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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2.04 20:34 수정 : 2015.12.09 14:52

지존파 경찰수사를 지휘한 고병천 전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왼쪽부터), 1994년 서초경찰서 출입기자로 지존파 사건을 취재한 양상우 전 <한겨레> 기자, 이번 연재를 담당한 고나무 <한겨레> 전 토요판 기자(탐사기획팀장)가 지난 2일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열린 ‘지존파 수사 뒷이야기’ 행사에 참석해 사건 관련 영상을 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지존파 수사 뒷이야기’ 행사

▶ ‘잊는다’는 말은 때로 타자적인 단어입니다. 지존파를 기억하고 잊고, 삼풍백화점 붕괴를 기억하고 잊고, 세월호를 기억하고 잊는 자는 사건의 외연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산다’는 단어의 쓰임은 다릅니다. 피해 생존자 이정수(가명)씨는 21년이 지나서도 지존파 사건 위에 두 발을 디딘 채 살아갑니다. 고통은 극심한 범죄 피해자에게 잊히거나 기억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뗄 수 없는 신체의 일부 같은 것입니다. 지존파에 대하여, 기억을 환기한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한겨레> 토요판이 지난 9월12일치부터 10월17일치까지 6회에 걸쳐 연재한 ‘지존파 납치 생존자의 증언’ 시리즈가 21년 전 발생한 지존파 사건을 독자들의 기억에서 불러냈다. ‘왜 지존파 사건을 지금 기억해야 하는가.’ ‘왜 공동체가 범죄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보듬어야 하는가.’ 기억은 응답으로 이어졌다. 범죄에는 끝이 있지만 피해자의 마음에 찾아온 재난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고통의 마지막 단락이 쉬이 찾아오지 않는다. ‘지존파 납치 생존자의 증언’ 시리즈는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돌봄과 지원의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한겨레>와 함께 연재한 <다음뉴스펀딩>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이 모였다. 모금액은 생존 증언자 이정수(가명)씨에게 전해졌다.

지난 2일 저녁 7시,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한겨레> 토요판과 <다음뉴스펀딩> 독자 가운데 30명을 초청해 ‘고병천 전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이 말하는 지존파 수사 뒷이야기’ 행사를 열었다. 범죄를 통해 한 시대를 돌아보는 토크콘서트다. 1994년 서초경찰서 출입기자로 지존파 사건을 취재했던 양상우 전 <한겨레> 기자(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이번 연재를 담당한 고나무 <한겨레> 탐사기획팀장, 고병천 전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이 무대에 올랐다.

‘한겨레’가 6회 걸쳐 연재한
지존파 납치 생존자 증언
왜 지금 기억해야 하는가
범죄는 끝나도 피해자의
고통엔 끝이 오지 않는다

사건담당 고병천 전 강력반장
21년간 피해자와 인연을 맺었다
대화하며 물적으로 지원했다
고병천 전 반장, 당시 취재기자
이번 연재 맡은 기자가 모였다

고나무

지존파, 숱한 사건·사고의 신호탄

고나무 지존파라는 사건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덜 추운, 따듯한 축에 속하는 날씨인 것 같습니다. 먼 걸음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사회를 맡은 저는 취재하고 기사를 쓴 한겨레 탐사기획팀장입니다. 지존파 생존자 취재를 할 때는 토요판팀 소속이었고요. 여러분께서 돌아가실 때 몇 가지 질문들을 갖고 돌아가시면 성공적인 행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돌아봐도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연재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동료들 가운데 어느 분이 ‘왜 이제야…’ 그런 질문을 하셨어요. 두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범죄 보도에는 늘 시의성을 따지는데 마음의 상처는 언론 보도가 끝난 뒤에도, 언론이 펜과 카메라를 끈 뒤에도 오래간다는 사실을 환기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또 1990년대를 돌이켜본다면 우리 시대를 보는 거울 같은, 통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지존파 사건을 다시 말씀드리면, 다섯명을 납치하고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고병천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고요. 모두가 다 흘러간 것 같지만 앞으로도 닥쳐올 수 있는, 그래서 우리가 뭘 대비해야 하느냐, 그것이 오늘의 주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나무 양상우 전 기자는 저에게는 신문사 대선배십니다. 1994년 일어난 다른 큰 사건들이 기억나시는지요.

양상우 그해 지존파가 가장 쇼킹한 사건이었어요. 기자라는 직업이 현장에서 가장 먼저 보고 독자에게 전달하지만 사실은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달려가면 엄청난 사건들이 켜켜이 쌓이게 됩니다. 지존파 사건이 그해 추석 연휴 즈음 일어났죠. 그 뒤에 너무 많은 사건이 터졌는데, 한 달쯤 있었을까. 성수대교가 무너졌어요. 기자들은 영역별로 취재 담당 구역이 있습니다. 저는 강남, 서초, 송파를 담당한 기자였는데 지존파는 서초경찰서에서 수사가 진행됐고, 성수대교가 강남에 있잖아요. 모두 제 취재 구역이었습니다. 다리가 무너졌는데, 밤새 기자실에 있다가 제일 먼저 들었어요. 다른 기자들한테 이야기하니 아무도 안 믿더라고요. ‘왜 농담하냐’고. 성수대교 무너지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다리 건설 관련한 기획 취재 하느라 경기도 분당에 있는데 충주호 유람선에 화재가 나서 수십명이 실종 상태였어요. 다 죽음을 맞았죠. 또 일주일 뒤에 서울 아현동 가스공급 기지가 폭발했습니다. 아마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서 일어난 가장 큰 폭발사고였을 겁니다. 1995년이 되면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대구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로 백여명이 숨집니다. 하늘, 땅, 바다 할 것 없이 사건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중심에 지존파가 있습니다. 지존파는 한국 사회에서 사건, 사고의 어떤 신호탄 같은 것이었습니다.

고나무 사회부에 계셨으면 거의 집에 못 들어가셨죠?

양상우 지존파 때는 집에 못 들어가서 통상 경찰서에 있었어요. 당시 취재진이 육십명에서 백명쯤 됐어요. 그땐 인터넷 언론사도 없었는데 최소 오륙십명 이상이 서초경찰서에 진을 쳤습니다. 취재 경쟁은 그렇게 뜨거웠지만 고병천 당시 반장님이 워낙 철저히 수사 보안을 지키셔서 맨날 경찰서가 뒤집어지고 기자들의 한숨과 탄식이 높았죠.

고나무 이십년 전 사건의 실체가 다 드러난 것 같은데 취재를 하면서 다른 앵글로 볼 수 있겠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 밑에서 산을 볼 때, 건물 8층에서 산을 볼 때, 산 정상에서 내려다볼 때의 풍경은 다 다르잖아요. <응답하라 1994> 드라마 아시죠? 드라마처럼 따뜻하고 희망이 가득한 시대였지만 너무 많은 사건이 일어났어요. 만화가 윤태호의 <야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만화가 윤태호를 거듭나게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수대교 붕괴를 소재로 한 작품이었습니다. 뜬금없는 말씀 하나 더 드릴게요. 1994년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에 대해 혐의가 없다는 검찰 수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 내란죄로 전 전 대통령을 고발합니다. 당시 주무 검사가 현재 장윤석 새누리당 의원입니다. 사람의 역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배웠습니다.

1990년대 초중반은 민주화 이후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고 밝은 곳을 바라본 시대라 기억하는데 그러면서도 죽음이 많았던 묘한 시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찬욱 영화감독이 한국 사회에 대해 ‘잡탕 같은 사회’라 한 적이 있습니다. 1990년대는 그런 시대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 반장님께 질문을 돌려서요. 피해자 이정수씨가 서초서를 찾아간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고병천

“저를 보내주십시오…제가 죽겠습니다”

고병천 1994년 9월19일 밤이었죠. 하루 저녁을 조사해서 과장, 서장한테 보고했어요. 이런 사안 있는데 제가 잡으러 간다 했더니 그 내용도 믿을 수가 없고 그걸 어떻게 한 팀이, 여섯명이 잡으러 가겠느냐고 해서 ‘저를 믿고 보내주십시오’ 했죠. ‘보고하지 마십시오. 보고하면 전남경찰청으로 인계되고, 영광경찰서로 하명이 돼서 거기서 출동하면 직원들이 다 죽습니다. 내가 죽겠습니다.’ 그렇게 내려가게 되었죠.

양상우 다른 사람한테 사건이 갔으면 지존파가 잡혔겠지만 더 큰 희생을 치렀을지도 모릅니다. 고병천 반장님은 원래 교통이 전문이에요. 그 좋다는 교통경찰을 하시다가 공부도 잘하시니까 시험으로 승진하고 서초서 파출소 소장님을 하셨어요. 강력반장 하기 직전에요. 1980~1990년대에 조직폭력이 많았습니다. 한 나이트클럽에서 조직폭력배끼리 칼부림이 났어요. 경찰도 칼 든 범죄자가 무섭습니다. 다 처자식 있는데. 그 상황에서, 안에서는 칼싸움 나서 난리인데 들어갈 사람이 없었어요. 고병천 당시 소장님이 파출소장 정복을 입고 혼자 들어갔어요. 근데 소리만 나고 안 나와. 건물 밖에서는 ‘소장님, 들어가지 말라니까 어떻게 된 거야?’ 그랬는데 나중에 들어가서 보니까 혼자 살고 조직폭력 일당은 나이트클럽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어요. 그 일 뒤에 고병천 파출소장이 강력반장으로 오셨어요. 고병천 반장님도 인간인지라, 미국 시에스아이(CSI) 드라마도 아니고 아주 솔직히 어땠어요? 기사에서는 ‘격투’ 끝에 잡았다고 두 자로 나오잖아요, 격투. 물리적 접촉 순간은 어땠습니까?

고병천 전남 영광 내려가서 지존파 일당이 있는 거처를 관찰하고 있는데 새벽 여섯시에 문이 열리더니 덮개 없는 봉고차가 지나가요. 그 차하고 우리 차하고 교행을 합니다. 교행하는 순간 (지존파) 강동은이 눈치를 채서 광주 가는 길로 빠져, 달리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승용차니까 빠르죠. 130㎝짜리 쇠파이프를 테이프로 정교하게 감아서 가지고 가 그걸로 유리창 깨는데 안 돼요. 강동은이가 뛰어내리는 순간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20~30초간 ‘스킨십’을 했죠. 사건 전모를 물었습니다. 삼십초 동안 질문을 했는데 그때 다 이야기했어요. 너무 혼비백산해서 싹 불었어. 그 대답을 갖고 분리해서 조사하니까 피의자들이 똑같은 답을 해서 이것은 진실이라고 확인을 했습니다.

양상우 사실은 그 분위기를 술 많이 드시고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나 무서워 죽을 뻔했어’ 그랬거든요. 시시각각 지존파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요. 사람이 아닌데, 공포 드라마도 아니고요. 지존파는 죽기 아니면 살기인 자들이잖아요. 당시 고 반장님 심장도 많이 뛰셨다고 하고. 유도, 태권도 합치면 십단인데 무서워서 죽을 뻔했다고.

고병천 그 어떤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가슴이 저려오는 것이죠. 과연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 실패를 하면 보고 안 하고 간 나는 이민 가야 한다, 이런 착잡한 두려움도 오고. 시작 전에 두려움이 있었지만, 시작하면서부터는 환상 속에서 일을 처리한 것이죠.

양상우 지존파 사건이 커진 이유를 보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잔혹한 범죄, 다수의 피해자, 이건 살인마라고 볼 수밖에 없는. 여기에 추가된 것이 무기 구입과, 백화점 브이아이피(VIP) 명단을 확보해 범죄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죠. 사회적 의미가 부여된 겁니다. 가진 자에 대한 증오범죄 쪽으로 의미가 확대되었습니다.

고나무 현역 기자로서 질문하고 싶은 것이, <한겨레>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인 1988년에 창간되어 진보적 저널리즘을 구현했습니다. 당시 <한겨레> 보도를 보면 사형제에 대한 고민이 의제화되지 않았어요. 편집국에서 사형제에 대한 보도를 둘러싸고 고민이 없었습니까?

양상우
양상우 사형제를 존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겠죠. 그러나 제가 경험한 신문사에서는 지존파든 아니든 인간의 생명을 사회의 이름으로 뺏을 수 없다는 기본 철학이 다수의 가치관입니다. 당시 사형 집행까지 꽤 빨랐습니다. 지금도 사형수가 있지요. 사형을 선고받는다고 해도 바로 집행되지는 않습니다. 당시 지존파 자체가 이슈화되면서 사형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러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지존파 사건 뒤에 일련의 사건이 터지는데 지존파에 의해 숨진 사람은 다섯이잖아요.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등 여러 참사들 그리고 그 수십년 지나서 세월호에 이르기까지를 보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습니다. 지존파는 증오에 찬 자들의 일탈행위였지만 수백 수천명이 죽는 것은 탐욕을 가진 자들이 책임을 외면하고 나눠지는 과정에서 생긴 사고였어요.

고나무 마음의 재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요. 공감이란 단어를 쉽게 쓰지만 가족들 마음 아픈 것도 알기 어렵잖아요. 차분히 생각해 보세요. 어떤 형사가 어떤 범죄를 수사하면서 진술을 받았겠죠. 인연이 거기서 끝날 수 있는데 이십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 납치 피해자를 물적으로 계속 보듬고 대화 나누는 인연을 고병천 당시 반장님이 이어가셨습니다. 독특한 인연이라고 할까요, 계기가 무엇인가요?

다음뉴스펀딩으로 소중한 마음 모아

고병천 ‘독특’보다는 ‘당연’이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을까요. 기도할 때 꼭 이스라엘 말로 하는 것이 아니듯, 일반적인 생각으로 하면 되듯 말이지요. 그분이 너무 독특하게 힘들게 살아요. 생각해보세요. 끌려가서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자신과 동행했던 어떤 사람을 죽이도록 강요받아요. ‘너도 손을 대라’고 해요. 그 트라우마는 어떻게 감당이 안 돼요. 그분이 갑자기 공격적으로 돌변합니다. 트라우마의 가장 기본 현상입니다. 트라우마라는 말이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만든 용어잖아요. 어떻게 나타나고 무엇이냐. 어떤 잠재적 기억이 있는데 유사한 사건이 비쳐지면 비로소 뒤늦게 사후적 환기가 되는 것이죠. 환기라는 것은 고통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고통은 타인을 향해 공격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게 안 되면 자신을 공격하기도 하지요. 우울, 조울로 자살에 이르는 것이 트라우마의 끝입니다.

고나무 저는 이정수씨를 네차례 인터뷰하면서 마음공부를 많이 했어요. 상처에 대해 돌아보지 않는 스타일인데 기자 고나무가 아닌 사람 고나무로서 1㎝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포털사이트 다음 뉴스 펀딩으로 도움 주신 분들이 여기 앉아 계세요. 여러분들의 소중한 마음이 모여서 650만원을 전달했습니다. 이정수씨가 고병천 반장님 다니는 성당의 공익적인 봉사단체에 또 기부를 하셨습니다. 일단 저희가 준비한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오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정리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지존파 납치 생존자의 증언]
① ‘지존파 토막살인’ 유일 생존자 20년만의 증언 “믿기지 않았다…”
② “지하에 갇힌 내게 범죄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③ 진료실 앞의 지존파 “도망가고 싶죠? 도망가세요”
④ 결국 붙잡힌 지존파…난 외려 파출소 장롱에 숨었다
⑤ 나는 왜 김현양 어머니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나
⑥ “살려달라”던 김선일의 마음이 내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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