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 분석’ 왜?
형벌의 민주화, 일수벌금제
▶ 하루 5억원짜리 황제노역을 한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논란을 계기로 우리 사회 벌금제도의 문제를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유럽 다른 국가들처럼 소득에 따라 차별을 두는 일수벌금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법조계에서 강하게 제기되고, 국회에서는 입법 논의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수벌금제도는 어떤 것일까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2012년 10월 독일의 유명 축구선수 미하엘 발라크는 스페인 서부 카세레스주 트루히요 인근 도로에서 시속 211㎞로 자동차를 몰다 경찰에 체포됐다. 이 도로의 제한속도는 120㎞였다. 다음날 즉결심판에 넘겨진 그는 벌금 1만유로(약 1400만원)와 면허정지 2년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발라크가 우리나라에서 같은 종류의 속도 위반을 했다면 도로교통법상 12만원의 범칙금만 내면 된다.
이렇게 범칙금 액수에 큰 차이가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페인이 교통법규 위반에 지나치게 민감해서 그런 게 아니라 같은 범죄(또는 규칙 위반)에 대해서도 소득에 따라 형벌의 양을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소득에 관계없이 해당 범죄에 대해 미리 법으로 정해진 형벌만 가한다. 조금 어려운 말로 ‘일수벌금제’(스페인)와 ‘총액벌금제’(한국)의 제도적 차이가 있다.
얼핏 보면, 같은 범죄에 같은 형량이 주어져야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시속 100㎞ 속도 위반을 했다면 누구에게나 9만원의 벌금이어야지, 누구는 90만원이고 누구는 900만원이라면 차별일 수 있다.
미하엘 발라크는 왜 1400만원의 범칙금을 냈나
반론도 거세다. 백만장자에게 벌금 6만원은 아무런 고통이 될 수 없는 반면, 하루 일당 6만원의 노동자에게 벌금 6만원은 큰 고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데 사람마다 부여되는 ‘고통의 정도’가 다르다면 이것을 합리적인 법 집행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법체계는 백만장자에게 주행 제한속도 위반을 수백 수천번 저지를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벌금을 낼 돈이 없어 ‘일당 5만원의 강제 노역’을 하기도 한다. 벌금을 안 내면 몸으로라도 때우게 해서 어떻게든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게 우리 법률체계인데, 문제는 사실상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이 체계가 작동한다는 데 있다.
ㄱ(57)씨는 2012년 12월 어느 날 새벽 서울 도심에서 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부인을 차로 데리러 가기 전 소주 한잔 한 게 실수였다. 길가에 주차돼 있는 차를 들이받았는데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약식 재판에 넘겨져 700만원 벌금형이 나왔다. 부인이 폐암 투병 중이었고 자식 둘의 대학 등록금 때문에 도저히 벌금을 낼 돈이 없었다.
ㄱ씨는 스스로 노역장을 선택했다.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서울 성동구치소에 갇혔다. 2.2평(7.2㎡) 좁은 방에 4명이 함께 생활했다. 노역을 시킬 줄 알았는데 하루 종일 앉아 있게만 했다. 아침 5시50분에 기상해 밤 9시 취침에 들 때까지 앉아 있어야 했다. 누워 있다 걸리면 독방에 가는 벌칙이 주어졌다.
일을 시켜 달라고 교도관에게 부탁해도 ‘일감이 없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또다른 고통이었다. 가끔씩 봉투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종종 일감이 끊겼다.
가짜 휘발유를 팔다가 붙잡힌 사람이 같은 구치소에 들어왔다. 그는 20억원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노역으로 때우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의 노역 일당은 600만원씩 계산됐다. “경제범죄 저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 많은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하루 노역하면 600만원씩 줄어들고 저는 5만원씩 줄어들어요. 그때도 이건 뭔가 불합리하다 생각했는데 사회 나와 보니 허재호 회장 같은 사람은 5억원씩 줄어드네요. 뭔가 잘못된 거 같습니다.” <한겨레>와 통화한 ㄱ씨는 현행 벌금형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ㄴ(50)씨는 대부업체에서 일하다가 2012년 10월 변호사법 위반으로 700만원 벌금형 선고를 받았다. 그에게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니는 세 딸이 있다. 세 딸의 학비만 한 학기에 1000만원이 들었다.
ㄴ씨는 벌금을 분할 납부할 수 없는지 알아봤지만 분할납부제도는 검사의 허락을 받아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도저히 700만원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아 그는 노역장을 선택했다. 구치소 복역 중 <한겨레>와 만난 ㄴ씨는 “차라리 징역형처럼 집행유예를 선고하거나, 벌금을 분할 납부할 수 있게라도 해준다면 회사 다니면서 틈틈이 납부할 벌금을 벌겠지만 선택의 여지 없이 노역을 하고 있다”며 답답해했다.
ㄱ씨와 ㄴ씨처럼 벌금형을 받고 노역장에 유치되는 사람은 매년 4만여명씩 발생하고 있다. 벌금형이 선고되는 사람이 매년 90만~100만명인 것에 비추어보면 스무명 중 한명꼴로 벌금형 선고자들이 노역장에 유치되고 있는 셈이다. 이 중 태반은 돈이 없어 스스로 노역형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벌금형은 경미한 범죄 또는 위험하지 않은 범죄에 한해 재판부가 재량껏 또는 법률에 의거해 선고하는 벌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갈수록 징역형(자유형)이 아닌 벌금형을 확대하는 추세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하고 사소한 범죄들을 모두 징역형으로 다스리기 어렵고, 가벼운 범죄에 대해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벌금형 선고 비율은 전체 선고형 가운데 약 80%를 상회한다.
그러나 우리 현행법은 벌금형 선고 이후 30일 이내에 일시불로 벌금을 완납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 형법 제69조는 “①벌금과 과(태)료는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이내에 납입하여야 한다. 단, 벌금을 선고할 때에는 동시에 그 금액을 완납할 때까지 노역장에 유치할 것을 명할 수 있다. ②벌금을 납입하지 아니한 자는 1일 이상 3년 이하, 과료를 납입하지 아니한 자는 1일 이상 30일 미만의 기간 노역장에 유치하여 작업에 복무하게 한다”고 돼 있다. 징역형엔 집행유예 제도 있지만
그보다 가벼운 벌금형엔 없다
목돈 마련하지 못하는 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노역형 선택한다
가난한 자에게만 가혹한 제도다
일수벌금제 도입 여론 높지만
법무부선 개인소득 파악 난색
국세청 과세자료 통해 가능
새누리·새정치민주연합 모두
새로운 형법 개정안 발의 예정
5000단계의 벌금형이 존재하는 독일 벌금형보다 무거운 처벌인 징역형에는 집행유예제도가 있지만 벌금형에는 집행유예제도가 없다. 목돈을 마련하지 못하는 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노역형을 선택하게 된다. 가난한 자에게만 가혹한 벌금형 제도다. 이러한 ‘형벌의 빈부격차’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나라에도 일수벌금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일수벌금제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평범한 직장인과 부유한 사업가가 같은 산지관리법을 어겼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판사가 100일의 형을 선고했다고 하자. 이 둘에겐 각자의 소득 수준에 따라 하루 적정 규모의 벌금이 부과된다. 하루 10만원을 버는 직장인의 경우 하루 10만원의 벌금이 매겨져 총 1000만원의 벌금형이 나올 수 있다. 이 돈을 낼 수 없다면 100일의 노역을 해야 한다. 하루 100만원을 버는 사업가의 경우 하루 100만원의 벌금이 매겨져 총 1억원의 벌금형이 나올 수 있다. 이 돈을 낼 수 없다면 역시 100일의 노역을 해야 한다. 1000만원과 1억원은 분명 액수가 다르긴 하지만 소득 수준에 따라 비슷한 규모의 고통으로 작용할 수 있다. 벌금을 내지 않을 시 같은 100일의 노역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평등하다. 법 적용의 형평성 문제에서 이런 경우 더욱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은 소득에 따라 1유로에서 5000유로까지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해 일일 벌금액을 정한다. 즉, 5000단계의 벌금형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러한 일수벌금제를 도입하는 나라로는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있다. 영국은 1992년 시범 실시하다가 보수층의 반발로 중단했고, 미국은 1988년부터 일부 주에서 시범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2년 법무부가 형사법을 전면 개정하는 과정에서 일수벌금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2008년 법무부가 일수벌금제 도입을 검토한다고 발표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입장을 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총액벌금제를 택하고 있다. 특정 범죄에 대해 법에 미리 규정해놓은 벌금 액수만 선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건축법 111조 3항은 ‘공사감리자로부터 상세 시공도면을 작성하도록 요청받고도 이를 작성하지 아니하거나 시공도면에 따라 공사하지 아니한 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돼 있다. 또 다른 예로,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12조(불출석 등의 죄)는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아니한 증인, 보고 또는 서류 제출 요구를 거절한 자, 선서 또는 증언이나 감정을 거부한 증인이나 감정인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돼 있다. 벌금액 산정 기준은 따로 없고 법률을 만들 당시 임의적으로 정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다 보니 재벌들에게 특정 법률은 위반 시 전혀 처벌이 두렵지 않은 솜방망이 법률처럼 인식돼 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등 재벌들은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수시로 불출석하고 있다. 그러다 지난해 검찰이 정용진 부회장에게 벌금 700만원 형으로 약식 기소했고 법원은 최종적으로 법정 상한 금액인 1500만원을 선고했다.(국회에 세차례 불출석해 경합범 가중 원칙에 따라 500만원이 더해짐) 당시 ‘엄벌에 처해졌다’고 크게 보도됐지만, 정 부회장에게 1500만원이 과연 엄벌로 느껴졌을지는 알 수 없다. 허재호 전 회장의 ‘황제노역’ 논란에 깜짝 놀란 대법원은 28일 벌금 1억원 이상이 선고되는 사건은 노역 일당이 벌금액의 1000분의 1을 넘을 수 없게 하는 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허 전 회장에게 이 기준을 적용하면 일당이 2540만원을 넘을 수 없게 된다. 또 벌금 액수에 따라 노역장 환형유치 기간의 하한선을 정했다. 1억원 미만의 벌금이 매겨진 경우 원칙적으로 하루 노역에 10만원을 감하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벌금액이 큰 경우에는 ‘하루 노역당 벌금 감면액’이 높아지는 구조에 있다. 벌금액이 큰 경우는 대부분 범죄가 중하거나 죄질이 나쁜 경우인데, 이때 피고인이 더욱 유리한 처분을 받는 모순이 발생한다. 허재호씨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모순 사례이다. 만약 일수벌금제가 도입되어 있다면 판사의 재량으로 일일 벌금액이 정해지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데이터에 따라 벌금액이 정해질 것이다. 우리의 총액벌금제의 현실이 이렇다 보니 일수벌금제 도입 여론이 높아지고 있지만 법무부는 개개인의 소득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직은 도입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이나 국민건강보험도 소득에 따라 다른 보험료를 내게 하고 있어 국세청의 과세자료 등을 잘 연구하면 합리적 대안은 금방 만들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노역일당 제한·사회봉사 삽입” 의견도 김기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다음주 일수벌금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 발의를 발표할 예정이다. 김 의원은 “의견을 같이하는 의원들과 공동발의를 추진할 것이다. 지금의 벌금제도는 가난한 사람에게만 더 큰 책임을 지우고 있다. 일수벌금제 도입은 형벌의 민주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일수벌금제가 ‘책임주의’에 반한다는 반론도 강하게 존재한다. 같은 범죄행위를 한 피고인에게 경제력의 차이를 이유로 누군가에게는 100만원을, 누군가에게는 1000만원 혹은 1억원의 벌금을 선고하는 게 옳으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피해 등가성’의 논리가 반박 근거로 제시된다. 즉, 우리 형법이 말하는 책임주의는 단순히 ‘같은 행위에 같은 형벌’이 아니라 ‘같은 행위에 고통이 같은 형벌’을 주는 것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일수벌금제를 도입하는 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면 일단은 일일 노역 일당을 일정 이하로 제한하는 법률부터 만들자는 의견도 있다.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은 ‘노역 일당을 최대 300만원으로 제한하고, 32억85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이를 납부하지 않은 자는 최소 3년간 노역장에 유치되도록 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벌금 분할 납부를 가능하게 하고, 징역형처럼 피고인의 상황에 따라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게 하는 법의 개정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벌금을 내지 못했다고 해서 무조건 노역을 시키기보다는 사회봉사제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는 검사의 청구를 판사가 승인해야만 사회봉사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일수벌금제 도입 등 벌금제 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는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노역장에 유치되는 사람들은 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국가가 현행 벌금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왔다. 지금 당장 일수벌금제를 도입해 법 적용의 불평등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글 참조> 벌금제 개혁을 위한 국회 공청회 자료집(2013년 12월2일. 최정학 방송대 법대 교수,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희수 변호사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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