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서울 종로2가 56-23번지 패스트푸드점 ‘버거킹’ 3층에 한 노인이 홀로 앉아 있다. 노인 옆으로 청년이 보인다. 탑골공원 일대를 돈 없는 노인과 돈 없는 청춘이 걷는다. 탑골공원 맞은편, 취업 전선에서 스펙을 쌓아야 하는 청년들이 다니는 외국어 학원이 즐비하다. 하루 종일 버거킹에 앉아 있으면 낮에는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는 노인을, 밤에는 햄버거를 먹는 학원 수강생들을 만나게 된다. 사진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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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박유리의 서울, 공간 ⑤종로 탑골공원
▶ 서울에 스며든 그림자를 바라봅니다. 도시에 깃든 고독과 꿈, 사랑과 고립, 그리움과 우울을 그리려 합니다. 살아낸다는 것, 먹고 살아간다는 것, 생존한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적어보려 합니다. 나이듦이 무엇인지 찾으려 노인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맞은편 햄버거 가게를 찾았습니다. 자존심을 지키려 늙은 거짓말을 하는 남자들이 패스트푸드점 3층에 앉았다 사라져갔습니다. 그들이 기다린다는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림처럼 말 없는 남자들이 숨을 쉰다. 흉곽 아래쪽 횡격막이 아래로 내려가 갈비뼈 사이에 있는 근육이 수축하면 숨이 들어왔다 빠져나간다. 숨을 쉬면 심장이 뛴다. 나이 든 남자들이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햇빛을 쬔다. 말없이, 가을 햇빛을 받으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정물처럼 앉아 지나가는 타인을 바라본다. 공원에도 설렘과 호기심, 즐거움, 탐색, 웃음이 불어온다. 여자들이다. 여자가 불어와 말을 건네고 눈빛을 줄 때다. 약속도 없이 출근처럼 공원을 찾는 남자들 곁에 가끔 고운 여자가 앉는다. 조금만 색다른 일이 공원에 일어나도 하나둘 몰려든다. 나이 든 여자 곁으로 남자들이 앉는다. 아이가 된 듯 나이 든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툭, 친다. 여자는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몸을 돌리고는 설레게 웃는다. 여자가 시선을 돌리는 쪽마다 바람에 움직이는 풀처럼 남자들이 흔들린다.
칠팔십년 살아온 남자들갈 곳 없어 깃든 탑골공원
내려놓기 힘든 자존심에
월세 사는 남자는 3억원
준다는 누굴 기다린다지 무료함 견디는 어떤 남잔
약속이 취소된 거라고
말로 초라함을 달랜다네
바라던 미래가 오지 않았듯
기다리던 그도 오지 않는다 집 한 채 사준다는 이를 기다리며 종로3가역 5번 출구에서 어린 연인들처럼 두 손을 맞잡은 나이 든 남자와 여자를 보았다. 사랑은 철들지 않는 마음처럼 가벼이, 한번도 늙음을 육체로 경험하지 않은 것처럼 사뿐히 그들을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게 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보다 달콤한 표정을 짓는 가난한 연인이 있었다. 탑골공원 맞은편 패스트푸드점 ‘버거킹’ 2층에서 햄버거를 입에 물고 여자의 말을 듣는 나이 든 남자의 눈동자가 그랬다. 언제 산 것인지, 철 지난 넥타이를 맨 남자가 여자의 말에 귀를 집중하며 눈을 반짝였다. 사랑은 한번도 무뎌본 적 없는 마음처럼, 감각을 깨어나게 하여 슬퍼하고 기뻐하며 화를 내는 그대의 말에 세밀하게 반응한다. 늙은 남자는 여자의 말에 따라 웃기도 멈추기도 듣기도 놀라워하며 젊음처럼 빠르게 여자의 말에 다른 표정을 지었다. 사랑은 젊은 사람에게, 나이 든 사람에게도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탑골공원의 남자들은 대부분 홀로 있다. 누구와 나란히 앉는다 한들 혼자 있음과 다름없다. 오래된 친구 사이가 아니면 남자는 초라함이 느껴지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200원짜리 밀크커피를 손에 들고 팔각정 계단에 앉은 노인이 말했다. “탑골공원에 거의 오지 않아. 5년 만에 오늘 처음 왔는걸. 시간이 없어. 어딜 가야 해.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정식으로 다음에 요청하라고.” 노인과 한 일간신문사의 미술실에서 정년퇴직을 맞았다는 그의 친구는 탑골공원을 빠져나갔다. 탑골공원에서 횡단보도를 지나 맞은편 버거킹 건물로 향했다. 종로2가 56-23번지. 서울에서 나이 든 남자들이 가장 오래, 많이 찾는 햄버거 가게일 것이다. 무엇도 주문하지 않거나 1000원짜리 커피 한잔을 사서 점원이 잘 드나들지 않는 가게 2, 3층에 앉는다. 지난달 21일 버거킹 3층에는 베이지색 재킷 차림에 갈색 정장바지, 금테 안경을 쓴 노인과 점퍼에 연보라 셔츠를 입은 머리숱 없는 노인이 각각 앉아 있었다. 금테 안경의 남자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고, 머리숱 없는 남자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켜 놓고 빨대로 조금씩 마셨다. 그들의 맞은편 자리가 비었다. 오똑한 콧날과 갸름한 얼굴형의 금테 남자는 병자년에 태어나 여든살이라고 했다. 전직 공무원이었으며 정년퇴직이 65살이어서 1979년에 그만뒀다고 한다. 1979년에 65살이었냐고 물어보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10·26사태에 휘말려 퇴직했다고 답한다. 맞은편에 앉겠다는 나를 남자는 거절하지 않았다. “(탑골)공원에서 친구분을 만나요?” “없어. 그 사람들 사기나 치려고 만나는 거지. 내가 돈이 많은 줄 알고. 그런 경험, 많았어. 공사가 어딨다든지 얼마 투자하면 얼마 벌 수 있다든지. 누가 거기 공원 나간다면 좋지 않게 봐. 좋은 사람들도 있는데 이상하게 돌아가더라고.” 저마다 다른 곳에서 칠팔십년을 살아온 남자들이 노년을 맞아 이 공원에 하나둘 모여든다. 서로 알지 못하는 그들이 이 공원에서 처음 만나 자신을 말로 소개하므로 자신의 과거, 현재를 원하는 대로 소개할 수 있었다. 다 믿을 필요도 없다. 누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면 이렇게에서 이만큼 빼내 감가상각했다. 햄버거 가게에서 마주앉은 남자가 공무원인지, 아닌지 말 외에는 그를 알 방법이 없다. “그런데 이곳으로 나오시네요.” “여기서 동창들 만나지. 나한테 연락이 오니까. 오면, 뭔가 아지트처럼 뭐 그렇게 만나게 돼.” 정확한 약속이 없더라도 이 일대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뜻 같았다. 남자는 뭘 물으면 대답을 돌리거나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친구들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세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이야기지.” “과거에는 노후를 어떻게 보셨어요?” “크게 봤지. 그런데 돈도 없고 그러니까.” “친구들과 한다는 미래 이야기는 어떤 거예요?” “꿈을 크게 가져야지. 그래야 이루어져. 내가 몇살까지 살지 모르지만.” “현재는 생활에 만족하세요?” “만족하지 못해. 어렵지.” 남자는 누가 자신을 도와주기로 했다며,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남자는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누가 도와준다고 약속했는데 자꾸 시간 끌고 말이야. 예전에 그 친구가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나한테서.” “얼마나 도와준대요?” “집을 한 채 사준다더라고. 빌라 값 2, 3억 주겠지, 아마.” 월세를 산다는 남자는 담담하게 “2억~3억원”이라고 말했다. 그 정도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멋쩍어하지 않았다. “그 말을… 믿으시는 거지요?” “믿지, 그럼. 왜 안 믿어?” 남자는 태연한 얼굴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언제 그분이 오세요?” “네시에서 네시 반 사이.” 시계를 보니 네시 십분이었다. 남자가 손목시계를 한번 더 바라본다. “그 돈 받으시면 뭘 할 거예요?” “집 사야지, 빌라. 이제 곧 연락이 온다고.” 표정을 숨기려는 남자는 질문이 계속되자 조금씩 흔들렸다. 눈동자에서 평점심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거짓말을 계속하기 힘들어 보였다. “미안해. 먼저 일어날게.” 빌라 값 2억~3억원을 준다는 그와 오후 네시 삼십분에 만나기로 했다는데 그 시간이 되기도 전에 남자는 자리를 떴다. 남자가 기다리는 그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자가 나타나 곁에 앉자 남자들의 시선이 여자에게 쏠린다. 아이가 된 것처럼 여자 등을 아프지 않게 툭, 때리는 남자와 남자들의 시선에 즐거워하는 여자가 지난 4일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에 앉아 있었다. 사진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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