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부산 금정구 장전동 부산대학교 인문관 정문 1층 복도의 분향소에서 한 대학교수가 고현철 교수의 영정에 헌화하고 있다. 부산/김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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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고현철 교수 투신한 부산대
▶ 부산대가 2012년부터 총장직선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례적으로 교수들이 7개월 동안 총장 접견실을 점거해 농성을 한 데 이어 교수회장이 단식농성을 벌이더니 정규직 교수가 대학 건물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를 계기로 부산대가 총장간선제를 밀어붙이고 있는 교육부에 정면으로 맞서겠다고 나섰다. 부산대는 험난한 장애물들을 잘 이겨내고 전국 대학 민주주의의 본보기가 될 것인가? 전국이 지켜보고 있다.
“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
지난 26일 부산 금정구 장전동 부산대 본관 뒤쪽 인문관의 정문 1층 복도에 차려진 고현철(54) 교수의 분향소를 찾은 방문객들은 한결같이 말을 아꼈다. 17일 총장직선제 유지를 외치며 이 대학 본관 3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교수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이다. 이아무개 교수(영어영문학과)는 “많은 교수가 많이 애통해하면서 고민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법학과의 한 교수는 “개구리가 삶는 물에 서서히 죽어가는 줄을 모르듯이 나를 비롯한 대학교수들이 수수방관했다”고 한탄했다.
대학본부 정문 1층 복도에 차려졌던 고 교수의 분향소는 태풍 ‘고니’가 부산에 상륙하기 하루 전날인 24일 인문관으로 옮겨졌다. 대학본부가 직원들의 정신적 충격을 고려해 분향소를 고인이 평소 강의를 했던 인문관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하자, 부산대 교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분향소는 총학생회가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운영하고 있다.
고 교수의 연구실인 인문관 604호 출입문엔 고인한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고인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글이 적힌 노란색 종이들이 붙어 있었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휘장과 조화가 출입문을 지키고 있었다.
대학본부와 부산대 교수회는 지난 19일 합의한 총장직선제를 시행하기 위한 후속 절차를 밟기 위해 장시간 머리를 맞댔다. 총학생회는 다음달 17일 고 교수 추모집회를 열기로 했다. 총장직선제와 재정위원회 구성 등을 두고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부산대 구성원들이 모처럼 한마음으로 총장직선제 사수와 대학민주화라는 대의명분 아래 뭉친 것이다.
평범한 교수의 충격적 죽음
고 교수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광복 70돌을 맞은 올해까지 민주화를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 수많은 대학생과 노동자 등이 있었지만 존경과 신뢰를 받는 정규직 대학교수가 대학과 사회의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대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부산대 교수와 교직원, 학생들은 고 교수가 시국선언문에 몇차례 이름만 올렸을 뿐이지 교수들의 이익단체나 사회 현안에 대해 견해를 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에 가입한 적이 없는 ‘평범한’ 교수였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고 교수는 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을까. 그의 지인들은 그의 성장 과정과 생전의 족적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고 교수는 문학소년이었다. 부산 대동고에 다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노트에 60~70여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현실과 시대를 비판하는 시를 썼던 김수영 시인을 좋아했다고 한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광주민주화운동을 탱크와 총칼로 짓밟았던 1980년 부산대 사범대를 가라는 고3 담임교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대학교수가 되겠다’며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지원했다.
고 교수는 대학 입학 뒤 현실정치나 사회참여와 거리를 뒀다. 이른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 부(산)대문학회, 귀성문학회 등에서 순수시를 썼다. 시 비평 등 현대시 탐구에 평생을 바쳤던 고 김준오 부산대 교수를 존경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뒤 고교 교사로 지내다가 1999년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무크지 <지평>에 시를 내 등단했으나 시 평론을 주로 썼다. 영화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부산대 영화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2013년엔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 시집 <평사리 송사리>(전망)도 냈다. 부산작가회의에선 이사를 맡아 행사 기획을 주로 했다.
고 교수와 고교 문예반에서 같이 활동하고 부산대를 함께 다녔던 동길산(54) 시인은 “고인은 남에겐 관대하고 온순하면서 자기 자신한테 엄격한 외유내강형이었다. 친구와는 스스럼이 없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좀처럼 주장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순수함이 자신을 내버려두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오래전부터 투신을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투신을 하기 며칠 전에 총장직선제를 요구하며 대학본부 앞 천막에서 단식농성 중인 김재호 부산대 교수회 회장을 찾아와 “미안하다”고 말한데다, 투신하면서 16절지 크기 두 장에 남긴 유언이 매우 차분하고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엄격한 고 교수의 성격을 고려하면 투신 동기도 이해될 듯하다. 그는 2011년 김기섭 총장이 출마했을 때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 공대나 의대 등 교수들이 많은 단과대학이 아니라 교수들이 적은 인문대에서 처음으로 총장을 배출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이다.
또 고 교수가 인문대 사학과 교수인 김 총장이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대학민주화를 무척 기대했다고 동료 교수들은 기억했다. 이 대학 인문대 한 교수는 “고 교수의 입장에선 믿고 지지했던 김 총장이 총장직선제 공약을 지키지 않고 간선제를 도입하는 것을 보면서 깊이 실망했을 것이고 책임감도 느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 총장이 김재호 교수회 회장이 단식하는 동안 여름휴가를 가지 않았거나, 일주일 동안의 휴가를 보내고 업무에 복귀한 17일 다른 지역에 출장을 가지 않고 학교로 출근해 농성 중인 교수들을 만났다면 고 교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부산대 교수회 비상대책위원회 관계자는 “17일 아침 8시께 김기섭 총장한테 항의하기 위해 20여명의 교수들이 대학본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김 총장이 나타나지 않아 보직간부한테 항의를 했다. 이때 고 교수가 뛰어내린 국기게양대 근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 교수가 단지 총장직선제만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고 교수가 이명박 정부 때부터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것을 쳐다만 보고 있지 말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실천을 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인문대 한문학과 교수는 “고 교수의 유언장을 보면 대학민주화와 사회민주화를 위해서 기꺼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고 교수의 죽음을 계기로 대학이 다시 학문의 자유를 위해 일어서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반격의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운동권도 아니던 문학 교수가총장직선제 요구하며 목숨 끊었다
간선제 추진하던 현 총장 지지했던
부채감이 죽음으로 이끌었을까
부산대는 다시 직선제로 선회했다 200여억원 예산 지원권 가진
교육부의 ‘옥죄기’ 계속되고
먼지 낀 단어로 보였던 ‘대학민주화’
전국 대학가로 퍼지고 있다
전국교수회의는 간선제 폐지 나서
고현철 교수의 죽음으로 총장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립대학 교수 사회의 요구가 커졌다. 고 교수의 영정 사진. 부산/김봉규 기자 bong9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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