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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17 10:15 수정 : 2018.11.17 12:28

한국 연구자들의 우수 논문도 늘고 있지만 이른바 ‘약탈적 학술지’라 불리는 부실 학술지에 투고하는 논문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 국내 학문연구 생태계의 건강성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토요판] 뉴스분석 왜?
’부실 학회 와셋 사태’ 이후

한국 연구자들의 우수 논문도 늘고 있지만 이른바 ‘약탈적 학술지’라 불리는 부실 학술지에 투고하는 논문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 국내 학문연구 생태계의 건강성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많은 연구자들이 해외에서 열리는 엉터리 학회에 공적 연구비를 쓰며 참가해온 사실이 지난 7월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는 부실 학회 참가자에 대한 감사와 징계 절차에 나서 사태는 수습 국면으로 접어드는 모양새다. 하지만 학술 활동과 관련한 몇 가지 통계들은 ‘우리 학문공동체가 부실 학술 활동에 둔감하고 느슨한 게 아닌가’라는 물음을 던져준다.

‘249명의 직무윤리 위반.’

정부출연연구소 21곳과 카이스트 등 과학기술원 4곳의 연구자들이 무더기로 ‘직무윤리 위반’으로 징계를 받게 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민간 전문가로 이뤄진 ‘연구윤리점검단’이 지난 11일 발표한 징계 처분엔 대부분 주의·경고에 그쳤지만 견책·감봉도 30명, 정직·해임 등 중징계도 2명이나 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양적 성장에 가린 학계의 어두운 단면

이른바 ‘와셋 사태’는 지난 7월 시작됐다. 탐사저널리즘 매체 <뉴스타파>는 무늬만 학회이지 실상은 참가비를 챙기고 가짜 논문에도 발표 기회를 주는 ‘와셋’(WASET·세계과학공학기술학회)이라는 엉터리 국제 학회와 또 다른 부실 학회 ‘오믹스(OMICS)’에 국내 연구자들이 다수 참석한다는 사실을 처음 고발했다. 연구윤리 위반 논란은 물론이고 공적 연구비를 부적절하게 썼다는 비난이 참가자들에게 쏟아졌다. 이날 과기정통부의 징계 처분 발표는 와셋 사태에 대한 첫 조처였다. 더 많은 부실 학회 참가자들이 속한 대학(83곳, 1057명)에 대한 감사와 징계는 교육부가 총괄하는데 다음달까지 마무리될 예정이다. 와셋 사태는 점차 수습 국면으로 가고 있지만, 과연 이것으로 충분한지에 대해 물음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언론 보도에서 민낯을 드러난 국내 연구자들의 부실 학회 참가 실태는 민망한 것이었다. 한국과 독일 등 국제 탐사취재진은 실태 취재를 위해 논문 자동생성 프로그램으로 순식간에 만든 가짜 논문을 제출했다. 하지만 그들은 와셋 발표장에서 버젓이 발표 기회를 얻었으며, 독일의 일부 기자는 ‘우수논문상’을 받기도 해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부실한 학회 현장에서 취재진은 뜻밖에 한국 연구자들이 유난히 많은 기이한 현상을 확인했고, 후속 취재에서 ‘학술 활동을 빙자한 해외 여행(학빙여)’이 국내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 퍼져 있음을 발견했다.

학계의 충격은 컸다. 연구자들의 경각심을 촉구하고 제도 개선을 논의하는 과학기술 토론회들이 줄을 이었고, 연구비를 관리하는 교육부와 과기정통부는 실태 파악과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교육부와 과기정통부가 총괄을 맡고, 대학과 연구기관들은 기관별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직무윤리와 연구윤리 위반 여부를 조사하도록 했다. 한국연구재단 등은 잘못 쓰인 연구비를 돌려받는 정산 등 후속 조처를 맡았다.

해당 대학들은 요즘 한창 자체 감사를 진행하고 있다. 윤소영 교육부 학술진흥과장은 “추가로 드러난 부분도 있어 처음 알려진 83개 대학보다 조사 대상이 더 늘 수 있다”면서 “징계 권한이 대학에 있고 대학 간 징계 형평 기준을 조율하기도 쉽지 않지만 12월 말까지는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쪽은 “감사 결과에 따라 징계와 출장비 환수 등 관련 조처를 취할 예정”이라며 “앞으로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학술행사 참여 기준과 예방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대적인 감사와 징계, 연구비 회수로 이번 부실 학회 사태는 해결되는 걸까? ‘약탈적’이라 불리는 부실 학술지와 학회는 세계 무대에서 계속 늘고 있다. 더욱이 이번 일을 계기로 국내 학술지와 학회의 부실 문제도 부각되고 있다. 김해도 한국연구재단 연구정책팀장은 “일단 이번 사태를 마무리한 뒤에 전반적인 부실 학회와 학술지에 대한 후속 조처들이 모색될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교육부는 국내 학술지와 학회의 실태를 조사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지원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연구재단은 갖가지 연구윤리 이슈들에 대응하는 별도 부서를 신설하기로 했다.

부실 학술지, ‘약탈적’ 학술지:

인쇄 책자가 아니라 온라인에서 디지털 형태로 학술논문을 출판해 무료로 공개하는 학술지들이 늘어나면서, 일부에선 정상적인 논문심사 절차를 거치지 않고 손쉽게 논문을 실어주고는 그 대가로 논문 투고료를 받아 챙기는 부실한 학술지들도 늘어났다. 학술 발표와 출판 경험을 쌓으려는 연구자들의 시간, 돈, 평판 등을 ‘약탈’한다는 의미에서 ‘약탈적(predatory)’이라 부른다.

이런 약탈적 출판 행태를 본격 고발한 이는 미국 콜로라도대학 학술사서 제프리 빌인데, 그가 제시한 약탈적 출판그룹·학술지의 목록은 “빌스 리스트(Beall’s List)”로 불리며 주목받고 있다. 빌스 리스트에 오른 일부 학술지를 ‘약탈적’으로 분류하는 게 적정한지를 두고 논란을 빚기도 하지만 현재 이 목록은 약탈적 학술지 실태를 파악하는 데 영향력 있는 근거 정보로 널리 쓰인다. 약탈적 학술지와 학회들은 연구자들에게 스팸 메일을 보내거나 학회 홈페이지를 만들어 연구자들의 논문 투고와 학회 참석을 현혹하고 부추기는 ‘판촉’ 활동을 벌인다.

우리 학문연구 생태계의 건전성 지표는

사실 와셋 사태의 불씨는 학문연구 생태계의 깊숙한 곳에 이미 잠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이 몇 가지 국가 비교 통계에서 드러난다. 한국 연구자들이 부실 학술지에 발표하는 논문의 비율이 지난 몇년 새 꾸준히 높아졌으며 이제는 낯부끄러운 상위국에 오른 현실이 통계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숫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정도인 줄 몰랐거든요.”

학문연구 생태계의 건전성을 나타내는 여러 지표를 연구해온 한 정부출연연구소의 ㄱ연구원은 “부실 학술지, 즉 약탈적 학술지에 실리는 한국 논문이 얼마나 되는지를 조사하다가 그런 조사결과가 외국에서 이미 발표된 걸 알게 됐다”면서 “부실 학술지에 많은 논문을 내는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이라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 분야에서 곧잘 인용되는 러시아와 체코 연구자들의 분석 결과를 보여주었다.

먼저 러시아 고등경제대학 연구진이 지난해 러시아 학술지에 발표한 통계를 보면, 한국은 약탈적 학술지로 지목되는 부실 학술지들에 투고한 논문 건수와 비율(2015년 기준)에서 모두 다 상위국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세계 1만8000종 가량의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의 학술정보를 모은 데이터베이스 ‘스코퍼스(Scopus)’에서 ‘약탈적 학술지’ 531종을 찾아내어 거기에 실린 논문을 국가별로 분류했다. 그 결과를 보면, 스코퍼스에 등재된 부실 학술지의 논문 건수에서 한국은 인도, 중국, 미국 등에 이어 6위를, 그런 논문의 비율에선 인도, 말레이시아, 러시아 등에 이어 6위를 차지했다. 건수와 비율은 연도별로 지속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의 엉터리 학회 참가 실태
국내외 언론 탐사취재로 드러나
대학·출연연에선 대대적 감사·징계

국가 비교 통계들에서도 ‘부실’ 신호
부실 학술지 투고, 한국이 OECD 1위
논문철회 건수 세계 6위로 오명
“학문공동체 책임성 인식 필요”

※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통계 수치도 부끄러운 성적표다. 비슷한 분석 방법을 쓴 체코 과학한림원 산하 연구소(IDEA)의 보고서를 보면, 2013~2015년에 한국은 세계경제협력기구(OECD) 회원국들 중에서 약탈적 학술지 논문 비율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비율이 1% 안팎인 오이시디 평균보다 월등히 높은 5%였다.

이런 수치의 의미는 외국 연구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러시아 연구진은 “정교한 연구평가 문화가 부재한 채 ‘세계 수준의 연구대학’으로 발돋움하려고 분투하는 나라들에서 약탈적 학술지 논문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고 해석했다. 체코 연구진도 한국의 압도적 1위를 언급하면서 “기술 추격에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빠르게 성장한 연구 부문이 일부 약탈적 학술지의 덫에 빠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평했다.

물론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지표들도 많다. 연구재단이 낸 <2018 국가 연구개발(R&D) 통계 핸드북>을 보면, 과학기술 논문(SCI 등재) 편수로, 2016년 한국은 5만9628편으로 세계 12위를 차지했으며, 다른 논문들에 자주 인용되는 이른바 ‘세계 상위 1% 논문’의 비율은 2.82%로 세계 15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부실 학술지에 접근하는 한국 연구자들도 또한 늘고 있다는 것이 부실 학회 사태나 통계를 통해 확인되는 셈이다.

또 다른 어두운 지표도 있다. 단순 오류가 있거나 연구 활동에 부정이 있는 것으로 드러날 때엔 발표된 논문도 ‘철회’(리트랙션) 조처를 당하는데, 논문 철회 비율에서도 한국은 상위국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미국 전문매체 <리트랙션 워치>가 구축한 ‘논문철회 데이터베이스’의 자료를 분석한 과학저널 <사이언스>의 보도를 보면, 논문 1만편당 논문 철회 건수(2003~2016년)를 국가별로 조사한 통계에서 한국은 이란, 루마니아, 싱가포르, 인도, 말레이시아에 이어 6위(6.0편)를 차지했다.

통계들은 무얼 말해줄까? 물론 통계엔 한계가 있다. 전수 조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약탈적 학술지로 나누는 경계와 기준에도 자세히 따지다보면 모호한 측면이 있다. 논문 철회의 이유에도 단순 오류를 비롯해 여러 사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러 통계들은 한국 학문 생태계의 건전성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ㄱ연구원은 “우리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만을 찾고 알릴 게 아니라, 나쁜 전조를 보여주는 지표에도 관심을 갖고서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통계 수치가 나오는지 따져보고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탈적 학술지’ 경각심 높여야

약탈적 학술지들이 계속 늘면서 거기에 발표한 논문을 과학기술의 성과로 악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악용 사례는 학계 울타리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더러는 상품과 기업 홍보에도 나타난다. 실제로 2012년 당시 국내에서 유망한 바이오벤처의 연구진은 줄기세포 치료술의 연구결과를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다며 홍보했으나, 논문을 실은 학술지는 심사 절차가 부실한 약탈적 학술지로 지목받던 곳이었다. ㄱ연구원은 “약탈적 학술지는 연구자 사회뿐 아니라 시민 사회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약탈적 학술지로 판정할 절대기준도 없고, 부실하다는 이유만으로 퇴출시킬 마땅한 방법도 없다. 그래도 여러 방안들이 강구된다. 2016년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정상적인 논문 심사와 출판의 공정 거래를 해치고 과장광고를 한다며 거대한 약탈적 학술그룹 ‘오믹스’를 제소해 법정 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적극적 대응 사레로 꼽힌다.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은 연구기관이나 대학별로 약탈적 학술지를 식별하고 경계하도록 하는 자세한 안내서를 펴내어 알리는 활동이다. 최근 캐나다의 <약탈적 학술지와 학회 예방 가이드>를 우리말로 옮겨 배포한 한국연구재단의 김해도 팀장은 “이것저것이 약탈적 학술지라고 판정해 그 목록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약탈적 학술지의 특징이 무언지,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와 같은 정보와 방법을 안내하고 있는데,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학문연구 생태계의 건전성에 경고음이 울리지만 그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는 일은 쉽지 않다. 양적 성장과 실적 경쟁에 내몰린 탓인지, 약탈적 학술지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공공 연구비를 사용하는 개인 연구자의 도덕적 해이 때문인지는 계속 논의될 주제이다. 학문 후속세대인 젊은 연구자들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바라볼까?

대학원생인 전준하(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24)씨는 이렇게 말했다. “(부실 학술 활동이) 초기 경력의 연구자들에게 끼치는 가장 큰 문제는 실망이나 환멸로 시작해 회피나 적응으로 끝나고 이것이 세대를 이어 반복된다는 점이다. 회피를 선택한 사람들은 떠나가고 적응을 선택한 사람들이 남는다면 우리 학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부정적인 상상을 하게 된다.” 그는 “개인 일탈이나 제도의 문제만으로 돌리지 말고, 책임 있는 학문공동체 자신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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