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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07 19:43 수정 : 2014.03.08 16:48

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박민숙씨를 만났다.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7년간 일한 뒤 2012년 유방암에 걸린 박씨는 다큐멘터리영화 <탐욕의 제국>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지난해까지 항암 치료를 받고 지금은 6개월에 한 번씩 재검을 받으며 ‘완치’ 판정이 나길 기다리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토요판] 뉴스분석 왜?
‘탐욕의 제국’ 박민숙씨 인터뷰

▶ <탐욕의 제국> 홍리경 감독은 두 해 전 겨울 한 병원에서 ‘민숙 언니’를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피해자들을 만나기 전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다.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인터뷰하는 게 잘하는 행동인지 늘 고민한다.” 홍 감독의 두려움을 날려준 건 박민숙씨의 유쾌함이었습니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크게 웃는 박민숙씨는 서울 종로구 인디스페이스 등 전국 영화관 20곳에서 상영중인 <탐욕의 제국>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박민숙(41)씨에게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7년은 가장 ‘찬란한 시기’였다. 박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1년 6월4일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농사짓는 부모 밑에 태어난 ‘시골 소녀’는 직장인이 된 뒤부터 돈을 벌고, 태어나 처음 스케이트를 타고, 여수·경주·설악산 등 전국으로 여행을 다녔다. 행복한 순간은 기억으로만 남지 않았다. 필름카메라며 폴라로이드카메라로 사진도 부지런히 찍었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박씨는 그 시절의 사진들을 보여줬다.

“이 언니한테 <또 하나의 약속> 개봉했으니 보라고 카카오톡을 보냈는데 최근 위암이 전이돼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연락이 왔어요. 저 언니도 바로 옆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불임이었다가 10년 만에 임신을 했고요. 아, 이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숙영이랑 찍은 사진이네요. 일 잘해서 내가 조장일 때 고과를 잘 줬는데….”

찬란한 시절이 담긴 사진 속 사람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박씨의 행복했던 과거는 사진으로만 남았다. 지금 그는 과거보다 아픈 현실을 곱씹고 있다. 박씨는 6일 개봉한 다큐멘터리영화 <탐욕의 제국>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지난달 개봉한 <또 하나의 약속>이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황유미씨 가족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면, <탐욕의 제국>은 삼성반도체 등에서 일하다 병을 얻어 숨진 황유미, 이윤정, 황민웅씨의 유족과 아직 투병중인 한혜경, 박민숙씨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은 다큐멘터리다. 1991년부터 7년간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고, 퇴사 뒤 유방암에 걸린 박씨는 <또 하나의 약속>의 실제 인물인 셈이다.

‘삼성’ 메리트 보고 고3 때 입사

-<또 하나의 약속>에 이어 <탐욕의 제국>이 개봉된다. 두 작품을 보고 난 뒤 소감이 남달랐을 것 같다.

“<또 하나의 약속>은 황유미씨 가족의 고통을 공감하기 쉽게 잘 풀어낸 것 같다. 연기자들의 열연도 만족스러웠다. <탐욕의 제국>은 홍리경(감독)씨가 우리 같은 피해자들 만나고 다니면서 진정성 있게 찍어줬다. 제작 당시 나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온몸의 털이란 털이 다 빠졌다. 힘들 때였는데 ‘언니 한마디만 해요’ 하면서 편하게 말을 걸어줘 마음속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을 수 있었다. <탐욕의 제국>을 보면 삼성 본관 앞으로 나아가려는 고 이윤정씨 운구차를 경찰과 삼성 쪽 사람들이 막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운구차는 본관 앞에서 좌회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황상기 아버님이 급히 운구차 쪽으로 뛰어가서 절대 좌회전하지 말고 앞으로 가라고 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달려가는 안타까운 발걸음이 너무 가슴 아팠다. 지난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할 때 처음 본 아버님은 날 대신해 싸워준 든든한 분이었다.”

-두 영화는 주제만이 아니라 제작, 개봉 과정까지 닮았다. 제작비는 소셜펀딩을 통해 일반 시민들의 기부를 받았다. 두 작품 모두 개봉은 했지만 접근성이 높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에는 걸리지 못했다. <또 하나의 약속>은 상영관 수가 줄었고, <탐욕의 제국>은 서울의 한 씨지브이(CGV)에서 열기로 했던 언론시사회가 취소되기도 했다.

“영화가 나오고 개봉한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다.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탐욕의 제국> 시사회가 열렸다. 그때만 해도 극장에 걸릴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우리 이야기를 보러 올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고, 관객이 적으면 수익도 안 날 테니 영화관 상영도 어렵다고 봤다. 그런데 <또 하나의 약속> 개봉 뒤 상영관 축소 배정이 문제가 되자 시민단체 등 많은 사람이 나서서 도와주고 영화를 보러 와줬다. 보러 와주는 사람들이 너무 고맙고 대단했고, 이제야 세상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가 싶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는 언제 입사했나?

“벌교상업고등학교 정보과 3학년 때 학교에서 삼성반도체 생산직 원서 낼 사람을 찾았다. 생산직이라는 말이 마음엔 걸렸지만 ‘삼성’이란 메리트가 있으니까 손을 들었다. 시골에서 벗어나고 싶고, 빨리 돈 벌어서 부모님께 효도도 하고 싶었던 나를 위한 선물이란 생각에 덥석 잡았다. 1991년 6월4일이 입사일인데 이 날짜는 영원히 못 잊는다. 우리에게는 입사일이 생일 다음으로 중요한 날이었다. 입사 1년, 2년 때마다 ‘고생했다’면서 생일만큼 서로 축하하고 선물 줄 정도였으니까.”

-기흥공장에서 한 일을 설명해달라.

“3개 조가 새벽 6시~오후 2시, 오후 2시~밤 10시, 밤 10시~새벽 6시까지 8시간씩 3교대로 일했다.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돌아가기 때문이다. 처음 3년은 한 달에 하루 쉬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쉬는 날에는 잠만 잤다. 공장에서 일할 땐 방진복을 입고 클린룸에 들어간다. 나는 6인치 웨이퍼를 만드는 3라인에서 일했다. 이 웨이퍼 위에 회로를 새겨 넣으면 반도체가 만들어지고, 이런 웨이퍼 가공 공정을 팹(FAB·Fabrication)이라고 부른다. 내가 일한 3라인 2층은 엔드팹(End-FAB) 공정인데, 1층에서 반도체를 만든 과정을 한 번 더 약식으로 반복한다. 1~16베이로 나눠진 2층에서 나는 주로 4베이 에칭(etching)을 맡았다. 에칭은 웨이퍼를 코팅한 뒤 표면을 가스나 용액으로 깎아내는 과정이다. 코팅된 웨이퍼를 기계에 넣고, 에칭이 끝난 웨이퍼를 꺼내는 일을 모두 수동으로 진행했다.”

3라인은 2011년 서울행정법원이 삼성반도체 노동자 중 처음 산재를 인정한 고 황유미·이숙영씨도 근무한 곳이다. 1988년 건설된 3라인은 기흥공장에서 가장 오래된 라인이다. 삼성전자 쪽은 ‘안전보건공단에서 3라인을 대상으로 역학조사를 벌였지만 백혈병 유발요인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은 “각종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백혈병이 발병하거나 그 발병이 촉진됐다고 볼 수 있다”며 삼성이 주장한 역학조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1년 입사해 7년 동안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 근무
퇴사 뒤 불임 고통에 유방암 발병
그가 일한 3라인은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도 일한 곳이었다

“우리 이야기를 보러 극장에
올 사람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영화가 나오고 개봉된 건 기적
우리가 만든 반도체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인 회사가 됐으면”

기적같이 생긴 아이가 염색체 이상

-1998년 6월4일 퇴사한 이유는?

“1997년 외환위기(IMF 사태)가 오면서 회사 분위기가 안 좋았다. 1998년 5월께 내가 조장이었는데 과장이 일 잘하는 사람부터 못하는 사람까지 순서대로 명단을 만들어 오라고 했다. 그 명단의 일부가 잘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뭐라고 쟤들 인생을 좌지우지하나. 그럴 수가 없어서 못 버티고 퇴사를 했다. 입사 이후로 계속 여기 아니면 먹고살 데 없다고 생각하며 삼성에 애정을 쏟았는데 막상 나간다니까 아무도 잡지 않았다.”

-회사 다니거나 그만둔 직후 몸에 이상은 없었나?

“일할 때는 생리통이 심했다. 다른 동료도 그랬다. 생리불순인 사람도 많았다. 결혼한 뒤엔 4년간 피임을 안 하는데도 애가 안 생겼다. 불임클리닉도 다녔는데 검사를 해도 남편도 나도 이상은 없는데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더라. 인공수정을 한 번 했는데 기대가 너무 큰 나머지 실패했고 좌절이 어마어마했다. 시험관 아기 하는 사람들 보니 너무 힘든 것 같아서 한방 치료를 받던 중 기적같이 아이가 생겼다. 그런데 그 아이가 18번 염색체에 이상이 생겨 11주에 자연유산이 됐다. 이해가 안 됐다. 친언니들 애도 잘만 낳고 가족 중에 유전병 경력이 없었는데. 애가 안 생겨서 상처와 아픔이 컸다. 애 낳아 기르는 친구들 보면 힘들어서 친구들도 잘 안 만날 정도였다.”

-그래도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첫애를 그렇게 보내고 큰애를 가졌는데, 임신이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첫애 유전자에 문제가 있어서, 양수검사를 받았고 그래도 애가 나올 때까지 손이며 발이 제대로 붙어 있을지 걱정했다. 둘째도 피검사에서 다운증후군 수치가 높게 나와서 태어날 때까지 마음을 못 놓았다. 세 아이 모두 남편 말고는 낳을 때까지 임신한 줄 몰랐다.”

-유방암은 언제 알았나?

“친언니가 암 종양이 1㎝ 미만인 초기 유방암이었다. 그때 충격 때문에 항상 자가진단을 했는데, 2011년에 좁쌀 같은 게 만져졌다. 의사가 처음엔 괜찮다고 해서 3개월 뒤에 다시 병원에 갔더니 0.3㎝였던 종양이 1.2㎝로 커지고 하나가 더 생겼다. 2012년 2월13일 병원에서 1기 암 진단을 받고 같은 달 27일 오른쪽 가슴을 완전히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았다. 아직 30대 후반이고 이제 막 4학년, 2학년 된 아들 둘에 늦둥이가 겨우 돌 지났는데 앞이 캄캄했다. 왜 나야, 왜 하필 나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내 사랑하는 가족을 못 보고 저 세상으로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이 땅으로 푹 꺼지는 것 같았다. 제발 아이들 커가는 모습만 지켜보게 해달라고 많이 울며 기도했다.”

-불임·유방암이 반도체 공장 근무 경력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는지?

“둘째 두돌 무렵에 삼성 후배한테서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하던 숙영이가 백혈병에 걸려 죽었다고. 태어나서 나보다 어린 사람이 죽은 것도 처음이고, 100일밖에 안 된 아이를 두고 어떻게 죽었을지 생각하니 너무 슬프고 힘들었다. 그런데 그 후배가 ‘같이 일했던 애도 백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더라’고 했다. 그 아이가 유미였다. 그래도 산 사람은 계속 살아지면서 잊고 있었는데, 아프기 한 해 전에 시사 프로그램 <추적 60분>에 유미와 숙영이가 나왔다. 방송을 보고 알아보니 같이 일했던 과장님도 백혈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에 주변을 수소문해 보니 내가 일한 3라인 2층에 1베이 친구도 7년 불임, 2베이 언니도 10년 불임, 같은 베이에 있던 사람은 뇌종양, 9베이 숙영이는 백혈병, 11베이 친구는 갑상선암이었다더라. 유해한 환경에 노출된 것과 죽음이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 불임도 그 때문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건강하다고 생각했고, 제보는 많이 아파야만 가능한 줄 알았다.”

유방암 산재 인정 소식이 준 희망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 연락한 게 2012년 유방암 발병 뒤였다.

“처음에 유방암 걸리고 언니도 유방암이 있었으니까 병원에서 유전자검사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 언니도 나도 안젤리나 졸리가 갖고 있었다는 브래커(BRCA)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추적 60분>에서 본 이종란 노무사에게 연락을 했다. 이 노무사가 ‘유전이 아니라 15년 전 일한 것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백혈병도 해결이 안 되는데 암이 어떻게 될까 싶어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2년 말에 다시 연락이 왔다. 삼성 반도체에서 일한 뒤 유방암에 걸려 숨진 한 노동자가 산재 인정이 됐다면서.”

2012년 12월15일 근로복지공단은 삼성 반도체에서 4년9개월간 근무하고 유방암에 걸려 숨진 김아무개(당시 36살)씨의 산재를 승인했다. 유방암을 산재로 인정한 첫 결정이었다. 박씨도 지난해 7월 근로복지공단에 “벤젠 등 발암물질과 방사선에 노출됐고 발암요인이 되는 야간근무가 포함된 교대근무를 했다”며 산재를 신청했다.

반도체산업 여성 노동자의 생식·보건 문제는 심각하다. 2013년 10월 국정감사 때 은수미 민주당 의원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출한 ‘2008~2012년 진료비 청구 자료’를 분석했다. 그 결과, 반도체산업에 종사하는 20대 여성 노동자는 같은 나이대의 일하지 않는 여성에 견줘 자연유산이 약 57%, 생리불순이 약 54%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반도체산업과 노동자의 생식·보건 문제의 관련성은 한 번도 조사된 적이 없다.

박씨는 자신과 동료가 겪은 생식·보건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전자산업 여성 노동자 건강권 모임’에 참여해 근무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반올림으로 제보해 온 비슷한 아픔을 가진 전 삼성 반도체 노동자한테 “네 잘못이 아니다.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라”라며 힘을 주는 것도 박씨의 역할이다.

-삼성과 우리 사회에 무엇을 바라는가?

“우리가 원하는 건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로 인정해 달라는 거다. 회사가 지금이라도 잘못을 밝히고 사과해도 늦지 않았다. 피해자들인 우리가 증거 아닌가. 우리의 알 권리를 존중해 투명하게 알렸다면, 안전한 보호구와 안전한 시스템을 만들어 줬더라면 이렇게 상처가 얼룩지지 않았을 텐데. 열심히 일한 대가가 병이었다. 우리가 만드는 반도체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인 회사와 세상이 되길 바란다.”

반올림에 직업병 피해자라며 제보해온 삼성전자 계열사 직원은 193명. 그 가운데 73명이 숨졌다. 그러나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산재가 인정된 것은 황유미·이숙영씨의 죽음이 산재라고 본 2011년 서울행정법원 판결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3명의 산재가 인정됐고, 3명이 1심에서 산재를 인정받은 뒤 항소심을 진행중이다. 일과 병의 인과관계를 노동자가 직접 입증해야 하는 현재의 산재제도 아래에서 박씨의 바람은 아직 먼 이야기일지 모른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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