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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16 20:19 수정 : 2018.04.16 20:19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일 오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제주/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일 오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제주/청와대사진기자단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한겨레>와 <중앙일보>가 함께 구성한 지면으로 두 언론사의 사설을 통해 중3~고2 학생 독자들의 사고력 확장에 도움이 되도록 비교분석하였습니다.

[한겨레 사설] “4·3 완전한 해결” 천명한 문 대통령의 단호한 과거사 행보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제주 4·3 70년 추념식에 참석해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현직 대통령의 추념식 참석은 12년 만이다. 2014년 국가추념일로 지정됐지만 그늘에 묻힌 부분이 적잖은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석해 명확한 입장을 밝힘으로써 4·3은 새 전기를 맞게 됐다.

문 대통령은 이날 “70년 전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4·3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 예술인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했다. 무장세력 수백명을 이유로 당시 제주 인구의 10%가 희생된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국가폭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한다.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못박았다. 문 대통령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유해 발굴, 배상·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뒤를 이은 것이다. 김 전 대통령 시절인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됐고, 2003년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55년 만에 4·3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이후 보수 정권 9년간 대통령의 추념식 참석은 한 차례도 없었고 명예회복도 진전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4·3 추념식을 두고 “좌익 폭동에 희생된 양민의 넋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말했다. 4·3이 이념 문제가 아니라 무자비한 국가폭력의 문제라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제1야당 대표가 시대착오적 색깔론을 되풀이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문 대통령은 5·18, 4·3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단호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지난해 정권교체 이후 첫 5·18 기념식에 참석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헌법 전문 수록 등을 약속했다. 이번에 4·3에 대해서도 단호하고 진일보한 태도를 보였다. ‘촛불 정권’의 자신감이 읽히는 대목이다. 5·18과 4·3 등 아픈 과거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는 시효가 없다. 늦었더라도 잘못됐다면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4·3 70년을 맞아 제주에도 ‘온전한 봄’이 오길 기대한다.

[중앙일보 사설] 70주기 4·3사건, 이제 국민 통합의 출발점 돼야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70주년 추념식에서다. 대통령은 또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70년 세월이 흘렀지만 4·3을 둘러싼 갈등이 현재진행형이란 점에서 의미 있는 다짐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인 제주 4·3은 군경에 의한 대량 양민 학살이란 뼈아픈 과오를 남긴 사건이다. 대규모 진압 과정에서 당시 제주 인구의 10%가량인 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래서 진보 진영은 국가권력의 무자비한 토벌에 주목해 ‘항쟁’이나 ‘학살’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보수 진영에선 성격 규정 자체가 다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좌익분자들의 폭동’에 무게 중심이 있다. 일부 극우단체들은 국가기념일 지정에 대해 ‘남로당의 무장봉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어제 ‘남로당 좌익 폭동에 희생된 제주 양민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라고 주장했다.

4·3 추념식엔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했지만 이후 두 번의 보수 정권에선 현직 대통령이 방문하지 않았다. 분열과 불신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70주년을 맞은 4·3이 더 이상 진보와 보수 간 이념 대결의 대상에 머물러선 안 된다. 이젠 치유와 화해를 통해 국민 통합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서로 손을 내밀고 보듬어 안아야 한다.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에 이어 공식 사과문까지 발표된 과거사를 놓고 언제까지나 이념의 틀에 갇혀 삿대질만 계속하는 건 통합 시대에 역행하는 퇴행일 뿐이다.

[논리 대 논리]

한겨레 “늦었더라도 진상 밝히고 책임 물어야”…중앙 “치유와 화해 통해 국민 통합 출발점 돼야”

단계 1 공통 주제의 의미

지난 3일,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 4·3 사건 70주년 추념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후보 시절 공약이었던 “4·3 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다시 한 번 약속했다. 이에 대해 한겨레와 중앙일보는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중앙은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한 뒤 “70년 세월이 흘렀지만 4·3을 둘러싼 갈등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다짐”이라고 정부의 노력을 높이 산다. 한겨레도 똑같은 발언을 인용하며, “촛불정권의 자신감이 읽히는 대목”으로 “5·18과 4·3 등 아픈 과거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는 시효가 없다”고 강조한다.

단계 2 문제 접근의 시각차

하지만 4·3 사건을 어떻게 ‘완전하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는 두 사설의 주장이 엇갈린다. 한겨레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발언을 지적하며 “시대착오적 색깔론”이라고 비판한다. 홍 대표는 4·3 추념식을 “좌익 폭동에 희생된 양민의 넋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규정하며,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제주 양민들이 무고한 죽음을 당한 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좌익 무장 폭동이 개시된 날이 4월3일”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하지만 한겨레는 4·3의 본질은 “무장세력 수백명을 이유로 당시 제주 인구의 10%가 희생된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국가폭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3월1일부터 1954년 9월21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부군에 맞선 무장 세력은 500명 규모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민간인 희생자는 최소 1만4232명에서 많게는 3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4·3 사건의 성격이 어떻건 간에, 국가가 자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한겨레는 “늦었더라도 잘못됐다면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단계 3 시각차가 나온 배경

반면, 중앙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보다는 국민 통합과 화해에 방점을 둔다. 중앙은 4·3 사건의 성격을 놓고 “진보 진영은 국가권력의 무자비한 토벌에 주목해 ‘항쟁’이나 ‘학살’로 부르”며, 보수 진영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좌익분자들의 폭동”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4·3 사건의 본질은 간단치 않다.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5·10 단독선거 반대’를 앞세우며 무장봉기를 일으켜 도내 경찰지서 가운데 12곳과 우익단체 사무실을 공격한 사실만 보자면 “좌익분자들의 폭동”이라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사태의 시발점은 이보다 앞선 1948년 3월1일, “제28주년 3·1절 기념일”에 일어났던 민간인에 대한 경찰의 무자비한 발포에 있었다. 더 앞서서는 해방 이후 미군정의 실정(失政)과 우익단체들의 폭력도 사태의 원인으로 꼽힌다. 이렇듯 4·3 사건이 일어난 데는 여러 사안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앞서 중앙이 “4·3을 둘러싼 갈등이 현재진행형”이라고 적시한 이유다.

그러나 중앙은 “70주년을 맞은 4·3 사건이 더 이상 진보와 보수 간 이념 대결의 대상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보다 “치유와 화해를 통한 국민 통합”에 무게 중심을 두는 모양새다.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도 후보 경선 시절 제주도를 방문하여 4·3 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한 바 있다. 게다가 박 전 대통령은 취임식에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을 초청하여 “국민 대통합의 행보”를 보여준 바 있다. 4·3 사건의 본질이 어떻건, 있어서는 안 될 국가폭력이었다는 점에서는 보수 정권과 진보 진영 모두가 인정한 셈이다.

이미 4·3 사건 희생자 사이에 화해와 용서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문 대통령 추념사에도 나오듯,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 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이 만들어졌다. 2013년에는 민간인 피해자와 군경 피해자를 대표하는 모임인 4·3 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갈 길은 아직도 멀다. 4·3특별법안 처리와 책임자 규명 등을 둘러싼 논란이 어떻게 흘러갈지 우려되는 이유다.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추천 도서]

순이 삼촌

현기영 지음, 창비 펴냄, 2015년

1978년 발표된 ‘순이 삼촌’은 제주 4·3사건을 다룬 최초의 소설이다. 순이 삼촌은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환청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자살하고 만다. “밤에는 공비들이, 낮에는 순경이 출몰하여 폭도에 쫓기고 군경에 쫓겨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4·3의 현실과 피해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하는 작품이다.


전쟁과 인간

노다 마사아키 지음, 서혜영 옮김, 길 펴냄, 2000년

제2차 세계대전 후 ‘외상후스트레스성장애’(PTSD)로 치료받은 일본 군인은 거의 없다고 한다. 지은이는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죄책감을 지우고 무시하는 일본의 문화를 고발한다. 가학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결국 마음의 병으로 돌아온다. “죄를 죄로 받아들이는 능력”만이 건강한 삶과 사회를 회복시키는 길이다. 과거사 반성이 중요한 이유다.


[키워드로 보는 사설]

4·3 사건의 발생과 진행

‘제주 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 4·3특별법)은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1947년 3월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는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가 열렸다. 행사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하던 중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의 말에 차여 넘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군중들이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8명이 크게 다쳤다. 희생자 가운데는 초등학생과 젖먹이를 안은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은 책임자를 처벌하기는커녕, 통행금지령을 선포하고 시위 참가자 검거에 들어갔다. 이에 제주도에서는 직장인의 95%에 이르는 4만여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벌어졌다.

1948년 4월3일에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5·10 단독선거 반대’를 외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350여명 정도로 추산되는 무장대는 경찰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 등을 공격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해안선에서 5㎞ 이상 내륙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경찰국이 1954년 9월21일 한라산 입산통제 지역인 ‘금족 지역’을 전면 개방함으로써 끝났다. 이 기간 동안의 희생자는 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위원회가 파악한 숫자만도 2017년 7월25일 현재 사망자 1만245명, 행방불명자 3575명, 후유장애인 164명, 수형인 248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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