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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03 20:01 수정 : 2014.01.04 11:00

[토요판] 뉴스분석 왜? / 수단 내전

▶ 한국에서 아프리카 남수단은 ‘울지마 톤즈’의 나라다. 이태석 신부는 생명을 다해 남수단 톤즈의 빈자들을 섬겼다. 이 신부 사후 4년. 남수단에 또다시 총성이 요란하다. 130여년 식민지배의 아픔도, 반세기에 걸친 내전의 고통도, 2011년 수단에서 독립하면서 끝났는 줄 알았는데 왜일까. 유엔 남수단임무단(UNMISS)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군 한빛부대는 왜 또 이 내전의 한복판에 ‘실탄도 없이’ 서 있었던 것일까.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지난달 3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호통을 쳤다. “한빛부대 파병 연장을 심의할 때 외교부에서 현지 치안 상황에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다. 어떻게 이틀 앞을 내다보지 못하느냐.”

지난 연말 불거진 한빛부대의 ‘일본실탄 대여 논란’은 여러모로 한국 정부의 상황 판단 능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외교부·합동참모본부 등은 아프리카 남수단공화국 종글레이주 보르에 합동 실사평가단까지 파견하고도 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남수단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딩카족은 대통령을 배출한 제1 부족이고, 누에르족은 부통령을 배출한 제2 부족이며, 정부군 상당수가 딩카족과 누에르족으로 구성돼 있는데 설마 큰 내전이야 일어나겠는가’ 하는 안이한 상식은 남수단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지난해 7월 살파 키르 대통령이 리에크 마차르 부통령을 해임하고, 지난달 15일 누에르족 경호원을 딩카족으로 바꾸면서 남수단 20여개 도시가 순식간에 내전터로 변했다. 1991년 마차르를 지지하는 누에르족이 보르에서 딩카족 2000여명을 살해한 악몽이 그대로 재현됐다. 보름 만에 1000명이 훨씬 넘게 숨지고, 18만명 이상이 피난을 떠났다. 딩카족은 누에르족의 쿠데타를, 누에르족은 딩카족의 권력 독점을 탓한다. 전문가들은 유전 수입 등을 둘러싼 양대 부족간 이권 다툼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정부군과 반군이 평화협상을 시작했지만, 총성이 멎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이집트·영국 식민지였다가
1956년 1월1일 독립한 수단은
북수단의 민족주의·이슬람화에
다부족·다종교 남수단 반발하며
아프리카 첫 내전국가가 됐다

2011년 7월9일 남수단 독립에도
수도·전기 등 사회기반시설 없고
강력한 국가기구 자리 못 잡자
딩카·누에르족 등 부족간의
불안한 균형이 내전으로 폭발

원인과 전선마저 불분명한 남북 충돌

“현재 수단에서 평화란 내전과 내전 사이에 존재하는 잠정적인 휴전에 불과하다.” 수단과 동아프리카 전문 역사가인 더글러스 H. 존슨은 <수단 내전>(2011·양서각)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단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지를 표현한 말이다. 수단은 이집트와 영국의 식민지배를 거쳐 1956년 1월 독립했지만, 40년 가까이 내전을 거듭했다. 정확한 통계조차 없어 수백만명, 최소한 250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2011년 7월9일 남수단이 북부의 수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평화가 깃드는가 싶었지만, ‘불안한 평화’라는 지적이 많았다.

수단 내전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북부의 아랍계 무슬림과 남부의 아프리카계 기독교도·토속신앙인들 간의 충돌’이다. 종교간 충돌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지만 “수단 정치인들은 신앙 자체보다는 종교를 (정치에) 이용했다”고 존슨은 지적한다. 수단 내전은 130년이 넘는 이집트와 영국의 식민지배, 북부와 남부의 오랜 착취 관계, 개발 지역과 저개발 지역의 불균형, 동아프리카 주변국의 정치 상황, 남수단 천연자원을 둘러싼 수십개 부족과 국제사회의 이권 다툼이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다. 다층적이며 너무 오래 지속돼, 때론 원인과 전선마저 불분명한 충돌이었다. 북부 수단 부족끼리, 남부 수단 부족끼리도 서로 싸웠다. 북부의 수단 정권이 남부 내부의 싸움을 부추기거나 지원하기도 했다. 193번째 신생국 출범의 축포가 무색하게, 남수단에서 다시 화염이 피어오른 배경이다.

남부 수단은 이집트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기 전부터 사실상 북부 수단의 식민지였다. 중세에 아랍 부족들이 이집트와 홍해를 건너 수단으로 이주해오면서 수단 북부 지역을 차지했고, 이슬람 문화가 자리잡았다. 천연자원과 농사지을 땅, 그리고 물은 남부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와 토착신앙을 믿고 결속력이 약했던 남부 수단은 북부 수단한테 ‘노예와 자원의 공급지’였다. 이후 이집트와 영국이 수단을 식민지로 삼았는데, 경제·교육·정치 개발 과정에서 북과 남의 불평등을 심화시켜 식민지배에 악용했다. 특히 영국은 20년 동안 북부와 남부에 별도의 행정제도를 운영했다. 북부는 불평등 구조를 이용해 이득을 봤고, 손해는 남부에 전가했다. 북부는 지배 계층, 남부는 피지배 계층이라는 인식도 굳어졌다. 북과 남의 갈등의 골은 화해하기 힘들 만큼 깊어졌다.

1956년 1월1일 수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집트가 다시 수단의 주권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영국은 차라리 수단을 독립시키는 쪽을 택했다. 심화되는 남북 갈등을 중재할 책임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수단은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가운데 최초의 독립국가가 됐지만,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내전은 독립 전인 1955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수단은 다시 아프리카 독립국가 중 최초로 내전 국가가 됐다. 북과 남은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독립국가에 대한 개념이 달랐다. 북부에 견줘 열세였던 남부는 자치가 보장되는 연방제를 원했다. 반면 북부는 단일국가를 추구했고, 독립은 북부에서 원하는 대로 이뤄졌다. 북부 엘리트들의 민족주의와 이슬람화 정책은 수십개의 부족과 다양한 종교로 이뤄진 수단의 다양성과 충돌했다. 북부 출신들이 남부의 행정·군 관료층과 상인층까지 독식했다. 북부는 남부의 이슬람화를 추구했다. 기독교계 학교를 폐쇄하고 반란군 진압을 명목으로 마을을 불태웠다. 스멀스멀 수단에 번진 충돌은 1차 내전이 됐고, 20년 가까이 지속됐다.

남북갈등 끝나자 찾아온 남남갈등

1972년 2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남부와 북부 수단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수단은 식민지배가 끝난 뒤 내전에 휘말린 아프리카 국가들 중 처음으로 협상으로 평화를 이끌어냈다. 남부에는 남부수단자치지역이 구성됐다. 하지만 협정 체결 11년 만에, 평화협정은 휴지 조각이 됐다. 연방제와 지역자치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고, 중앙정부는 남부지역에 지급하기로 한 보조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수단의 총수출액 95%를 차지하는 석유는 아디스아바바 협정이 체결된 이후 발견됐다. 원유의 80%가 남부에 매장돼 있었지만, 미국 정유기업인 셰브런과 프랑스 토탈이 채굴권을 허가받는 과정에서 남부의 의견은 무시됐다. 수단 정부는 대부분의 정유시설을 중부 경계지역에 건설했고, 송유관과 항구는 모두 북부에 건설했다. 군대 통합 과정에서도 불협화음이 일었다. 일부 반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정부군에 흡수된 반군들도 계급 부여 과정에서 차별을 당했다. 반군 상당수는 자신들을 후원해온 에티오피아의 국경으로 돌아가 2차 내전의 주력 반군 세력이 되었다. 1983년 시작된 2차 내전은 22년간 지속됐다.

내전은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봉합됐다. 반군 지도자 존 가랑이 “우리는 외부 압력으로 합의에 도달했다”고 시인했을 정도다. 케냐 등 동아프리카 정부간개발기구(IGAD)와 미국과 유럽연합(EU), 중국 등이 중재에 나섰고, 수단 정부와 남수단 반군은 2005년 1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주변국들은 국경지대 불안과 난민 및 불법무기 유입을 막으려고 수단의 평화를 재촉했다. 남수단 원유의 상당수를 가져가는 최대 수입국 중국도 평화를 원했다. 미국 우파 기독교계는 북부 무슬림들이 남부 기독교도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라며 조지 부시 행정부를 압박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은 평화협상 이행 결과를 인도적 지원과 연계해 수단 정부를 압박했다.

남수단은 평화협정 이후 6년간 자치를 실험했다. 국민투표에서 98.8%가 독립에 찬성하면서 2011년 7월9일 독립했다. 그러나 독립 당시 남수단은 불모지였다. 지난달 30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기사는 독립 석달 뒤인 2011년 10월 남수단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비포장도로는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더럽다. 수도며, 전기며, 도로보다 나을 게 없는 다른 사회기반시설들을 보면 남수단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권을 둘러싼 남수단 부족들 간의 긴장관계도 점화를 기다리는 불길 같았다. 남부 수단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이미 지역정부와 군대가 ‘딩카판’이 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남수단 독립 이후에도 강력한 국가기구에 의한 통치는 요원했고, 딩카족을 중심으로 수십개 부족 간의 ‘불안한 균형’이 유지돼 왔다. 딩카와 누에르 등 각 부족 세력가와 장군들은 각자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정부 지분과 석유 수익을 나눠 먹었다. 키르 대통령이 마차르 부통령을 쳐낸 것은 이런 균형을 무너뜨린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파병의 실리보다 중요한 건 군인 안전

한국이 1만2000㎞나 떨어진 남수단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인 최초의 유엔 사무총장이 탄생한 이후의 일이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취임 직후인 2007년부터 수단 ‘다르푸르 사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다르푸르에선 목초지 다툼이 종교와 부족, 남북 갈등으로 번져, 2003년 이래 민간인 20만명 이상이 학살됐다. 반 총장은 남수단 독립 직후 한국에 남수단 평화유지군 파병을 요청했다. 한빛부대는 남수단의 미래에 ‘길’을 터주려고 지난해 3월 파병됐다. 공병부대를 중심으로 의무·수송·통신·경비 병력 등 280여명이 배치됐고, 올 12월31일까지 파병이 연장된 상태다.

국방부가 발행하는 월간 <국방저널> 2013년 8월호를 보면, 종글레이주 주도 보르에서 유엔 남수단임무단(UNMISS)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빛부대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의료지원팀은 감염과 질병에 시달리는 현지인에게 ‘신의 선물’로 불릴 정도로 환대받고 있다. 남수단 유엔 항공 수송의 50%를 차지하는 보르 공항 활주로도 건설했다. 또 각종 도로와 쓰레기 매립장 건립, 식수 제공까지 보르 구석구석에 한빛부대의 손길이 닿는다. 태권도교실과 난타·사물놀이 공연 등 ‘한류 외교관’ 역할도 한빛부대의 몫이다.

한국의 경제력과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고려하면, 신생 독립국의 재건을 돕는 평화유지군 파병을 문제 삼기는 어렵다. 국력에 걸맞은 국제적 기여를 높이 평가할 부분도 많다. 1993년 상록수부대가 소말리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한국군의 평화유지군 국외 파병이 시작된 지도 20년이 흘렀다. 한국군은 이제 유엔 평화유지군(PKO), 다국적군 평화활동, 국방교류협력을 위해 총 15개국에 1160명, 연인원 4만명을 파견할 정도로 활발한 국외 활동을 하고 있다. 국외 파병에서 주로 언급되는 건 ‘명분’이다. 한국군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주장이다. 한국군이 국외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다는 ‘국격’론, 한국군의 전투 근무지원 능력을 발전시키고 한국 문화를 전파할 수 있다는 ‘실리’론도 있다.

명분과 국격, 실리보다 앞서는 것은 군인들의 ‘안전’이다. 전투병력은 아니지만, 상시적인 교전 지역에 한국군을 보내면서 ‘실탄’조차 충분히 지급하지 않은 것은 안이한 조처였다. 무기수출이 제한된 일본 자위대로부터 ‘정치적인 고려’도 없이 실탄 1만발부터 덥석 빌리고 본 어리석음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일본은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명분으로 자위대의 역할 확대를 계획하고 있는 터였다. 또 한빛부대가 있는 종글레이주는 독립 한달 만에 600명이 숨지고, 반년 뒤인 2012년 1월에도 10만명이 피난을 갔을 정도로 남수단 부족들의 격전지다. 더구나 전략적 요충지인 보르는 지난달 20일 이후 반군과 정부군이 점령권을 뺏고 빼앗는 ‘남수단 사태의 중심지’다. 수단의 반세기를 갉아먹은 내전의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내전 현장에서, 평화유지군이라고 해서 정부군이나 반군의 공격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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