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일 오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제주/청와대사진기자단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일 오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제주/청와대사진기자단
|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
[한겨레 사설] “4·3 완전한 해결” 천명한 문 대통령의 단호한 과거사 행보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제주 4·3 70년 추념식에 참석해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현직 대통령의 추념식 참석은 12년 만이다. 2014년 국가추념일로 지정됐지만 그늘에 묻힌 부분이 적잖은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석해 명확한 입장을 밝힘으로써 4·3은 새 전기를 맞게 됐다.
문 대통령은 이날 “70년 전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4·3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 예술인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했다. 무장세력 수백명을 이유로 당시 제주 인구의 10%가 희생된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국가폭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한다.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못박았다. 문 대통령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유해 발굴, 배상·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뒤를 이은 것이다. 김 전 대통령 시절인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됐고, 2003년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55년 만에 4·3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이후 보수 정권 9년간 대통령의 추념식 참석은 한 차례도 없었고 명예회복도 진전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4·3 추념식을 두고 “좌익 폭동에 희생된 양민의 넋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말했다. 4·3이 이념 문제가 아니라 무자비한 국가폭력의 문제라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제1야당 대표가 시대착오적 색깔론을 되풀이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문 대통령은 5·18, 4·3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단호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지난해 정권교체 이후 첫 5·18 기념식에 참석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헌법 전문 수록 등을 약속했다. 이번에 4·3에 대해서도 단호하고 진일보한 태도를 보였다. ‘촛불 정권’의 자신감이 읽히는 대목이다. 5·18과 4·3 등 아픈 과거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는 시효가 없다. 늦었더라도 잘못됐다면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4·3 70년을 맞아 제주에도 ‘온전한 봄’이 오길 기대한다.
[중앙일보 사설] 70주기 4·3사건, 이제 국민 통합의 출발점 돼야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70주년 추념식에서다. 대통령은 또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70년 세월이 흘렀지만 4·3을 둘러싼 갈등이 현재진행형이란 점에서 의미 있는 다짐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인 제주 4·3은 군경에 의한 대량 양민 학살이란 뼈아픈 과오를 남긴 사건이다. 대규모 진압 과정에서 당시 제주 인구의 10%가량인 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래서 진보 진영은 국가권력의 무자비한 토벌에 주목해 ‘항쟁’이나 ‘학살’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보수 진영에선 성격 규정 자체가 다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좌익분자들의 폭동’에 무게 중심이 있다. 일부 극우단체들은 국가기념일 지정에 대해 ‘남로당의 무장봉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어제 ‘남로당 좌익 폭동에 희생된 제주 양민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라고 주장했다.
4·3 추념식엔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했지만 이후 두 번의 보수 정권에선 현직 대통령이 방문하지 않았다. 분열과 불신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70주년을 맞은 4·3이 더 이상 진보와 보수 간 이념 대결의 대상에 머물러선 안 된다. 이젠 치유와 화해를 통해 국민 통합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서로 손을 내밀고 보듬어 안아야 한다.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에 이어 공식 사과문까지 발표된 과거사를 놓고 언제까지나 이념의 틀에 갇혀 삿대질만 계속하는 건 통합 시대에 역행하는 퇴행일 뿐이다.
[추천 도서]
[키워드로 보는 사설] 4·3 사건의 발생과 진행 ‘제주 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 4·3특별법)은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1947년 3월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는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가 열렸다. 행사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하던 중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의 말에 차여 넘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군중들이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8명이 크게 다쳤다. 희생자 가운데는 초등학생과 젖먹이를 안은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은 책임자를 처벌하기는커녕, 통행금지령을 선포하고 시위 참가자 검거에 들어갔다. 이에 제주도에서는 직장인의 95%에 이르는 4만여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벌어졌다. 1948년 4월3일에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5·10 단독선거 반대’를 외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350여명 정도로 추산되는 무장대는 경찰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 등을 공격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해안선에서 5㎞ 이상 내륙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경찰국이 1954년 9월21일 한라산 입산통제 지역인 ‘금족 지역’을 전면 개방함으로써 끝났다. 이 기간 동안의 희생자는 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위원회가 파악한 숫자만도 2017년 7월25일 현재 사망자 1만245명, 행방불명자 3575명, 후유장애인 164명, 수형인 248명에 달한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