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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19 19:33 수정 : 2013.07.21 12:03

거인의 몸은 극단적으로 고온이며 인간 이외의 생물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신체 구조는 다른 생물과 달라 생식기도 없고 번식 방법도 모르며 남성 같은 체격을 하고 있다. 거의 유일한 행동원리는 사람을 먹는 것인데 목적은 포식이 아니라 살육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차이는 있지만 공격받아도 1~2분 만에 원상회복이 된다. (<진격의 거인> 1권 중) 애니플러스 제공

[토요판] 만화 ‘진격의 거인’ 열풍 왜?
당신을 엄습하는 거인은 누구…취업·직장 상사·자본주의?

▶ 만화와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1회는 이 말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날 인류는 떠올렸다. 그들에게 지배당하던 공포를. 새장 속에 갇혀 있던 굴욕을.’ 거인이 없는 현실에서도 우리는 공포와 굴욕을 느낍니다. 저는 취업 준비를 할 때가 그랬습니다. ‘올해 안 되면 어쩌지?’ 하며 꿈에서도 불안해하다가도, 도서관에 앉아 공부만 하는 신세가 처량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경험들이 이 거대한 판타지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건 아닐까요. 스포일러 주의!

“저, 만화 안 보는데요.”

내 시큰둥한 대답에 대학 선배가 말했다. “<진격의 거인>은 달라. 얼마나 인기인데. 적어도 기자라면 대중의 관심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알아야지.”

그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첫 회부터 나를 사로잡은 건 강렬한 공포의 ‘아우라’(일종의 분위기)였다. ‘저 거인이 정말 내 앞에 있다면 나는 도망갈까, 맞서 싸울까.’ <진격의 거인>이 회를 거듭할수록 감정이입의 속도는 빨라졌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무너진 집에 깔려 있다면?’ 분명 비현실적 상황인데, 나는 어느덧 그 숱한 ‘만약’을 붙들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결국 새벽까지 내리 13편을 몰아보고 말았다.

일본서 누적 판매량 2000만부 돌파

<진격의 거인> 때문에 밤을 하얗게 지새운 뒤 잔뜩 충혈된 ‘레드아이’로 출근한 건 직장인 이지효(가명·39)씨도 마찬가지였다. 페친, 곧 페이스북 친구의 소개로 새벽 1시부터 25분짜리 애니메이션 9편을 연달아 보고 퇴근 뒤에 복습까지 했다.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멍한 표정의 거인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무식하게, 말 그대로 먹는 장면이. 무력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호기심도 들었어요. 왜 저럴까? 왜 사람을 먹을까?” 그리고 자발적으로 <진격의 거인> 전도사가 됐다. 그의 페북에는 ‘11시에 봉인을 풀었다 새벽 3시에 잤어요!’, ‘가장 핫한 거인을 만났군요’, ‘환영합니다’ 등의 공감 글이 줄줄이 이어졌다.

나나 지효씨 정도는 양반이다. 게임개발자인 김대천(31)씨는 만화를 기다리지 않고 찾아간다. 만화가 연재되는 일본의 월간 만화잡지 <별책 소년 매거진>에 후속편이 나오면 일본어판이라도 인터넷으로 먼저 찾아봤다. 일요일 새벽 1시58분에 일본 티브이 <엠비에스>(MBS)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도 그날을 넘기기 전에 본다.

“주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캐릭터가 초반에 다 거인에게 잡아먹혀요. 보통 이런 만화에선 불사신처럼 살아남는데 말이죠. 거인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인간의 좌절감이 굉장히 현실적이에요. 근데 그 좌절감의 원인이 미스터리 하죠. 거인이 어디서 왔는지, 왜 사람을 잡아먹는지 하나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김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진격의 거인>을 분석한 글도 올렸다. “거인과 인간의 나라 사이에 벽이 쳐 있는 등 북유럽 신화와 세계관이 유사해요. 그래서 신화처럼 결말은 멸망이 아닐까 추측되고요.” 일주일간 백과사전에서 주인공 이름, 만화에 나오는 지명 등을 검색한 끝에 얻은 성과였다.

<진격의 거인>은 2009년 10월부터 <별책 소년 매거진>에 연재된 신인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27)의 작품이다. 일본에선 지난 6월까지 단행본 10권의 누적 판매량이 2000만부를 돌파했다. 내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폭발적인 반응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산문화사의 <진격의 거인> 제10권이 발행된 5월 넷째 주엔 교보문고 전체 베스트셀러 4위에 올랐다. 4월6일부터 일본 <엠비에스>에서 방송되기 시작한 애니메이션은 같은 날 한국 케이블채널 <애니플러스>에서도 볼 수 있다. 만화책의 인기가 애니메이션을 만나 크게 확장되면서, <진격의 거인>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이 퍼졌다. 구글 코리아가 발표한 올해 상반기 구글 검색어 순위 10위에도 올랐다.

인간보다 크고 힘이 센 거인이
이유 없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싸우지만
지고, 또 지고, 잡아먹힌다

거인 의미는 답 없는 주관식
일본에게는 중국일 수도
여자에게는 성적 폭력일 수도
냉전주의자에겐 빨갱이일 수도
노동자에겐 자본주의일 수도

<진격의 거인>은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과 인간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다. 100년 전 인간보다 크고 힘이 센 거인이 나타나 이유 없이 인간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인간이 그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인보다 큰 50m 높이의 벽을 세우는 것뿐. 벽은 ‘평화’를 보장해줬지만 자유를 앗아갔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조사병단’과 “이대로 조용히 살자”는 지배층이 입으로 싸우는 사이, 키가 50m 넘는 거인이 나타나 벽을 부쉈고 마을을 초토화시킨다. 엄마가 거인에게 먹히는 장면을 본 주인공 ‘에렌 예거’는 복수를 위해 훈련병단에 들어간다. 그러나 고된 훈련을 받고도, 거인과의 첫 실전에서 동료뿐 아니라 에렌 자신도 거인에게 먹히며 전멸한다.

‘절대 공포’ 거인 앞에서 만화 속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고 결전을 선택하듯, 독자들도 거인을 외면하는 대신 기꺼이 거인에게 포섭된다. <진격의 거인>의 인기에는 ‘거대한 타자’인 거인을 빼놓을 수 없다. 인간보다 크고 세기 때문에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거인은 존재 그 자체로 혼란이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격의 거인> 패러디도 인기다. 고양이를 거인에 빗댄 경기도 고양시의 ‘진격의 고양시’는 인터넷에서 화제였다. 고양시 페이스북

의사소통 안 되는 취객에게서 거인을 본 작가

“스케일이 달라요. 신도 외계인도 예수나 슈퍼맨처럼 적어도 인간의 몸을 하고 왔잖아요. 눈을 마주칠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논리적으로 갑론을박을 하거나 싸워라도 볼 수 있는데, 거인은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찍소리도 못하고 항거불능 상태에서 깔려 죽을 수밖에 없는 거죠. 당연히 ‘우리는 뭐야?’, 우리가 이렇게 하찮았어?’ 하면서 기분 나쁘고 인간 존엄성을 의심하게 돼요. 그 ‘더러운 기분’은 오늘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닮았어요. 세계는 더 넓어지고 가까워졌는데 예측할 수 있는 건 점점 줄어드는 지금을요.” 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씨가 말했다.

공포와 무력함은 만화책 속에서, 애니메이션 동영상 속에서 확장돼 현실과 겹쳐진다. 오늘,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진짜 거인은 누구일까.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거인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로 본다. “10대는 입시경쟁, 20대는 취업경쟁에 시달리면서 청년 세대는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거인에게 위협당하고 벽에 갇혀 사는 주인공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포위된 젊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들이 거인에게 불안해하고 분노하는 것에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는 셈이죠.”

한편으로 거인은 인간과 달라서가 아니라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더 혼란스러운 존재가 된다. 거인은 인체 비례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만화가 진행되면서 주인공 에렌이 거인으로 변신해 거인과 맞서 싸우고, 50m의 벽을 뚫은 거인도 결국 인간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게다가 적은 거인 하나뿐이 아니다. 전장으로 달려가는 도트 픽시스 최고 사령관에게 ‘가지 말고 자신을 지켜달라’고 하는 귀족도, 피난 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자신의 값비싼 재산을 실은 수레로 막는 부자의 모습에서도 사람의 죽음에 아랑곳 않는 거인이 보인다.

“거인은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우리는 잘 모르는 존재죠. 공포영화에서 수없이 이야기돼왔던 우리 안에 있는 악이라거나, 우리 안의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더 두렵습니다. 닮았지만 이해 불가의 영역. 지금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고는 있지만 어디로 갈지,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에 희망도 욕망도 없죠.”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의 말처럼, 이사야마 작가도 취객에게서 거인을 봤다고 고백했다. 2013년 6월1일 발행된 일본 잡지 <마음대로 독서 전설> 창간호 인터뷰에서 작가는 “밤에 아르바이트를 할 때 술 취한 손님이 오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했어요. 개나 원숭이처럼 의사소통이 안 되는 동물보다 훨씬 무섭죠. 무엇을 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같은 인간이라도 정말 싫었어요. 공포라는 건 흉포한 동물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다른 인간이 불러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진격의 거인> 패러디도 인기다. 정준하를 거인에 비유한 문화방송의 <무한도전>은 인터넷에서 화제였다. ‘무한도전’ 화면 갈무리

<무한도전> 등을 통해 패러디되는 ‘진격’

많은 사람이 거인에게 제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만, 문강형준 문화평론가는 오히려 ‘텅 빈 기표’로서의 거인을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았다. “거인은 무엇이나 될 수 있습니다. 노동자에게는 자본주의 사회일 수 있고, 자본가에게는 ‘강성노조’일 수도 있죠. 학생에게는 입시일 수도, 여자에게는 성적 폭력일 수도, 냉전주의자에게는 빨갱이일 수도 있을 겁니다. 분석하는 글마다 거인을 다양하게 상징함으로써 독자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이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일본이 준 역사적 상처가 아직 남아 있고, 중국과 일본의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우리에게 거인이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서 읽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때 거인은 중국이고, 벽 안에 갇힌 사람들이 거인을 향해 무장하는 것을 일본의 재무장화에 빗댄 해석이 나온 적이 있었다. 한반도 식민지화의 쐐기를 박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참전한 아키야마 요시후루 장군을 존경한다는 이사야마 작가의 블로그 글도 이 해석의 유력한 증거가 됐다. 가능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거인의 의미는 답이 없는 주관식이기 때문이다.

그 텅 빈 기표 속을 한편에선 2차 창작물(패러디)들이 비집고 들어간다. <문화방송>(MBC)의 <무한도전>은 정리해고를 다룬 ‘무한상사’ 편에서, 직장 동료의 구박에 화를 내는 정준하의 모습을 ‘진격의 정과장’이라고 묘사했다. 정리해고의 위협에 놓이는 아슬아슬한 노동자의 삶을 진격의 거인에 빗댄 걸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앞서 ‘명수는 12살’ 편에서도 말타기 게임 장면에서 괴력을 자랑하는 정준하를 ‘진격의 준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웃자고 한 얘기다. 경기도 고양시는 시 마스코트인 고양이를 거대 고양이로 만들어, 호수공원과 북한산 등을 누비는 ‘진격의 고양시’ 동영상을 페이스북에 띄우기도 했다. 잔혹한 거인이 한순간에 귀여운 고양이로 탈바꿈됐다. 5월13일 <경향신문> 4컷 만화 ‘장도리’에서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을 ‘진상의 거인’으로 패러디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 지점에선 거인은 윤창중이다. 시사적이고 풍자적이다.

<진격의 거인>의 반대말은 ‘반격하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거인보다 오히려 인간이 더 매력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거대한 적이 쳐들어온다는 건 <울트라맨>, <신세계 에반게리온>에서 이미 나온 익숙한 소재예요. 그런 점에서 오히려 신선한 건 거대한 적들과 맨손으로 싸우는 인간이죠. 거대한 타자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조사병단이라는 존재요. 영화 <어벤져스>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이유 중 하나가 팀플레이예요. 팀을 이뤄 싸우다 죽는 이들이 주는 비장미가 와닿는 것 같아요.”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의 말처럼, 주인공들은 ‘잇쇼켄메이’(‘자기가 맡은 한 가지에 목숨을 거는’ 일본인들의 전통 관념) 정신으로 싸운다. 아버지 세대는 하다못해 경제 발전이나 민주화라는 대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2030세대는 다르다. 무한경쟁 시대에 더 좋은 성적, 더 빠른 취업을 위해 자신에게 몰입하느라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사람은 때론 자기에게 결핍된 것에 끌리기도 한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는 한발 나아가 비극적으로만 보였던 <진격의 거인>이 ‘인간 문명은 우리를 막는 거인을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보주의적 기운이 넘치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주인공들은 ‘세계는 원래 잔혹하다.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지옥이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잔혹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죽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고도 말하죠. 거인에 비해 초라하지만 의지로 거인을 이길 수 있다는 ‘의지를 통한 자기극복’을 역설합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거인보다 약하지만 거인이 될 수 있는 존재고, 거인은 인간보다 강하지만 의지가 없기에 절대 거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거인보다 더 큰 존재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 안에는 싸울까 말까를 고민하는 인간, 삶 속에서 좌절을 줬던 ‘넘을 수 없는 벽’ 거인이 함께 공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김대천씨가 말한 ‘북유럽 신화’로 돌아가면 그 끝은 멸망이다. <진격의 거인>의 끝이 신화처럼 멸망일 수도 있다. 거인의 멸망일지, 인간의 멸망일지는 모르겠다. 다만 문강형준 문화평론가의 말이 발목을 잡는다. “인간을 잡아먹는 행위는 인간의 관점에서만 악한 것 아닐까요? 오히려 지구의 관점에서는 마구잡이로 문명을 발전시키는 인간이 더 악한 존재이지 않을까요?”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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