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하고 개성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난나씨의 그림. 난나아트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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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장인 되고 싶었던 ‘난나’를 기억해주세요
▶ 2002~09년 <문화일보>에 연재돼 인기를 모은 소설 <강안남자>에 그림을 그린 이는 난나(42)씨입니다. 17년간 개성적인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난나씨의 편지는 지난 4일 지인 세 명에게 도착했습니다.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뒤였습니다. 한국에서 스스로 숨을 끊는 사람은 하루에 39명입니다. 좀더 살 만한 세상은, 살아 있기를 선택한 자들이 왜 살 수 없는 세상이었는지를 뒤늦게 듣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을까요.
“이 편지가 네게 갔을 때는 방황이 끝나 있을 거야.”
난나의 편지가 세 명의 지인에게 도착한 때는 그가 삶을 정리한 이후인 지난 4일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문화일보>가 7년간 연재한 소설 <강안남자> 등에 일러스트를 그려온 난나(본명 장하경·42)씨는 편지가 도착한 4일 낮 1시께 서울의 한 호텔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편지는 전날 오후 5시께 호텔에 체크인 하기 전 지인들에게 부친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알리는 것도, 장례식도 원하지 않는다.”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는 이런 취지의 글을 남겼다. 호텔에서 발견된 종이였다.
그의 죽음은 한순간 충동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행복해?” 난나는 삶을 마치기 2주 전 지인들에게 물었다. “어, 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지인들이 휴대전화로 난나에게 답을 보냈다.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였는지는 그가 삶을 마감했기에 알 수는 없다. 소유물을 나누었다. 짐을 정리하고 있다며 친구들에게 연락해 물건을 주었다. 평소 소중히 여기던 팝업북은 딸을 기르는 지인에게 선물했다. 지인이 팝업북을 갖고 노는 딸 사진을 전송하자 난나는 휴대전화 메시지로 말했다. “사진을 보니 행복하다.” 깨끗이 집을 청소하고 물건은 태울 것과 버릴 것으로 분류했다. 시사잡지 <시사인> 오피니언 지면과 <일간스포츠>에 연재중인 소설 <갑남을녀> 삽화를 마지막까지 마감했다. 호텔에 가기 전날인 2일 난나는 친구 김아무개(40)씨에게 휴대전화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냈다. “그림, 어때?” “색깔이 많은데 조금 빼는 게 어때?” 난나는 수정한 그림을 다시 보냈다. 그림을 받은 김씨가 답했다. “이게 더 나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세 명에게 보낸 편지
친구처럼, 자매처럼 지내던 김씨가 일상적인 메시지를 주고받은 뒤 이틀이 지난 4일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난나로부터 온 편지에는 담담한 글이 적혀 있었다. 삶을 마감하면서 친구가 해주었으면 할 일이 숫자와 함께 나열돼 있었다. 편지는 구체적이었다. 그림 마감에 차질을 빚지 않으려 <시사인> 담당기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을 정도였다.
24일자〈문화일보〉 ‘강안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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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강안남자’ 등에서
몽환적이고 모던한 그림 그린
난나 씨가 스스로 생 마감했다
고인 뜻 따라 장례는 안 치렀다 죽기 전 그에게 편지를 받았던
친구 김아무개씨는 그가 생전에
롤모델 없어 황망해했다고 전했다
일러스트로는 생계가 보장 안돼
논술학원 강사로 나섰다고 한다 난나를 기억하는 이들 난나는 본명인 장하경이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12월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평전 <미야자키,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를 쓰며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지평을 넓히려 노력했다. 숙명여대 문학 석사 학위와 박사 수료 또한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2009년 숙명여대 교환연구원으로 1년간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SOAS)에 다녔고 영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외국에서 활동하려 했으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거기서 언니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가능성을 본 거죠. 영국에선 일러스트레이터 지원도 많이 있고,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는다고요. 그런데 예술가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니 비자가 안 나오기도 하면서 좌절했어요.” 난나는 가족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환경이었지만 프리랜서 삽화가로서의 삶을 온전히 이해받지는 못했다. 월세를 내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가족에게 가난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검을 발견한 호텔 직원이 경찰에 연락했고 가족에게 가장 먼저 죽음이 알려졌다. 어느 호텔인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친구들도 알지 못한다. 가족들은 난나의 뜻이라며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지난 8일 경기도 용인시 마북동 전통사에서 가족과 지인 열댓명이 모여 삼우제를 지냈다. 삼우제에 온 지인들은 난나를 추억했다. “그 자리에서 정리가 되더라고요. 제가 느꼈던 언니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오신 분들의 이야기와 같더라고요. 다 각각의 관계였는데도요. 공통점이 정말 따뜻한 사람이고, 강한 줄 알았는데 여린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학원 다닐 때 원장선생님에게서 선물받은 피로회복제를 다 못 먹는다고, 그걸 꼭 나누려 했고, 선물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냥 지나가다 사는 게 아니라 상대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한 선물이었어요. 받았을 때 정말 날 생각했구나 느낄 수 있게요. 지인이 선물받는 걸 보고 기뻐하는 사람이었어요. 사람들 감정의 결을 잘 읽어요. 예를 들어 남친과 헤어지면 갑자기 집에 찾아와서 꽃을 주고 가고, 힘들 때는 밥 해주고 기운 내게 하고 그런 순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난나는 2002~2009년 <문화일보> 연재 만화 <강안남자>에 그림을 그리기 전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에서 경력을 쌓았다. 박미라 초대 편집장은 유능한 일러스트레이터로 난나를 회고했다. “우리가 원하는 그림이라며 굉장히 좋아했어요. 김아무개씨라고, 다른 일러스트레이터가 계셨는데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그 후부터 난나가 그림을 그렸어요. 아마 1998년일 거예요. 그림은 마녀적이고 몽환적인데 모범생처럼 마감이 늘 정확했어요.” “꿋꿋하게, 끝까지 살아주기를” 2002년 <강안남자>에서부터 현재 <일간스포츠>에 연재중인 <갑남을녀>까지 네 작품을 함께해온 이원호 소설가는 지난 11일에야 그의 죽음을 들었다. “지난 8일 일간스포츠 부장이 ‘그림이 안 왔습니다’ 그래요. 문자를 보냈지요. ‘난나, 무슨 일이 있냐?’ 또 대답이 없어요. 그럴 애가 아닌데, 했지요. 난나하고 10여년을 같이해도 사실 저는 글을 쓰고 난나는 그림을 신문사에 넘기니 3, 4년에 한 번 봅니다. 우선 급해서 다른 삽화가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노동자임에도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열정페이를 강요받는 문화예술인 가운데 일러스트레이터는 유독 다른 영역보다 갑이 아닌 을로 자리한다. 글을 쓰는 작가, 화가도 아닌 일러스트레이터는 한국에서 능력을 인정받아도 더 나은 대우를 받기 힘들다. 주체적으로 그림을 해석하기보다는 출판사가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 작업을 해야 하고, 텍스트의 부속품이라는 인식은 이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기 힘들게 한다. 일러스트레이터로 17년간 일하며 신뢰를 받은 난나는 언론사로부터 직접 의뢰를 받았지만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일종의 기획사로부터 일을 받아 수수료를 떼인다.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한 본격 노동 실태 조사가 부재한 가운데 2010년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실이 연구한 ‘민간 노동력 중개 기구의 수수료 및 노동 실태와 개선 방안’ 보고서가 이들의 여건을 엿보게 한다. 이 보고서는 일러스트레이터, 퀵서비스 노동자, 간병 노동자 등 9개 직업군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연구서를 보면, 출판사에서 일을 받아 작가를 주선하는 에이전시, 또는 출판사 등이 떼는 수수료는 25~50% 수준이다. 김씨는 고민 끝에 인터뷰에 응했다. 난나의 뜻이 무엇일지, 그가 혹시 불쌍하게 또는 동정적인 시선을 받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함에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그려온 난나의 삶과 죽음을 누군가 기억하고 추모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다. “언니는 불꽃 같은 아티스트가 아닌 장인이 되고 싶다는 말을 했어요. 매일매일 수련하며 더 잘 그리고 싶어했어요.” 난나는 국내에서 개인 전시회를 연 적이 없다. 뒤늦게나마 지인들과 난나의 그림 전시회를 열어주고 싶다고 했다. “난나의 편지를 받고, 아… 그걸 보고서야 알았어요. 경찰에 신고하고 가족들 연락처를 알려고 수소문하고. 결국 가족들로부터 주검을 발견했다는 말을 듣고 믿기지 않았어요. 정말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어쩌면 언니가 어디선가 찾아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렇게 다 끝나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날 것 같고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그렇게 떠난 언니가 원망스러웠어요. 담담하게 쓰인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난나는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살길 바라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난나의 편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이것입니다. ‘꿋꿋하게, 끝까지 살아줬으면 좋겠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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