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야마 유키가 1일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마을사무소 앞뜰에 설치되어 있던 비석을 어루만지며 바라보고 있다. 비석 뒷면에는 ‘1972년 4월 일본의 동포들이 자금을 지원해 마을의 전기·수도시설을 건립하였기에 공덕비를 세운다’는 내용과 함께 24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자금을 지원한 이들 중에는 신씨 성도 있었다. 유키 집안의 한국 성도 신씨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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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유키의 ‘뿌리찾기 여행’(상)
▶ 30대 중반의 한 일본인 청년이 얼마 전에야 자신이 ‘조선인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부모님은 아들이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자라게 하려고 이 사실을 숨겨왔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집안과 관련한 어떤 기록도 물려주지 않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청년은 직접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여행에 나섰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어떤 여정을 겪게 될까요.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은 어떤 의미일까요. 히라야마 유키의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본인 얼굴과 사연이 알려지면 일본 사회에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몰라요. 그래도 보도해도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그런 건 이미 각오가 되어 있어요.”
히라야마 유키(34)를 처음 본 건 지난달 18일 저녁 일본 도쿄의 도심 신주쿠의 한 선술집에서였다. 이곳에 그는 직장동료이자 한국어 통역을 해주는 허미선(39)씨와 함께 나왔다. 유키는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이다. 그는 3년여 전 우연한 계기로 그의 뿌리가 실은 조선임을 알게 됐다. 할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시절 제주도에서 건너온 분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세상을 떠나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다. 유키는 자신의 집안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싶어했다. 곧 제주도로 가 친척들을 찾아나설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이 과정을 기록하고 싶어했다.
재일조선인 6세까지 나오는 시대
“저는 일본인이에요. 한·일 월드컵 때도 일본 이기라고 응원했고 이건 저의 당연한 모습이지요. 하지만 저의 뿌리가 조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것을 숨기고 살 이유도 없지요. 우리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고 왜 일본으로 왔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두 알고 싶어요. 만약 저 같은 사람의 사연이 알려지게 된다면 저처럼 조선이 뿌리인지 모르고 살고 있는 또다른 ‘자이니치’(在日, 일본 식민 지배 결과 등의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 머물고 있는 조선인 및 한국계 영주권자 등)들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에 용기를 내지 않을까요?”
논리정연하고 망설임 없는 유키의 답변엔 오랫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해온 흔적이 보였다. 그는 3년 넘는 기간 자신의 뿌리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마지막 용기를 짜내 답을 찾으려고 했다. 유키는 재일조선인 3세다. 그는 분명 자신처럼 정체성 혼란에 맞닥뜨리는 사람들이 더 있을 거라고 했다. 최근에는 재일조선인 6세까지 태어나고 있다.
선술집에 들어서기 전 보슬비가 내렸는데 얘기를 마치고 나오니 하늘이 개었다. 유키는 평화운동단체 ‘피스보트’의 직원이다. 마침 이날 일본 여당이 평화헌법을 무력화하는 안보법안의 국회 통과를 강행하려 했다. 유키는 친구인 허미선씨와 함께 국회 앞으로 가 시위를 벌이다 자정께 집으로 돌아갔다. 이들과는 30일 제주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헤어지면서 유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보통 일본인보다 키와 몸집이 컸다.
현재 일본에는 60여만명의 재일동포가 사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일제 식민지 시절 건너간 이들과 그들의 후손이다. 조선인의 일본행은 1920년부터 본격화됐다. 1940년대 초반엔 200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일본 오사카·교토·도쿄 등 대도시 주변에 부락을 형성하여 머물렀다. 대체로 한반도 남부와 제주 지역에서 건너온 육체노동자들이었다. 자발적인 이주자도 있었지만, 중일전쟁 발발 뒤인 1939~1945년 사이 군수산업체의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려고 일제에 의해 강제 이주된 이들이 많았다. 1945년 해방 뒤 재일조선인은 대거 본국으로 귀국했고 체류자가 60만명 수준으로 떨어진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부는 제주 4·3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발생한 사회적 갈등을 피해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재일동포의 국적은 복잡하다. 재일동포는 크게 조선적 소지자, 한국 국적 소지자, 일본 국적 소지자 세 부류로 나뉜다. 한국 국적 소지자는 한국 국민과 같은 뜻이다. 조선적 소지자는 과거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는 의미다. 국적이라기보다는 민족적 귀속을 나타내는 기호다. 망해버린 나라인 조선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이유는 남북의 분단을 인정하지 않고 그렇다고 조국을 침략한 일본 국민이 되는 것도 거부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이들은 특별 영주권을 부여받아 일본에 살지만 참정권 등 여러 면에서 사회적 제약이 심하다. 일본 국적 소지자는 일본 귀화자를 말한다. 1990년대 들어 한국 국적이 조선 국적보다 많아져 일본>한국>조선 (국)적 차례로 재일동포 비율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재일조선인은 단순히 재일동포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조선적·일본적·한국적에 상관없이 민족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려는 재일동포 전체를 통칭하는 일종의 사회정치적 함의를 담은 용어다. ‘재일조선인’이 ‘조센진’이라고 불리며 온갖 멸시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학교(친북 성향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운영하는 재일동포 학교. 다만 한국적·북한적·조선적 재일동포의 자녀들이 함께 다닌다)에 다니는 학생들은 교복으로 한복을 주로 입는데 이 때문에 또래 일본인 학생들이 크고 작은 시비를 걸기도 한다. 2010년 일본 문부과학성이 외국인 학교를 포함한 일본 내 모든 고등학교에서 무상교육을 시작했지만 조선인 학교는 여전히 배제된 상태다.
유키는 자신을 일본인으로 알고 자랐다. 한국어는 할 줄도 몰랐고 여느 또래 일본 젊은이들이 그렇듯 한국이란 나라에 관심도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끔 언론에 나오기에 그냥 ‘생각할수록 머리 아프게 하는 나라’라는 정도가 한국에 대한 이미지였다.
자신을 일본인으로만 알고 자란히라야마 유키는 자신의 뿌리를
뒤늦게 눈치채고 어머니 닦달해
부모가 귀화했다는 고백 받았다
그는 더 많은 사실 알고 싶었다 3년간 외무성 오가며 자료수집해
할아버지 본적이 제주라는 것과
몰랐던 여러 가족관계도 알아냈다
마침내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친척을 찾으려 읍사무소로 갔다 엄마가 말했다 “네가 그 기분을 알아?” 재일조선인의 차별을 지켜보는 그 순간에도 그는 일본인이었다. 부모님은 단 한번도 그에게 집안의 뿌리를 설명하지 않았다. 되레 유키가 아버지(히라야마 히로시·1947년생)로부터 들은 건 재일조선인 차별 발언이었다. “아버지는 제가 공부를 안 하려 하면 ‘이런 총(재일조선인 차별 단어) 같은 놈, 이런 조센진 같은 놈’이라며 나무라셨어요.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를 비하하는 단어라는 건 알 수 있었어요.” 유키는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조선인 차별 단어를 쓰면서 자신을 혼낸 것이라 생각한다. 유키가 재일조선인임을 처음 안 것은 2012년 2월 이종사촌과의 대화에서였다. 유키는 오사카에서 도쿄로 놀러 온 사촌에게 시내 구경을 시켜줬다. 신주쿠 근처 한국인 밀집 구역인 ‘신오쿠보 거리’에서 떡볶이를 사 먹었다. 유키는 그저 도쿄에도 오사카의 ‘쓰루하시’처럼 한국인 마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의도였다. 그런데 사촌의 표정이 이상했다. “야, 너 몰라?” “뭘?” “우리 집안 복잡해. 나 청소하다가 엄마의 외국인 등록증을 봤어.” 사촌의 집안은 재일조선인이었다. 유키는 사촌이 조선인이라면 혹시 우리 집도 그렇지 않을까 의심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이전에 김치라는 음식을 만든 적 있었다. 유키는 그게 일본 음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국 음식이었다. 유키는 어머니(64)에게 바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나 어느 나라 사람?’ 어머니는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일본인. 근데 너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야?’ 유키는 어머니 말을 믿지 않았다.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때가 온 건가? 네 어머니께는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말아줘. 실은 너희 집안도 재일조선인 가정이야. 네 부모님은 그걸 자식들에게 알려주길 원하지 않았지.” 유키는 어머니에게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어머니의 답은 같았다. “일본인 맞아.” 유키에게는 재일조선인 친구가 있었다. 다음날 그에게 ‘내가 자이니치(재일조선인) 같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놀라웠다. “반드시 그럴걸? 너 성이 히라야마(平山)잖아. 아마 한국 성이 신(申)씨일 거야.” 재일조선인들은 유키처럼 한국 고향의 지명을 일본어 한자로 옮겨 성을 만들거나 한국 성의 한자 획을 분해해 비슷한 일본어 한자를 찾아 성으로 삼곤 했다. 평산 신씨는 보통 히라야마라는 성을 썼다고 한다. 일본에는 성이 11만개가 넘어 일반 사람들은 그것이 재일조선인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재일조선인끼리는 성씨만 듣고 어느 정도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유키는 제적등본을 떼어 살펴보기로 했다. 3개월 뒤 서류가 집에 도착했다. 유키가 세살 때까지 외국인이었다가 일본으로 귀화 신청이 받아들여진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때 같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그길로 어머니가 살고 있는 오사카로 향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유키가 좋아하는 ‘오코노미야키’라는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제적등본을 내밀었다. “엄마, 이래도 내가 일본 사람이야?” 어머니가 부침개 뒤집는 도구를 프라이팬에 탁하고 내리치며 차갑게 대답했다. “네가 그 사람의 이름과 국적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그 기분을 알아?” 어머니는 요리를 중단했다. 술을 꺼내어 마시기 시작했다. 유키는 이날 어머니가 술 마시는 것을 처음 봤다. “내가 처음 고기를 먹었던 게 열세살 때쯤이었나. 엄마는 오사카의 엄청나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 리어카 끌고 고철 주워서 고물상에 내다 팔고 그렇게 살았지. 조선 사람들은 대체로 다 그랬어. 조선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피습도 당했지. 일본 국적 따고 싶지만 그러면 조선인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기에 신중해야 했지. 네 아빠 역시 조선인이었는데 우리는 결혼한 뒤 함께 일본에 귀화하는 데 성공했어. 변호사 비용이 참 많이 들었지. 귀화 허가를 받은 날 우리는 평생 자식들을 일본인으로 키우기로 결심했어.” 알고 보니 어머니는 유행하는 한류 드라마를 일본어 자막 없이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엔 조선학교를 다녔다. 이웃과 함께 한류 드라마를 보면서도 의심받지 않도록 조선인 차별 발언을 가끔씩 해야 했던 어머니의 처지도 이해하게 됐다. 어머니는 유키가 어렸을 때 생일상으로 차려준 미역국을 먹지 않았을 때 속상했던 이야기, 김치를 맛있게 먹어주었을 때 속으로 기뻐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유키는 그 고백을 들으며 울었다. 그저 놀라웠다.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던 히라야마 유키의 할아버지 고 신석준씨의 외국인 등록 기록. 유키는 이 서류에 적힌 할아버지의 본적지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를 찾았다. 사진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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