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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8일 이우13기 백두대간 종주탐사대 대원들이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고 있다. 왼쪽 맨 아래 사람이 시연 아빠이자 기획대장으로 참여한 필자. 이천호 특임대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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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중2 딸과 백두대간 700㎞
중학생 딸 “백두대간 가자” 부탁
농성·출장·수배로 미안한 마음에
노동운동가 아빠 덜컥 “그럴게”
박근혜 파면 다음날 첫 산행부터
술 먹고 나갔다 멀미로 너덜너덜
딸과 못한 이야기 하고 싶었으나
사진 한 장만 찍어줘도 감지덕지
천왕봉~진부령 암봉 타며 완주한
학생들 얼굴은 어느 때보다 빛나
‘인생대간길’ 협력하며 함께 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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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8일 이우13기 백두대간 종주탐사대 대원들이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고 있다. 왼쪽 맨 아래 사람이 시연 아빠이자 기획대장으로 참여한 필자. 이천호 특임대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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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을 하는 아빠는 딸에게 늘 미안했습니다. 함께 있어주기보다 농성, 출장, 수배로 졸업식과 입학식에도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돈 못 버는 남편이라 아내에게도 미안했습니다. 저질체력이 돼 버린 아빠에게 어느 날 딸이 백두대간 종주를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거절하지 못하고 시작한 산행. 하필 첫날이 박근혜 파면 다음날이었습니다. 만취 상태로 나선 첫 산행 이후 딸도, 아빠도, 함께한 부모들 모두 까지고 긁히면서도 서로 손 붙잡는 ‘인생대간길’을 배워갑니다.
양쪽 무릎 앞뒤로 테이프를 붙였다. 지난겨울 허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산행하다 부상을 입은 뒤로 산행 때마다 정성껏 테이핑을 한다. 무릎보호대를 착용하고 배낭을 멘다. 무겁다. 개인 짐도 많은데 학생들과 먹을 불고기와 김치, 딸 시연(15)이가 떠넘긴 옷가지들까지 등산배낭이 터질 지경이다.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숨이 가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백두대간의 8부 능선을 걸었는데도, 첫 오르막길은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13기 백두대간 종주탐사대’ 37차 산행. 9월8~9일 한계령을 출발해 대청봉을 거쳐 마등령까지 이어지는 1박2일 설악산 종주다. 참가자 58명 중 학생은 26명, 대부분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다.
힘을 내 한걸음씩 내딛는데 딸 시연이가 여학생들과 ‘쌩’ 하고 지나간다. ‘대간길’을 걸으며 아빠와 딸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은 애당초 꿈이었다. 딸의 시야에 아빠는 없다. 남학생들도 마찬가지. 무서운 중2에게 엄마 아빠는 관심 밖이다.
아침 10시. 출발 두 시간 만에 서북능선 삼거리에 도착했다. 눈부시게 청아한 날씨, 쪽빛 하늘을 품은 내설악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날카로운 바위 봉우리들이 성처럼 솟아 있는 용아장성. 풍경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는다. 집에서 싸 온 도시락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 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1박2일 짐이 천근 무게로 어깨를 짓누른다. 말이 줄어들고 숨이 거칠어진다. 짙푸른 동해바다와 발아래 펼쳐지는 운해가 고행길을 위로한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중청봉이 나타났다. 대피소에 가방을 놓고 대청봉을 향해 오른다. 대청봉 표지석에서 시연이가 아빠와 사진을 찍는다. 딸을 졸라 동해를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더 찍는다. 딸과 사진을 찍다니. ‘재수’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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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8일 설악산 대청봉에 오른 아빠(박점규)와 딸(시연)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최석규 행사대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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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저질체력
지난해 2월이었다. 이우중학교(경기도 성남시 동원동)에 입학한 딸이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싶다고 했다. 농성, 출장, 수배를 이유로 딸은 아빠를 만나지 못한 날이 많았다. 어린이집 해보내기 잔치와 졸업식, 초등학교 입학식과 주요 행사에도 아빠는 없었다. 등산과는 어떤 인연도 없이 살아왔는데 백두대간이라니…. 암담했지만 덜컥 딸과 약속하고 말았다. 어떤 모임인지 궁금해 광교산(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예비산행에 참여했다가 여차여차해서 ‘기획대장’이라는 자리까지 맡았다.
아빠는 늘 바빴다. 지방 출장이 많았고 평일에도 늦게 귀가하는 날이 잦았다. 딸과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백두대간, 어차피 시작한 고난의 길이라면 딸과 친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평소 산을 멀리했지만 딸과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만사를 제쳐놓고 백두대간에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1차 산행일(2017년 3월11일) 전날은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탄핵 심판일이었다. 2016년 11월5일 광화문광장에서 블랙리스트 문화예술가들과 비정규노동자들이 시작한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 일원으로 헌재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결정문을 듣고 송경동 시인과 낮술을 먹기 시작했다. 만취 상태로 귀가해 30년 전 구입해 장롱 서랍에 처박아놓은 빨간 등산 가방을 꺼냈다.
경기도 용인에서 출발한 버스가 전북 남원으로 향했다. 고기리~통안재 백두 4구간 16㎞. 학생과 학부모 119명이 참가했다. 술이 깨지 않아 내내 멀미에 시달렸다. 숨이 차오르고, 발은 아파오고, 되돌아갈 수도 없고, 울고 싶어졌다. 딸은 아빠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친구들과 사라졌다. 고남산(남원시 운봉읍과 산동면 경계에 있는 백두대간의 산)에 올라서야 술이 깼고, 너덜너덜한 상태로 하산했다. 그렇게 백두의 늪에 빠져 2주마다 산을 타게 됐다. 주말마다 있는 집회도, 집안 행사도 둘째·넷째 주 토요일에 걸리면 고개를 돌렸다. 딸과 아빠는 총 47일의 산행 중 44일을 완주했다. 10월27일 산행(대간령~진부령)을 하면 백두대간 종주가 끝난다. 전 구간을 다 걸은 완주는 18명(47일 참가), 종주는 30명(20일 이상 참가) 정도 될 것 같다.
‘백두대간 종주탐사대’는 이우중학교, 성심원(경기도 용인 수지구 보육시설), 청소년단체(함청)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지리산 천왕봉에서 설악산 진부령까지 700㎞가 넘는 백두대간을 완주하는 동아리다. 중학교 1학년 3월에 시작해 이듬해 10월에 마치는 2년짜리 프로젝트로 2005년 처음 시작해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탄핵 다음날 종주 시작
“이우학교 백두대간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환영합니다.”
소청대피소 산장지기의 안내 방송이 아이들을 반긴다. 대장들이 4인분씩 나눠 짊어지고 온 소불고기를 꺼낸다. 불고기 김치찌개와 햇반으로 차려진 저녁상. ‘왕후의 밥 황제의 찬’이다. 밥과 고기가 학생들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 녀석은 햇반 4개를 먹는다. 학생들이 쓰레기를 비닐에 담아 가방에 넣는다. 기특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더니 노을이 붉게 물든다. 쉽게 보기 힘들다는 소청의 일몰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다. 멀리 불빛이 반짝거린다. 강원도 고성 뒤편으로 보이는 험준한 산줄기. 남쪽 백두대간의 끝 진부령을 이어 금강산으로 향하는 북쪽 대간길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등줄기. 로저 셰퍼드씨는 세계 최초로 남과 북의 백두대간 전 구간을 완주하고 지난해 ‘봄과 여름의 북(北)백두대간’ 사진전을 열었다. 8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노르웨이인과 함께 5박6일 백두산 트레킹을 했다. 우리는 언제쯤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영상대장 도엽 엄마가 레이저를 쏜다. 견우성과 직녀성을 잇는 은하수, 북극성과 북두칠성, 반대편 하늘의 목성과 금성을 비춘다. 깊은 밤 별자리 강의에 흠뻑 젖어든다.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인데 학생들은 놀이에 빠져 있다. 9시간 산행에 힘들었을 텐데 조잘대고 깔깔대고 춤추고 노래한다. 쑥덕쑥덕 쫑알쫑알 재잘재잘…. 기상청 누리집을 보니 점심부터 비가 온단다. 시간당 20㎜까지 늘어난다. 출발시간을 앞당기기로 하고 학생들을 재운다. 불을 끄자 순식간에 꿈나라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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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12월 이우13기 백두대간 종주탐사대 대원들이 고남산을 오르고 있다. 문성수 사진대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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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령휴게소에서 만난 호텔 셰프
지난해 3월25일 2차 산행 때였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산 정상에 이르자 눈보라로 돌변해 백두 초보자들을 덮쳤다. 추위에 벌벌 떨고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백두의 위력을 실감했다. 호기심에 몰려왔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산행 인원이 두달 만에 80명에서 50명으로 줄었다.
작년 여름 속리산. 갈령~문장대 16㎞는 여름 산행의 혹독함을 알려준 구간이었다. 땀이 샘처럼 흘러내렸고 몸은 젖은 휴지처럼 흐물거렸다. 둘째 날 산행을 포기하고 계곡에서 놀았다. 지난 3월10일 강원도 영월 건의령~댓재 구간. 기획대장인 내가 종주팀에 공지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영하 18도, 눈보라가 치는 겨울 산행의 기억을 뒤로하고, 봄의 기운이 가득한 백두대간을 걷습니다.”
산행 전날 강원도에 폭설이 내렸다. 등산객의 발자국이 사라졌고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밟아 길을 만들며 걸었다. 더 이상 가다가는 조난당할 상황, 등산을 포기하고 하산했다. 여럿이 무릎을 다쳐 한동안 치료를 받았다. 서울의 봄은 강원도의 한겨울이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긴 날이었다.
백두대간의 진수 가을 지리산(천왕봉~성삼재), 설경이 장관이었던 겨울 덕유산(향적봉~빼재), 새벽별과 일출이 황홀했던 봄 소백산(죽령~늦은목이)은 기회가 된다면 다시 가보고 싶은 비경이다. 높은 산은 깊은 골을 이룬다. 경북 문경 용추계곡, 강원도 인제 진동계곡은 폭염에 지친 도시인들에게 ‘8월의 크리스마스’를 선물했다.
백두대간은 산과 사람을 이어주었다. 노동운동을 하다 전남 남원 산내면으로 귀농한 양선배 전 금속노조 대한이연지회장은 지리산 자락 4차례 산행에서 친환경 음식과 동네 막걸리로 대원들을 반겼다. 육십령휴게소 셰프 조철 전 워커힐호텔 노조위원장은 요리사복 왼쪽 가슴에 세월호 리본을 달고, 손수 구운 바비큐와 돈가스로 천상의 맛을 선사했다.
전북 장수하늘소마을로 귀농한 김재호, 주영미, 이정영 선배는 덕유산 1박2일 산행 숙소로 찾아와 유기농 쌀막걸리를 선물했다. 속리산과 문경새재 1박2일 산행 때는 희양산우렁쌀작목반 식구들이 만든 친환경 음식을 먹고, 노조 간부들이 만든 협동조합 가은수련원에서 몸을 뉘었다. 강원도 삼척으로 떠난 산행. 지금은 정규직이 된 삼표동양시멘트 해고노동자가 만들어 준 오징어 숙회는 지금도 회자되는 일품 요리였다. 백두대간 길목에서 만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고된 산행길의 큰 기쁨이었다.
백두는 아이와 부모의 관계를 ‘해체’시켰다. 산행 초반, ‘핵후미’를 벗어나지 못했던 도엽이는 엄마 곁을 맴돌며 칭얼거렸다. 회를 거듭할수록 엄마로부터 멀어져가더니 설악산 종주에서는 힘들어하는 친구의 멋진 안내자가 됐다. 의존하던 아이들이 독립하고, 자기밖에 모르던 학생들이 주위를 둘러보게 된 시간, 백두대간이 고맙다.
‘백포맘’들이 비옷도 없이 비를 맞으며
설악산 2일차 새벽 3시30분. 물을 끓이고 학생들을 깨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전투식량으로 공복을 채우고 물병을 보충한다. 희운각에서 마등령으로 향하는 마의 구간을 올라야 한다.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암석 봉우리. 공룡의 등을 닮아 이름 붙인 공룡능선은 전국 국립공원 100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절경이다. 희양산과 함께 백두대간 최고 난도로 꼽힌다.
뒤늦게 백두를 시작한 예린(15)이는 20회 산행, 종주가 목표다. 쉬운 천불동 계곡 코스를 마다하고 공포의 공룡능선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41명이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눈앞에 펼쳐진 첫 봉우리, 아이들이 묻는다.
“사람이 넘을 수 있는 곳 맞아요?”
수직에 가까운 바위 봉우리, 밧줄을 잡고 한걸음씩 오른다. 지난봄 희양산행 때 예린이는 90도 직각바위에서 밧줄을 잡고 굵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공포에 질린 마음을 추슬러 정상에 올랐다. 극한 경험 때문이었을까. 예린이도 가뿐하게 첫번째 공룡능선을 넘는다. 급상승, 급강하가 끝없이 이어진다. 예린이가 무릎을 다쳐 스프레이파스를 뿌린다. 소명이와 륭이는 날카로운 바위에 팔을 긁혔다. 흐르는 피를 닦고 소독하고 밴드를 붙인다. 새벽 5시 시작한 등산, 1275봉과 나한봉을 넘어 8시간 만에 공룡능선이 끝나는 마등령에 도착했다. 생리가 걸린 친구, 소화 불량으로 아침 점심을 굶은 학생, 무릎을 다쳐 절뚝거리는 녀석들이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공룡능선 등반을 해냈다. ‘부심 쩔어도’ 되는 순간, 학생들의 얼굴이 여느 때보다 빛난다.
비선대로 향하는 내리막길. 사지가 따로 노는 듯 휘청거린다. 멀리 대청봉에 먹구름이 걸리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 넘게 폭우를 맞으며 걷는다. 장대비가 잦아들 무렵 비선대에 도착했다. 공룡능선 지옥을 넘어 도착한 천국, ‘백포맘’(백두를 포기한 엄마들)들이 우비도 없이 비를 맞으며 도넛을 사들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11시간30분 만에 설악산 종주가 끝났다.
백두대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오르막길 끝에 희열을 맛보고, 평온한 길의 끝자락에서 예기치 않은 고난을 만난다. 인생대간길, 경쟁하기보다 협력하고, 혼자 뛰기 대신 함께 걷는다면,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
박점규 이우13기 백두대간 종주탐사대 기획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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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8일 이우13기 백두대간 종주탐사대 대원들의 대청봉 등정 기념사진. 박점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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