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외주제작사들이 종편에 질린 이유
턱없는 제작비로 품질 저하12개 프로그램이나 없앴으니
개국 석달, 판타지는 깨지고
“외주제작 환경 나빠졌다”
불공정 거래 개선한다더니
“지상파·케이블보다 후지다” ‘ㄱ외주제작사, ㄴ종편사, ㄷ제작사’. 기사에 ‘ㄱ ㄴ ㄷ’이 나란히 등장한 이유가 있다. 외주제작사나 외주제작 피디가 방송사에 밉보이면 어떤 좋은 프로그램 기획안을 제시한다 해도 해당 방송사와 다시는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것이 업계의 상식이다. 종편의 일방적 조기종영 결정으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제작사의 대표들은 “기사에서 회사나 내 이름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면 우리는 끝”이라며 입 모아 익명을 요구했다. 이성규 감독의 ‘투항’은 지난해 12월 언론계를 뜨겁게 달군 뉴스였다. 2007년 한국독립프로듀서협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 감독은 종합편성채널(종편) 출범의 법적 근거가 된 언론법 개정안 등 이명박 정부의 언론정책에 앞장서서 반대해온 대표적 독립 피디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래된 인력거>로 국내외에 이름을 널리 알린 유명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이 감독이 ‘혈육 같은 작품’ <오래된 인력거>를 지난해 종편 <채널에이>에 개국 특집 프로그램(12월4일 방영)으로 넘겼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와 함께 종편 반대 투쟁에 나섰던 언론계 선후배는 그를 ‘종편 부역자’로 몰아붙였다. 종편 부역 논란이 가라앉고 두달여의 시간이 지난 16일 밤, 그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오래된 인력거’ 이성규 감독의 후회 “종편이 제시한 방영 계약조건은 환상적이었어요. <…인력거>에 들어간 제작비가 3억5000만원이었습니다. 지상파든 종편이든 어차피 그들이 외주제작 피디에게 방영 조건으로 제시하는 제작비는 거기에 한참 못 미칩니다. 대신 지상파는 쥐꼬리 제작비의 대가로 영상물에 대한 모든 판권을 가져갑니다. 채널에이는 티브이 방영권 이외의 저작물 판권은 건드리지 않았어요. 저는 극장 개봉 등으로 모자란 제작비를 일부 채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온갖 욕을 먹으며 지상파가 아닌 종편과 손잡은 것은 이런 계약조건이 다른 외주제작사나 외주제작 피디에게도 이어지기를 원했던 겁니다.” 종편과의 거래를 통한 외주제작비 현실화와 지상파 독점구조에서 비롯하는 불공정 외주계약 관행의 개선, 이 감독은 자신이 꿈꾼 장밋빛 전망에 대해 “착각이었고 (종편과의 거래는) 결과적으로 안 좋은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또 그는 “<…인력거>를 채널에이에 넘긴 뒤 종편 프로를 맡고 있는 선후배 외주제작 피디들에게서 낮은 제작비로 인한 어려움, 심지어 3개월짜리 어음으로 제작비를 지급하는 사례 등을 계속 접하고 있다”며 “개국 한달 만에 종편에 대한 판타지는 깨졌다”고 말했다. 개국 석달째, 종편 4개사와 외주제작사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한겨레>가 지난 9일부터 15일까지 일주일간 독립제작사협회 소속 외주제작사 대표 37명을 상대로 실시한 ‘종합편성채널 등장과 외주제작 환경의 변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응답자의 절반을 넘는 20명이 종편 출범 이후 외주제작 환경은 “더 악화됐다”고 평가했다. 반면 “더 나아졌다”고 대답한 사람은 이보다 훨씬 적은 4명이었다.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고 말한 사람은 13명이었다. 개국 전까지만 해도 종편 출범을 승인한 방송통신위원회와 종편 4개사는 종편 출범의 명분으로 외주제작 활성화와 방송사와 외주제작사의 공정한 거래환경 조성, 이를 통한 국내 방송 콘텐츠 산업의 확대 등을 내세웠다. 시장논리로 접근하면 그럴듯한 주장이었다. 지상파 3개사가 채널을 과점하고 있던 지난해까지 외주제작사에 대한 방송사의 ‘제작비 후려치기’는 업계의 고질적 병폐였다. 방송사의 일방적 조기종영 결정도 제작사 입장에서는 경영상의 불안 요인이었다. 이런 가운데 드라마와 예능·교양·오락·보도프로그램을 모두 편성할 수 있는 종편이 4개씩이나 등장한다는 것은 외주사에 한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방송사가 발주하는 제작물량이 많아지니 제품, 곧 방송 콘텐츠의 가치가 올라갈 것이고 그만큼 수익도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였다. 적어도 이번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이런 기대는 허상이었다. 협찬사 항의에 ‘시청률 핑계’ 대며 없애기도 종편 등장으로 외주제작 환경이 나빠졌다고 응답한 외주사 대표가 그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것(복수 응답)은 ‘종편사가 제시하는 낮은 제작비’였다. 17명의 선택이었다. 이어 ‘조기종영 등 일방적인 제작중단 요구’가 종편의 문제라는 대답도 11명한테서 나왔고, ‘일방적 편성 변경’으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한 사람은 10명이었다. 4명은 ‘제작협찬 강요 등 제작사에 대한 무리한 요구’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ㄱ외주사 대표는 “종편 개국과 함께 3개 종편사와 손잡고 4개 프로그램의 제작을 진행했는데 한달 만에 이 가운데 3개가 내려갔다”며 “지상파 방송사는 물론 케이블티브이보다 후진적인 방송이 종편”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인지도 낮은 케이블 방송이라도 한달 만에 조기종영하는 경우는 없어요. 방송 개편에 앞서 파일럿(시험용) 프로그램을 먼저 내보낸 뒤 정규편성 여부를 결정하니까 한번 편성하면 최소한 석달은 가는 겁니다. 그런데 종편은 자기들 개국이 급하다 보니 외주 프로그램 사다가 여기저기 꽂아넣고, ‘시청률이 안 나온다’, ‘채널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등 갖은 핑계를 대며 제작사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실제로 2월17일까지 종편 4개사가 한두달 만에 조기종영한 프로그램으로는 △<제이티비시>의 <우보기행>, <원더풀 코리아>, <된장과 바게트>, <깜놀 드림프로젝트>, <행복카페> △<엠비엔>의 <노홍철의 스타바이트>, <더 듀엣>, <매일음악회> △<티브이조선>의 <수취인불명 편지>, <시사코미디 10PM> △<채널에이>의 <아트스쿨>, <친절한 의사들> 등 12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제이티비시가 개국과 함께 “매주 일요일 아침, 바쁜 도시인들의 무뎌진 감성과 잃어버린 낭만을 되찾아주는 감성여행이 시작된다”며 시작한 <우보기행>은 단 한 차례 방송된 뒤 사라졌다. 심지어 ㄴ종편사는 ㄷ제작사와 1년 계약을 맺고 한달여 동안 내보냈던 방송 프로그램과 관련해 낮은 시청률을 이유로 다음 회차 촬영을 하루 앞두고 제작사에 종영을 통보했다. 이 제작사 대표는 “종편 프로그램 가운데 시청률이 낮지 않은 프로는 없다”며 “방송사의 잦은 편성시간대 변경에 대해 협찬사에서 항의가 들어오니 그냥 없애버리겠다며 시청률을 핑계로 내세운 것”이라고 말했다. 외주제작사 처지에서 조기종영이란 곧 막대한 손실을 의미한다. ㄹ외주제작사 대표는 “기획비도 주지 않으면서 한두달 만에 프로를 내려버리는 것은 최소한의 상도덕을 어긴 것”이라고 말했다. “외주제작사가 방송사로부터 프로그램 제안을 받고 제작을 시작하려면 방송 시점보다 최소한 두달 이전에 피디와 작가를 배치하고 방송세트를 마련해야 합니다. 종편이 이런 기획비를 줍니까. 편당 제작비도 빠듯한데 기획비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초기 투자비 뽑아낼 여유도 없이 방송을 그렇게 일찍 내려버리면 외주제작사만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외주제작사 가운데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제작사라면 종편에 대한 미련을 접고 다시 지상파나 기존 케이블 방송과 손잡으면 된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제작 능력이 떨어지는 제작사는 여전히 종편이 제시하는 낮은 제작비를 감수하고 프로그램을 맡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ㅁ제작사 대표는 “편당 제작비를 아무리 낮게 잡아도 2000만원은 받아야 하는 프로그램인데 1500만원 이상은 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도 제작을 맡았다”며 “방송 시작 이후 제작비 절감을 위해 야외 세트촬영 등 돈 들어가는 스케줄은 모두 빼고 줄곧 방송사의 실내 스튜디오를 활용했다”고 말했다. 방송의 질적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외주제작사 대표 37명 가운데 27명은 지상파 및 기존 케이블 방송에 견줘볼 때 종편 프로그램의 전반적 수준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더 낫다”는 응답은 단 한명뿐이었다. 90%가 “종편 개국 석달, 실망스럽다” 종편 개국 석달의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 37명의 90%가 넘는 34명이 “실망스러웠다”고 평가했다. 개국 이후 가장 성공적으로 방송을 해온 방송사에 대해서는 전체 36명의 유효 응답자 가운데 21명이 ‘없다’고 대답했고 그다음으로는 제이티비시(8명), 티브이조선(5명), 엠비엔·채널에이(각 1명) 순서였다. 반면 개국 이후 가장 실망스러운 방송사로는 34명의 유효 응답자 가운데 12명이 티브이조선을 꼽았다. 그다음으로는 채널에이(9명), 제이티비시(6명), 엠비엔(2명) 등이었다. 이번 설문조사는 전화 및 전자우편 방식으로 진행됐고, 외주제작사 두 곳은 대표를 대신해 방송제작본부장 및 국장이 설문에 응했다. 한편 방송 프로그램 조기종영에 따른 외주사의 불만과 관련해 제이티비시 쪽에서는 “방송을 새로 시작하는 처지에서 예정보다 일찍 종영한 프로그램이 일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청자 반응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이상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지상파의 관행에 비춰봤을 때 우리의 조기종영 비율이 많은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고 밝혔다. 엠비엔 쪽에서는 “투입한 제작비에 견줘볼 때 터무니없이 낮게 나오는 시청률, 만족스럽지 않은 프로그램 완성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안세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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