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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고야시에 위치한 왓파 빵 공장 노동자들. 앞줄 맨 왼쪽 까만 바지를 입은 마도카씨는 출근해서 졸리면 조용히 사무실에 들어가 잠을 잔다. 공장 안에선 소리 지르며 방방 뛰고 돌아다니다가도 “마도카상”이라고 부르면 빵을 나른다. 하루에 빵을 나르는 건 열번가량이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지하루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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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일본 장애인·비장애인 노동생활공동체 ‘왓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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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고야시에 위치한 왓파 빵 공장 노동자들. 앞줄 맨 왼쪽 까만 바지를 입은 마도카씨는 출근해서 졸리면 조용히 사무실에 들어가 잠을 잔다. 공장 안에선 소리 지르며 방방 뛰고 돌아다니다가도 “마도카상”이라고 부르면 빵을 나른다. 하루에 빵을 나르는 건 열번가량이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지하루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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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 일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일본 나고야에 기반을 둔 공동체 ‘왓파’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이 없습니다. 각자 독립된 삶을 살면서도 서로 돕고, 함께 일하는 일터에서는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고 하는데요. 10여년간 장애인 탈시설자립생활운동을 벌여온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여준민 상임활동가가 한달 동안 체험한 왓파 이야기를 보내왔습니다.
이른 아침, 일본 나고야시 북쪽에 위치한 한 건물 앞에 승합차 여러 대가 섰다. 승합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건물 2층으로 올라가 개인 수납장을 열고 조용히 하얀색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자폐 증상이 심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사람도 있다. 작업복을 다 입은 사람이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가 작업복을 입혀주고 마스크도 씌워준다. 그 역시 정도는 약했지만 장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1층 공장으로 내려갔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 먼지를 제거하는 찍찍이로 머리부터 다리까지 슥삭슥삭 문지른다. 그리고 한켠에 놓인 유리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박스 안에 가만히 서 있자 ‘쓩~’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으로 뒤덮여 눈만 내놓은 모습은 흡사 우주인 같았다.
공장 안에선 대화가 거의 없다. 가끔 누군가 큰소리로 말하면 여기저기서 “하이! 하이” 하는 짧은 대답만 들렸다. 모든 사람들이 일에 집중하는 건 아니었다. 혼자 흥얼거리며 뛰어다니는 사람, 일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춤을 추려는 사람, 휠체어에 앉아 눈 감고 자는 건지 생각에 빠진 건지 모를 사람, 의자에 앉아 쟁반의 빵 부스러기를 제거하다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람, 라벨 잘못 붙였다고, 포장지가 바뀌었다고 떠들며 들어오는 사람…. 어느 누구도 이 산만함을 불편해하거나 제지하거나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장 안엔 고소한 빵 냄새가 퍼졌다. 만들어진 빵을 포장하고 배달지를 확인하고, 수량을 체크하느라 사람들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하는 ‘왓파’의 빵 공장 풍경이다. 여기서 일하는 45명 가운데 절반가량은 장애인, 나머지는 비장애인이었다.
장애인은 고립되는 게 당연한가?
‘왓파’는 장애인·비장애인이 도시에서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공동체다. 왓파란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둥글게 서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의역하자면 ‘함께 살자’는 뜻이다. 왓파의 역사는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던 사이토 겐조(68)는 친구와 함께 시골의 대형 장애인 수용시설에 자원봉사를 갔다 큰 충격을 받았다. 하루 종일 멍하니 벽과 천장만 올려다보며 주는 대로 먹고 씻겨주는 대로 쥐 죽은 듯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모습에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이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립된 시설에 갇혀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시설에 살던 장애인 한 명을 무작정 리어카에 태우고 밖으로 ‘탈출’한다. 또다른 비장애인 친구와 돈을 모아 방을 하나 구해 셋이 같이 살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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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파는 지타 지역에서 유기재배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각종 채소와 벼를 재배하며, 잼 등 가공식품을 판매한다. 왓파 도시락 공장에 필요한 식자재를 공급하는데, 분량이 모자라면 지역 농민들이 재배한 채소를 구입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농장에서 일하는 정신장애인들을 좋지 않게 보았던 마을 사람들의 시각도 바뀌었다. 지하루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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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만들어진 왓파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종이상자 접기나 인쇄 등 단순한 부업을 했다. 그러나 생활을 하기엔 넉넉한 벌이가 아니었다. 1970년대 일본 사회에선 공해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안전 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왓파 사람들은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밀가루를 구해 빵을 만들었다. 매장이 따로 없으니 지하철역 입구에 들고 나가 팔았다. 좋은 먹을거리라는 입소문이 지역 사회에 퍼지면서 판로도 넓어졌다.
따로 사는 장애·비장애인 200여명
빵·도시락 공장 등에서 함께 일해
개인별 노동능력 평가하지 않고
사업장 수익 합산해 똑같이 배분
1969년 대학생이었던 사이토 겐조
시설에 고립된 장애인 삶에 충격받아
1971년 장애인과 함께 살면서 시작
‘장애인도 시민으로 살게 하자’ 목표
현재 왓파는 빵을 만드는 공장 2곳, 나고야시로부터 위탁받은 재활용 사업장 1곳, 나고야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지타 지역의 유기재배 농장, 도시락 공장, 우동전문 식당, 커피숍 등의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지자체로부터 사업을 위탁받아 활동보조인들과 장애인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왓파에선 장애인을 비롯해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처럼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고 고립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와 쉼터, 직업훈련소를 운영한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가장 소외되고 차별받는다고 여겼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소외받는 사람들의 유형이 다양해졌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 밖에 현업에서 은퇴한 장애인들이 낮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센터도 운영 중이다.
친한 이웃이자 일터 동료
왓파 사업장에서 함께 일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200여명은 나고야 시내와 지타 지역에 산다. 결혼한 비장애인은 각자 가정을 꾸려 생활한다. 미혼인 경우엔 혼자 살거나, 장애인들이 거주하는 공동주택에서 함께 산다. 장애인들은 결혼한 경우가 거의 없다. 부모나 형제들 품에서 벗어나 3~4명이 집 하나를 구해 각자 방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한다. 요즘 유행하는 셰어하우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월세도 장애·비장애인 구별 없이 똑같이 나눠 지급한다.
왓파 사람들이 지닌 장애는 다양하다. 대부분 중증의 지적·발달장애가 있다. 신체 장애를 동반한 이도 있다.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지타에 위치한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다. 이들에게 1년에 두번 하는 정기 건강검진은 필수다. “아프다”라는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장애가 심해 건강을 살피는 건 중요한 일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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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파 사업장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은 오랜 기간 반복 작업을 했기 때문에 숙련된 노동자들이었다.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이란 세상에 없다는 것이 왓파의 정신이다. 지하루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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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부터 한달 동안 생활한 건물 2층엔 모두 4명의 장애인이 각자의 방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의 식사 준비, 목욕, 출퇴근 등 일상을 돕는 건 활동보조인들이다. 보통 아침 6시에 일어나 활동보조인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출근 채비를 했다. 왓파의 셔틀 차량이 집집마다 들러 사람들을 태우고 일터로 향했다. 발달장애가 심한 사람의 경우, 매일매일 컨디션이 급격히 변할 수 있다. 건강 상태에 따라 출근이 늦어질 수도 퇴근이 빨라질 수도 있다. 하루 8시간 일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온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노동을 하니 그만큼 잠도 일찍 든다. 밤 9시면 집안이 고요 그 자체였다.
왓파 사람들은 나고야성으로 소풍도 가고, 외식도 하고, 영화관이나 시장에도 간다. 음악단을 만들어 공연을 하고, 야구 경기를 본다. 비장애인 동료에게 장애인 동료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부여하진 않는다. 친구고 동료니까 자연스럽게 문화 생활을 같이 즐기는 거다. 왓파에 머물렀을 당시, 빵 공장에서 포장을 담당하던 히로미씨가 생일을 맞자 동료들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파티를 열어주었다. 이들은 같은 일터의 동료이자 일상을 친하게 지내는 친구이자 이웃이다.
노동능력을 평가하지 않는다
왓파를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장애가 있건 노동 능력이 없건 모두 다 똑같이 ‘동일임금’을 받는다는 것이다. 장애가 심해 하루 종일 흥얼거리거나 느린 손으로 빵틀 몇 개만 깨끗이 닦아내는 작업만 하는 사람 모두 22만엔(약 230만원)가량의 월급을 받는다. 일한 지 10년까지는 호봉이 매겨지지만 그 이후부터는 동결이다. “장기근속자가 많아 호봉을 모두 인정하면 사업장이 파산할 수도 있어요.” 도시락 공장을 책임지고 있는 리영자(재일동포 3세)씨가 웃으며 말한다.
장애가 심해도 오랜 기간 일해온 숙련 노동자들이라 빵·과자 모양 만들기, 포장하기, 라벨 붙이기, 빵틀 운반하기, 오븐에 굽기, 설거지, 배달, 반찬담기 등을 능숙하게 처리한다. 빵·과자 모양을 제대로 못 내고, 포장을 잘 못하고, 반찬을 제대로 담지 못한 유일한 사람은 나였다. 그래도 그들은 “다이조브, 다이조브(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했다.
왓파는 개인의 노동능력을 평가하지 않는다. 장애인에게 생산성과 효율성을 요구하게 되면, 그때부터 구분과 배제·차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장애로 인해 노동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통념 자체를 거부한다. 그들에게 ‘노동’은 사람과 사회를 이어주는 ‘관계맺음’의 도구일 뿐이다. 장애인들이 국가나 가족에게 의존하도록 하는 사회 분위기를 거부하고,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닌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거다. 거창한 목표? 그런 건 없다. 그냥 함께 살아가는 것뿐이란다. 공동생산·공동분배라는 공산주의적 이념을 실천하는 것처럼 비쳐, 왓파를 이끄는 이들이 거대한 사상으로 무장돼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능력을 평가하지 않고 이윤을 평등하게 나누는 까닭은 명료하다. 누구나 하루 8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충실히 일을 했으니 똑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타 농장의 경우 손이 많이 가는 유기농 재배를 한다. 아직 소규모라 적자를 면하기 힘들다. 왓파는 모든 사업장 월별 수입을 사무국으로 모아 재분배한다. 사업장마다 수익이 달라도 같은 임금을 줄 수 있는 배경이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은 사업장 노동자들이 불만이 있을 법하지만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동의와 합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선한 마음과 굳은 의지로 들어왔어도 중도에 일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다. 차이를 인정하는 왓파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르지 않는 임금과 노동 강도 때문이란다. 수익을 내 지속가능한 안정된 일터를 만드는 것이 왓파의 숙제다.
함께 사는 건 불가능할까?
사이토 겐조와 그의 뜻에 함께한 동료들이 만들어온 왓파의 46년 세월을 일본 사회는 어떻게 평가할까? 리쓰메이칸 대학의 다테이와 신야 교수는 왓파의 역사와 의미를 논문으로 정리했다. 그 논문을 접한 제자 또한 왓파가 걸어온 길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있다. 장애인에게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 노동 현장을 고집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변혁 운동이기 때문이다.
왓파에서의 한달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과 상상력을 주었다. 우리 사회는 중증의 장애가 있으면 온 가족의 헌신과 희생이 있어야 한다. 나이가 어릴 땐, 특수학교나 치료실 같은 곳에서 하루를 보내지만 학교를 졸업하면 갈 곳이 없다. 집 안에 방치돼 있다 부모가 나이 들면 시설이 유일한 선택지이자 삶의 종착지다. 여기서 선택은 더 좋은 삶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밀려나 강요당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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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파 사람들은 지역 사회에 함께 사는 이웃이자 동료다. 왓파 빵 공장에서 포장을 담당하던 히로미씨가 생일을 맞자 동료들이 레스토랑에서 파티를 열어주었다. 지하루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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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장애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일이 없다. 늘 대기자가 밀려 있는 장애인 주간보호센터에 가거나, 시설이 운영하는 보호작업장에 간다. 취업은 어림없는 일이다. 보호작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조립·포장 등 하청의 하청을 받은 업무다. 매달 보통 10만원 안팎의 임금을 준다. 작업을 지시하고 돕는 비장애인(직업재활교사)과 장애인의 비율은 1:10가량이다. 이들은 왓파 사람들처럼 동료 관계가 아니다. 지시하고 보호받는 권력 관계에 있다. 장애가 심해도 평범한 동료이자 이웃으로 살아갈 수 없을까? 왓파의 정신과 가치는 우리 모두 ‘사람’이란 지극히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격리된 채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 보호작업장에서 존중받지 못하며 일하는 장애인들이 뿌옇게 눈에 밟힌다.
나고야/여준민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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