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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7일 서울 충정로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탈북자 김유송씨는 “나라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대북 정보 활동인 통일사업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통일사업을 벌인 과거를 후회했지만 여전히 애국, 국가, 통일을 자주 입에 올리는 보수주의자이면서 자본주의자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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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어느 ‘탈북 정보원’의 고백
▶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을 보면, 국가정보원은 없는 간첩을 만들어서라도 공안정국을 강화하고자 하는 ‘국가적 사명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간첩은 한국에만 있고 북한에는 없을까요? 여기, 국방부 국군정보사령부 협력자로 일하며 북한에 간첩 5명을 심었다고 주장하는 한 탈북자가 있습니다. 북한도 한국과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2004년 10월4일 육군 정보사령부 박○○ 소령을 알게 되었으며 통일사업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대한민국 통일을 위해 대북 첩보 활동에 참가하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받은 임무는 북한 첩보 활동에 필요한 인원을 선발하여 북한 내 정보망을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탈북자 김유송(56·옛이름 김난호)씨는 2008년 8월 국민권익위원회가 관리하는 국민신문고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북한에 정보원을 심는 등 대북 첩보 활동을 했다는 김씨가 국방부 국군정보사령부로부터 대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는 내용의 진정서다. 국방부 정보사령부는 그해 10월13일 “2007년 10월과 12월에 걸쳐 3000만원을 진정인에게 지급했고 어떠한 문제 제기와 민원을 제기하지 않을 것임에 대한 ‘각서’를 작성했다”며 김씨에게 회신했다.
“민원인께서 통일사업 참여 기간 중 우리 부대 관계자의 예산 ‘유용’ 혐의를 제기한 사안은 민원인께서 제출하신 자필 현금 영수증, 계좌이체 영수증 등을 토대로 다각적으로 확인한바 당사자 간의 상반된 진술과 서로의 과실 등으로 돈의 전달 여부가 확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용’ 혐의를 밝힐 수 없다. 통일사업에 참여한 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지난번 민원인과의 3차 접촉(08년 10월10일) 때 이미 설명드린 바와 같이 07년 10월과 12월에 걸쳐 3000만원이 기지급되었다. 또다른 김○○에 대한 보상 문제는 통일사업 초기 구상 단계에 참여한 흔적은 있고 그 후 통일사업에 대한 성과(실적)가 전혀 없다. 기타 요원에 대한 보상 문제는 대리권 자격에 관한 법적 문제가 대두될 수 있는 등으로 요구사항을 수용할 수 없다.” 김씨가 정보사령부로부터 받은 공문 내용이다.
중국에서 사장 행세하며 친척·지인 포섭
국방부 통일사업에 참여하기 전 김씨는 평범한 탈북자였다.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 직속 국제연합무역회사 청진시 무역관리소장으로 근무하던 김씨는 1999년 3월17일 반정부 정치자금을 조달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북한에 있을 당시 일본 조총련계 회사 6곳과 무역을 하다 ‘뒷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정치 활동을 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 4월8일 함경북도 회령시 정거리에 있는 노동교화소에 입소했다가 ‘뒷돈’을 써서 여섯 달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김씨는 2001년 3월17일 탈북했다.
김씨가 이른바 통일사업을 벌인 시점은 2004년 10월4일. 김씨는 “친척 소개로 정보사령부 박아무개 소령과 만나 대북 첩보 활동인 통일사업에 뛰어들었다. 박 소령에게는 북한에 정보원을 심어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소개했다.
김씨는 통일사업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 A4용지 11장 분량으로 국민신문고에 제출한 진정서를 통해 설명했다. “북한 내에 정보망을 꾸리기 위해 북한에서 사업할 당시 제일 믿어온 인원 중 북한 체제에 반감을 가진 대상을 가려냈다. 2004년 11월 청진시 부윤구역 외화벌이 사업소 지배인으로 있던 장아무개씨와 전화 통화를 했고, 제가 국제연합무역회사 청진관리소장으로 있을 당시 회사 재정을 관리해온 김수연과 연결해줄 것을 부탁했다. 김수연과의 전화 통화에서 인간적 그리움, 김정일의 부패한 생활을 알려주고 대한민국이 국민 중심 사회이며 국민 권익이 보장받는 사회라는 것을 알려주며 전향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사촌동생 김학철, 2집단군 포병여단에서 분대장으로 있던 조카 김수영, 김수영의 소대장 고병삼, 제가 청진무역관리소장으로 일할 당시 종합지도원으로 근무하던 제도식을 차례차례 포섭했다. 조선족을 고용해 북한 국적의 망원(정보원)을 중국으로 밀입국시켰고 그들로부터 차례차례 통일을 위해 일한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그들에게 디지털카메라를 쥐여주고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발간하는 간부용 강연 자료를 사진으로 찍게 하고, 핵실험 징후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국방과학원 원자력국이 있는 길주군 풍계리에서 흙과 물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북한 첩보 활동은 3년이 지나지 않아 끝났다. 중국에서 사장 행세를 하며 비밀리에 통일사업을 하던 김씨가 2007년 8월 한국에 들어온 이유도 북한에 심은 정보원들이 대다수 사망했기 때문이다. “2007년 3월20일~4월8일 북한 국적의 정보원 제도식, 김학철, 고병삼이 보위부에 체포돼 국가반역죄로 총살됐고 김수영은 보위사령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다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첩보 활동을 벌이다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정보원에게 임무를 주지 말고 보호해야 하는데도 박 소령이 무리하게 지시를 했고 이런 이유로 발각되고 말았다.”
김씨와 일했다는 북한 국적 정보원 5명 가운데 유일하게 김수연씨만 한국으로 들어왔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수영씨도 다시 체포된 뒤 행방불명된 상태다. 국방부 정보사령부가 공문에서 ‘통일사업에 참여했으나 실적이 없었다’고 설명한 인물이 김수연씨다. 2006년 1월26일 탈북한 김수연씨는 김유송씨와 함께 살고 있다. 김수연씨도 국민신문고에 진정서를 넣었다. “중국으로 도망친 뒤 박 소령에게 탈북 과정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300만원을 보내왔다. 그게 끝이었다.”
김씨는 북한에서 숨진 정보원들을 위한 보상금이 지급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정보사령부가 김씨에게 보낸 공문을 보면 “기타 요원에 대한 보상 문제는 대리권 자격에 관한 법적 문제가 대두될 수 있어 수용할 수 없다”고 적혀 있다. 대북 첩보 활동을 벌인 그가 보안을 유지하지 않고 진정서를 내고 뒤늦게 <한겨레> 취재진과 인터뷰한 이유는 뭘까. “북한 국적 정보원들이 숨진 뒤 한국으로 들어왔다. 박 소령이 술집으로 불러내 나갔더니 북한 동지는 총살을 당했는데 양주를 마시고 있었다. 북한 정보원은 필요하면 쓰다가 불리하면 버리는 존재가 아니다.” 국방부는 통일사업의 성격에 대해 “일체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01년 3월 탈북한 김유송씨는 2008년 국민신문고에 진정서 내
북한에 간첩을 5명이나 심는 등
첩보활동 했는데 정보사령부가
대가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극으로 끝난 대북첩보활동
정보사령부의 무리한 지시로
3명이 발각돼 총살됐다고 한다
그는 이들에 대한 보상금도
지급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북한 주부의 수상한 통일사업 국방부는 ‘통일사업’의 성격에 대해 확인을 거부했지만, 수원지법이 지난해 4월19일 징역 4년을 선고한 ‘북한 주부 간첩’ 판결문에서도 통일사업이란 말은 등장한다. 북한 국적의 권아무개(49·여)씨는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 지령을 받고 중국 단둥에서 한국 정보기관 직원과 협력자의 신원을 파악했다. 판결문을 보면, 권씨는 한국 정보기관 직원 등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한국 정부를 위해 간첩으로 활동하겠다는 가짜 서약을 했다. 북한 간첩이 한국 간첩으로 위장한 것이다. 한국 정보기관이 이 사실을 모르고 북한 사람인 권씨를 간첩으로 포섭할 때 쓴 말이 바로 ‘통일사업’이다. “권씨는 2011년 4월 대한민국 정보기관 직원인 이른바 ‘이 사장’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의 통일사업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작성했다.” 권씨는 2010년 11월 중국 단둥세관 부근 여관에서 수소문 끝에 한국 정보기관과 연결된 판아무개 사장을 만나 일자리를 부탁했고, 판 사장의 소개로 한국 정보기관 협력자인 ‘최 사장’을 만난다. 권씨가 “빚 때문에 중국에 왔다. 일자리를 달라”고 부탁하자, 최 사장은 권씨에게 한국 정보기관 직원인 ‘이 사장’을 소개한다. 이 사장은 권씨와의 전화 통화에서 “자서전, 가족 관계, 학력과 경력을 써달라. 편지와 생활비 300달러를 보낼 테니 앞으로 일을 잘 해보자”고 말했다. 권씨는 다음날 단둥역에서 이 사장이 보낸 여성용 화장품과 300달러를 받았다. 권씨는 한국 정보기관과 연계된 북한 주민들도 정탐했다. 권씨는 2011년 7월 단둥에 있는 의류판매점 대박상점에서 북한 주민 김씨와 만나 “한국 김치냉장고를 북한에 가져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한국 사람들과 가깝게 지낼 것이라고 판단했다. 권씨는 김씨로부터 강 목사를 소개받고 편지 심부름을 했다. 심부름을 하는 과정에서 북한 주민 김씨가 한국 정보기관과 연계돼 있음을 확신한 권씨는 보위부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권씨는 이후 탈북자로 위장해 2012년 8월17일 입국했다가 합동신문센터에서 정체가 드러났다. 판결문을 보면 첩보영화가 연상될 만큼 한국과 북한 정보원이 속고 속이는 과정이 적나라하다. 국가정보원이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간첩을 만들고 싶을 만큼 공안 정국이 강화되는 가운데 우리 정보기관 또한 북한에 정보원을 심거나 양성한다는 사실이 판결문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간첩은 북한에도 있다. 북한 주민, 탈북자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대북 정보 수집에 동원될까. 탈북인단체총연합 한창권 회장은 “간첩을 보는 남북한의 인식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에서 ‘대남 간첩’은 영웅 대접을 받는다. 남한을 위해 간첩이 되면 마찬가지로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탈북자 단체의 김아무개 사무국장은 경제적·심리적 이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경제적으로 힘든 탈북자들은 북한 정보 장사를 이용해 손쉽게 돈 버는 방법을 배운다. 북한 체제에 익숙하다 보니 자신의 이념, 신념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보다 그때그때 힘 있는 세력의 주장이 맞다고 믿는 습관이 있다. 입국 이후 처음 접하는 합동신문센터나 하나원 등을 통해 국가정보원이 힘 있는 기관이란 걸 알고 이들이 하는 일이 맞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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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탈북자단체 사무실에 남겨진 북한 보위부 자료. 이 단체의 김아무개 사무국장은 “탈북자들이 실제 북한 접경지역에 출장을 가서 보고서를 쓴 건지, 진짜 북한 보위부 문서가 맞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탈북자와 정보기관이 확인할 방법이 없는 이 자료들을 갖고 거래를 한다. 대북 정보의 질이 보장받기 어려운 원인이다”라고 말했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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