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르포
허수경 시인의 도시
최근 에세이 개정판 낸 허수경 시인
첫 시집 뒤 30년, 독일서 말기암 투병
유품 정리하듯 혼자서 언어들 정리
그의 책 싸들고 그의 도시 찾아간 길
시인이 주검 본 남강은 축제 준비
중앙시장 꽃밥과 진주문고 낭독회
허공 못 견뎌 도착한 독일 뮌스터
혼자 걷는 이방인으로 다음 역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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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허수경 시인이 먼 곳으로 가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 어른들 틈에 끼어 기차를 기다리던 옛 진주역(경남 진주시 강남동). 기차 선로 쪽에서 바라본 역 건물 뒷면이다. 2012년 역사 이전 뒤 식당으로 개조됐다. 앞에서 보면 역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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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서 말기암 투병중인 허수경 시인이 에세이집 개정판을 최근 냈습니다. 그는 한국으로부터의 병문안을 거절하며 그동안의 언어를 조용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진주로 갔습니다. 진주, 봉천동, 원당, 광화문, 여의도, 그리고 독일 뮌스터. 그의 시집과 에세이들을 가방 한가득 짊어지고 그의 도시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가 현재 있는 도시에 가지 못한 채 그가 떠난 도시들을 헤맸습니다.
그의 도시를 헤매고 다녔다.
“2018년 허수경입니다”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 나의 도시 안에서 가엾은 미래를 건설하던 시인들 울고 (…) 나의 도시 나의 도시 당신도 젖고 매장당한 문장들 들고 있던 사랑의 나날도 젖고 (…) 정치여, 정치여, 살기 좋은 세상이여, 라고 말하던 사람들 산으로 올라가다 잠기고.”(시 ‘나의 도시’)
그의 도시에 가보고 싶었다. 물에 잠기는 생명들을 보며 시인이 울고, 시인의 매장당한 문장들이 파헤쳐져 물에 젖고, 혼잣말하던 정치가 사람을 버리고 도망치다 물에 붙잡힌 도시. 시인의 머릿속에선 이미 멸망해버렸을 수도 있는 그 도시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장 하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출간된 에세이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2003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개정판)에 그가 육필로 새긴 짧은 문장이 있었다.
“2018년 허수경입니다.”
흘려 쓴 그(54)의 이름 세 글자가 이상하게도 말라가는 명태처럼 보였다. 그는 시집 등을 낼 때마다 ‘시인의 말’에 출간 연도와 이름을 남겨왔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므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1988년 11월 허수경.”(<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나는 이제 떨쳐 떠나려 한다. 1992년 4월 허수경.”(<혼자 가는 먼 집>) “전쟁을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反전쟁에 대한 노래 (…) 2005년 가을, 알텐베르그에서 허수경.”(<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목이 쉬어가면서도 임을 부르는 곡을 해야겠다 싶었기에 (…) 2010년 겨울 허수경.”(<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그리움은 네가 나보다 내 안에 더 많아질 때 진정 아름다워진다. (…) 2018년 7월1일 허수경.”(<그대는 할말을…>)
그는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을 두 권 내고 고향과 서울을 떠나 남의 나라(독일)에서 엎드려 책 읽고 남의 시간을 발굴하는 일에 종사하면서”(<빌어먹을…>) 26년을 보냈다.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동방문헌학을 공부했다. 그 나라에 머물며 시집 4권과 소설 3권, 에세이 4권, 동화 3권, 번역서 3권을 더 냈다. “2018년 허수경입니다”는 ‘2018년 아직 살아있습니다’로 읽혔다. 손글씨 문장을 책에 넣으며 편집자 김민정 시인이 독일의 소식을 전했다.
“말기암을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 일체의 망설임도 보이지 못하고 재차 물음도 건넬 수가 없었습니다. 시인이 머물고 있는 그곳, 독일의 뮌스터에서 홀로 제 생을 정리하고 싶다며 아주 단호하게 그 어떤 만남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 시집이 나온 지 30년이 됐다. 유품을 정리하듯 시인은 혼자 그의 언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8’ 다음의 숫자가 그의 이름 앞에 몇 차례 더 적힐지 알 수 없었다. 그 조바심이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먼발치에서도 본 적 없는 시인의 도시를 찾아가도록 떠밀었다.
“우연한 감염”
시인이 기다리던 기차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광주에서 168.9㎞, 전주에서 177.4㎞, 서울로부터 375.2㎞. 그 자리에 옛 진주역(경남 진주시 강남동)이 있었다. 어린 시절 시인이 “먼 곳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너 없이 걸었다>) 찾아간 기차역이었다. “사람들이 봇짐을 이고 여행 가방을 질질 끌며 기차표를 간수에게 보여줌과 동시에 역문을 지나”가는 모습을 기차표 없는 시인은 부러워하며 바라봤다. 표를 가진 어른들 등 뒤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멀리 있는 도시” 삼척(어린 시인은 그렇게 믿었다)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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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고(평거동)는 허수경 시인의 책을 별도로 분류해 진열하고 있다. 지난달엔 시인의 시를 읽는 낭독회도 열었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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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득 그의 책들을 짊어지고 그가 다시 밟을지 알 수 없는 도시를 쏘다녔다. 책장에 꽂혀 있던 그의 시집·에세이들과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 20여권을 가방에 빽빽하게 밀어 넣었다. 그 무게를 어깨로 느끼며 9월11일 진주를 걸었다. 가방 가득한 시어와 낱말들이 다리에 내려앉아 걸음이 느렸다.
시인이 기차를 기다리던 역사(驛舍)에서 이젠 손님들이 냉면을 기다렸다. 가난과 피곤이 피워 올리는 사람의 몸 냄새 대신 고기 굽는 냄새가 식당으로 바뀐 역(1925년 6월 강남동에서 영업개시~2012년 10월 가좌동으로 이전)을 채우고 있었다. 역장실은 룸으로 사용됐고 대합실이던 주방에선 냉면을 삶아냈다. “여러 차례 보수했지만 일제 강점기 때의 양식이 남아 있다”며 식당(폐쇄된 역사를 코레일에서 임대) 주인이 나무 천장을 가리켰다.
진주. 그가 처음 “문장의 방문을 받”은(문장의 방문) 도시였다.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우연한 감염)이었다. 그는 1964년 진주에 감염됐다. “낮은 한옥들, 골목들, 그 사이사이에 있던 오래된 식당들과 주점들”과 “그 인간의 도시에 새어나오던 불빛들”은 그의 “정서의 근간”이었다. “불러야 할 이름 석 자 도처에 깔려 있어 시를 쓸 만 한 땅”(진주초군)이었다.
남강은 한창 유등축제(10월1일~14일)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작 완료된 유등들이 진주교를 사이에 두고 강가 위아래로 정박돼 축제를 기다렸다. 다리 옆에선 수상 무대를 설치하는 기계 소리가 요란했다. 시인과 친구들의 놀이터였던 남강 모래사장은 잘 정돈된 수변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인이 진주를 생각할 때 기억의 맨 밑바닥에 눌러놓은 침전물은 남강과 연결돼 있었다.
강 건너 대나무 숲 위로 지는 햇빛이 내리던 시간이었다. 어린 허수경은 모래사장에 묻힌 한 아이의 주검을 봤다. 유괴범에게 목 졸려 살해된 같은 초등학교 상급생이었다. “지금도 이 세계 곳곳에서 날뛰고 있는 폭력, 대항할 수 없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보면”(<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 그 모래밭을 떠올렸다. 초경의 날 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피가 흐르는 두려움 때문에 집으로 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던 장소도 남강이었다. “지금도 여자인 태생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 때 그 강변”이 들이닥쳤다.
사춘기의 그는 “우울한 소녀”였다. “누가 놀리면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었”다.
“나는 혼자였고 외롭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하는 실존을 가졌다. 그것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그대는 할말을…>)
1988년 첫 시집을 묶을 때 <실천문학> 주간이던 소설가 송기원은 ‘우울한 소녀’의 시에서 “사람을 사로잡는 괴물 같은 힘”을 봤다.
“몸 없는 유령”
진주중앙시장(대안동)에서 ‘꽃밥’을 받았다. 젓가락으로 꽃을 가만히 헤쳐 봤다. 더운 국으로 토렴한 흰쌀밥 위에 나물과 육회를 고명으로 얹은 비빔밥이었다. “모양이 하도 고와서 꽃밥”(<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이라고 그는 불렀다.
오랜 단골들이 끼니때마다 찾아와 작은 식당에서 꽃밥을 먹었다. 한국에 있을 때 시인도 늙은 어머니와 식당에 마주앉아 그 밥을 먹었다. “진주가 그리울 때면 독일에서도 밥을 한 상 차려놓고 열심히 먹었”다. 그가 아프다는 소식에 후배 시인 박준도 독일로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진주로 갔다. 그는 중앙시장에서 비빔밥을 먹고 선배가 졸업한 고등학교 주변을 걸었다.
진주의 시인을 진주의 독자들이 아꼈다. 진주문고(평거동)에서는 그의 시집과 책들을 따로 분류해 진열하고 있었다. 지난달엔 서점에 모인 독자들이 그의 시를 읽으며 투병중인 시인에게 마음을 전했다. 책방을 나오며 <그대는 할말을…>을 한 권 더 샀다. 그의 책으로 꽉 찬 가방에 끼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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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된 옛 진주역을 개조한 식당 내부. 식당 벽엔 ‘냉면역’이 그려져 있고, 역장실(사진의 화장실 오른쪽 옆)은 룸으로 바뀌었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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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시인은 “뼈를 세우고 살점을 키워준” 진주를 떠났다. “세상은 꿈이 아니고 세상은 뻘밭 구덩이임을 진즉 알았어야”(남강시편 1) 하지만 “밥을 벌기 위해” 서울로 갔다.
봉천동(관악구). 진주를 두고 온 그의 첫 도시였다.
“봉천본동 개나리 누런 바람 그해는 유난히 배가 고팠네 (…) 저물어 저물어가던 봉촌본동 개나리 누런 입술 위를 슬몃거리던 바람도 아흐 집집마다 슬레이트 지붕 위로 덮쳐오던 저무는 봄밤.”(저무는 봄밤)
방송국 스크립터 생활을 하면서부턴 이태원(용산구)과 원당(경기도 고양시 덕양구)과 광화문 셋방으로 옮겨 다녔다.
“서울 처음 와서 처음 뵙고 이태 만에 다시 뵙게 된 어른이 이런 말을 하셨다 자네 얼굴, 못 알아볼 만큼 변했어 나는 이 말을 듣고 광화문, 어느 이층 카페 구석 자리에 가서 울었다.”(먹고 싶다…)
여의도. 그 도시의 “허공”에서 그는 일했다.
“언제나 과로를 해야 겨우 집값을 내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삶의 조건”이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자주 기침을 했으며 어지러”웠다. 그는 허공에서 내려와 1992년 늦가을 독일로 갔다. 두 번째 시집(1992년 5월)을 낸 직후였다. 시집 제목이 <혼자 가는 먼 집>이었다. “제목을 정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나라는 자아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그에게 왔다.
뮌스터. 인천공항에서 열 시간 비행기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 다시 기차로 네 시간을 달려야 닿는 도시였다.
독일에서도 그에겐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작은 방 하나만을 지상에 얻어 놓고 유랑을 하는 것처럼 살면서 공부했”다. “여름방학이면 그 방마저 독일에 두고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그 나라에서 그는 “혼자 걸어다니는 이방인”(<너 없이 걸었다>)이었다. “세계의 노예가 될 수 없어” 스스로 선택한 “위치”였다.
“오랫동안 몸 없는 유령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낯섦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
독일어 시들을 읽을 수 있게 됐을 때 그는 배낭에 시집을 넣고 도시를 걸었다. 이방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그는 도시를 드문드문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뮌스터를 걸으며 그는 그 도시에 살던 이방인들의 영혼과 마주했다. 나치 시절 낙인 찍혀 끌려간 뒤 돌아오지 못한 집시와 극빈자와 소수자들을 생각했다. 어느 밤 도서관에 앉아 1885년 발굴된 도시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는 쓰레기통을 비우는 검은 얼굴의 청소부를 보며 스스로를 봤다. 그는 “폐허가 된 옛 도시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고,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사무치게 알았”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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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남강에 10월1일부터 시작되는 축제에 참여할 유등들이 정박돼 있다. 시인이 졸업한 학교 이름이 붙어 있다. 시인이 진주를 생각할 때 기억의 맨 밑바닥에 눌러놓은 침전물은 남강과 연결돼 있었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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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옛 진주역. 어린 시인이 “떠나고 도착하는 사람들을 기웃거리다 창문 너머로”(<너 없이 걸었다>) 까치발을 들고 바라보던 기차 선로는 잡초와 수풀로 가득 덮여 있었다. “철도로 난 풀을 밟고 기차가 사라질 때 그 독하던 풀 냄새”(달 내음)도 기억 속에만 있었다. 텅 빈 차량정비고(등록문화재 제202호)에선 개 10여마리가 소리 내어 짖으며 사람의 접근을 막았다.
“더 이상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2001년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시인의 말)라고 시인은 오래 전 독일에서 썼다.
“내가 나를,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살아갈 것이다.”
독일 생활 26년 동안 그는 세 차례 한국에 왔다. 두 권의 책(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과 소설 <박하>)을 낸 2011년이 마지막이었다. 잠 들지 못하는 밤을 달래며 그가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때 그 역으로 더는 기차가 들어오지 않았다. “폐역”이란 두 글자가 역 이름에 따라다녔다. 언제부턴가 시인이 가진 기차표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2016년 출간된 마지막 시집 제목)을 향했다.
“기차는 철로에 앉은 비둘기들을 몰아내며 들어왔고 비둘기들은 도시의 눅눅한 하늘로 흩어졌으며 나는 기차를 탔다. 차창 너머로 보랏빛 시집 제목이 보였다. 내 목적지인 것 같았다.”
그가 있는 뮌스터엔 가지 못한 채 그가 떠난 도시들을 배회했다. 그의 도시에 가려고 나섰으나 그 도시가 어디인지 결국 찾지 못했다.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그를 기억하는 도시들엔 그가 없었고, 그가 살고 싶어 한 도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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