공격을 받아 해산당하면서 결국 티베트 무장투쟁은 끝났다. 시아이에이가 티베트 본토 비밀작전을 종료했지만 그들이 뿌려놓은 씨앗은 인도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시아이에이는 1962년 중국과 국경 마찰을 빚고 있던 인도 정보국(IB)-이후 조사분석국(RAW)-의 특수국경군(SFF) 창설을 지원하며 여전히 티베트인을 이용한 대중국 봉쇄전략을 이어갔다. 흔히 ‘이스태블리시먼트 22’(Establishment 22)로 불린 이 특수부대는 주로 티베트 난민촌에서 젊은이들을 뽑아 인도군 관리 아래 시아이에이로부터 항공과 군사훈련을 지원받는 극비 조직으로 태어났다. 초기 이스태블리시먼트 22는 중국 국경을 넘나들며 정보 수집에 동원되기도 했으나 결국 인도의 용병이 되고 말았다. 1971년 11월 인도 정부는 이스태블리시먼트 22의 티베트 요원 2천여명을 동파키스탄군으로 위장시켜 치타공 전투에 투입했다. 이른바 인도-파키스탄 전쟁이었다. 그 전쟁을 통해 인도를 끼고 동서로 나뉘어 있던 파키스탄은 서쪽 파키스탄과 동쪽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했다. 대중국 공격이라는 열망을 품고 이스태블리시먼트 22에 참가했던 티베트인들은 중국과 아무 상관 없는 남의 나라 전쟁에서 56명이 전사했고 190여명이 중상을 입으면서 어두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도 이스태블리시먼트 22는 1984년 시크교도들이 장악했던 골든템플 진압작전, 1999년 파키스탄과 충돌했던 카르길 전쟁에 투입되었다. 그럼에도 인도 정부와 티베트 망명정부는 이스태블리시먼트 22에 대해 지금껏 두터운 장막을 쳐 그 규모마저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이스태블리시먼트 22를 지휘했던 티베트인 가운데 한명인 다폰 라툭은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이스태블리시먼트 22는 인도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오직 중국 공격을 목표로 창설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참전 명령은 다람살라의 중앙티베트행정부(망명정부) 보안국으로부터 받았다. 보안국은 선택 여지가 없다. 인도를 위해 참전하라고 했다.”(클로드 아르피, 인터뷰, 2012) 누가 그 아픈 역사를 책임질 것인가 이렇듯 본디부터 대중국 봉쇄에만 초점을 맞췄던 시아이에이의 비밀작전은 티베트 독립투쟁 지원과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달라이 라마도 “시아이에이 지원은 중국에 저항하는 이들의 사기를 높였지만 그 저항에서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정부는 중국에 대항하는 냉전 전술을 놓고 자신들의 사안에 개입했을 뿐 티베트를 도운 게 아니다”(존 케네스 크나우스, 인터뷰, 1995)라고 했듯이,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그 결과를 보는 시각이 엇갈린다. 케네스 콘보이와 제임스 모리슨 같은 이들은 “시아이에이 교신이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길을 도왔고, 시아이에이가 티베트 망명정부 설치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고, 시아이에이가 지원한 무장세력 존재가 난민촌에 큰 희망을 주면서 결국 티베트 망명정부의 생존과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바탕이 되었다”(
바로잡습니다 2013년 7월13일치 이 칼럼에서는 “(달라이 라마는)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에 입도 뻥긋한 적이 없다”고 썼으나, 그가 전쟁과 관련해 미국에 대한 비판적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한 사례가 있어 바로잡습니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1998년 애플컴퓨터 광고에 등장한 것은) 종교지도자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도 지금까지 유일하게 기업광고에 얼굴을 내민 사건이었다”고 쓴 바 있으나, 이 대목 역시 당시 애플컴퓨터 광고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틴 루서 킹(1963년), 넬슨 만델라(1993년)가 출연한 바 있어 사실이 아니기에 바로잡습니다. 아울러 칼럼에서 달라이 라마의 사생활을 언급한 부분에 대해 적대자들의 비방을 일방적으로 옮겨 달라이 라마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독자들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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