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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5.22 19:38 수정 : 2015.05.24 13:55

17일 ‘명쫓사’(이명박에게 쫓겨난 사람들의 모임)와 ‘미권스’(정봉주와 미래권력들) 회원과 시민 50여명이 서울 강남 일대를 돌다 오후 3시30분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택이 있는 논현동에 도착했다. 경찰이 자택 정문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지키며 행진을 막았다. 참가자들은 백지 서한을 항의의 표시로 이 전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엠비 둘레길’ 행사 현장

▶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가 피해를 입는다”며 미래를 향해 합심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난 17일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 청담동 자택 앞으로 몰려가 “값싼 용서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외쳤는데요. 왜 그랬을까요. 이 대통령 퇴임 810일째 되는 날, 명쫓사(이명박에게 쫓겨난 사람들) 회원들과 고양이 꼬리를 엉덩이에 달고 나온 ‘고양이 시위대’가 서울 강남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을 따라가보았습니다.

“야옹야옹, 값싼 용서는 안한다야옹~”

논과 밭이 아스팔트 도로가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서울 강남은 욕망의 엔진을 단 토건자본주의의 중심지였다.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금융과 무역 회사들이 들어섰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에워쌌다. 돈이 몰려들었고, 돈을 가진 사람들이,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땅값이 치솟았다. 자본과 부동산은 강남에서 ‘건국이념’ 같은 가치다. 그래서 그럴까. 강남에선 대규모 시위가 잘 벌어지지 않는다. 이른바 ‘강남 좌파’들도 강북에 와서 시위한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한강에 흘러들어가는 물이 맑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제 이곳은 명품 가게들과 고급 주거단지로 주목받는다. 17일 오후 2시 청담동 패션의 거리 인근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리시버를 낀 남성들이 굳은 표정으로 섰다. 이들은 멀찍이 한 건물을 주시했다. ‘벙커’(Bunker)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3층짜리 건물이 남성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리시버를 낀 남성들 옆으로 고양이 한 마리를 안은 40대 여성이 스쳐지나갔다. ‘젤리’라는 이름을 지닌 고양이의 주인인 이 여성은 사내들을 지나 벙커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어 고양이 가면을 쓴 시민들이 벙커로 속속 집결했다. 평소의 한가로운 강남 거리 분위기가 아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명쫓사’들은 어떻게 사는가

“이제 강남 좌파들도 갈 곳이 생겼어요!”

정봉주 전 국회의원의 표정이 밝다. 벙커는 정봉주 전 의원이 최근 문을 연 카페다.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멤버 김어준씨가 연 대학로의 벙커와 같은 기능을 한다. ‘강남구 청담동 89-10’이 벙커의 주소다. 이명박 전 대통령 사저(논현동 29번지)로부터 직선거리로 1.7㎞ 떨어졌다. “강남에도 야당 지지자가 30%는 돼요. 그분들이 벤츠 몰고 와서 커피 마시고 가요.” 정 전 의원은 운영에 자신을 보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설명하지만 예외가 없는 건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의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사업가 출신이었다. 벤츠를 가진 ‘좌파’들에게 청담동 벙커는 숨쉴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정 전 의원은 생각한다.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강남 좌파들도 자꾸 선거에서 진다고 좌절만 하지 말고 모여서 뭔가 얘기할 공간을 갖자는 게 취지이죠.”

그가 ‘왜 하필 벙커의 위치가 강남이냐’는 질문에 답했다. 그의 팬클럽인 ‘미권스’(정봉주와 미래권력들) 회원들이 돈을 모았다. 정 전 의원이 대표이고 운영은 미권스 회원들이 한다.

이날 벙커에 사람들이 붐빈 건 ‘명쫓사’(이명박에게 쫓겨난 사람들의 모임)와 미권스 회원들이 ‘엠비(MB) 둘레길’ 행사를 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에 이은 두번째 행사다. 청담동 벙커를 출발해 성수대교 남단과 압구정역 등을 지나 논현동 이명박 전 대통령 자택 앞까지 행진한다.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자원외교, 방위산업 비리 등으로 탕진된 국민 세금 돌려놓으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지금 수금하러 갑니다’가 이날 행사의 부제다.

명쫓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 때문에 스스로가 직장이나 사회에서 쫓겨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명진 스님, 서기호 전 서울북부지법 판사, 방송인 김미화,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 노종면 전 와이티엔(YTN) 앵커, 정봉주 전 의원 등이 주요 구성원이다. 명진 스님은 명쫓사의 대표다.

명진 스님은 2010년 봉은사 주지에서 물러났고, 이 과정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압력이 있었다고 주장해왔다. 이후 그는 어떤 사찰의 주지로도 부임하지 못했다. 정봉주 전 의원은 2011년 이명박 전 대통령 명예훼손 유죄 판결로 2021년까지 피선거권이 박탈됐다.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을 폭로한 장진수 전 주무관은 2013년 11월28일 대법원에서 민간인 사찰 사건과 관련해 증거인멸과 공용물건손상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2017년 11월에나 공무원 재임용이 가능하다. 장 전 주무관의 부인이 최근 식당을 열어 근근이 생활비를 벌어 살고 있다. 노종면 전 앵커는 2014년 11월27일 대법원이 ‘구본홍 전 와이티엔 사장의 선임에 반발해 출근저지 농성을 벌였다는 등 이유로 해고된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해 복직이 요원한 상태다.

“진상 규명”. 세월호 침몰 사건을 두고 지난해부터 1년째 세월호 유족들이 외치는 구호다. 이 구호를 용산참사 유족들은 6년째 외치고 있다. 용산참사는 2009년 이명박 정부 때 벌어진 비극적 사건 중 하나다. 경찰의 무리한 철거민 진압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명이 죽었다. 세월호 유족의 미래는 용산참사 유족의 현재와 같을까. 이날 용산참사 유족 전재숙(고 이상림 부인), 이충연(고 이상림 아들), 정영신(고 이상림 며느리)씨 등이 엠비 둘레길 행사에 참여했다.

“경찰이 진압하면서 찍은 채증 영상이 공개되지 않고 있어요. 그 영상이 있다면 왜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경찰은 채증 카메라 17대가 동시에 꺼졌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세월호 시시티브이(CCTV)가 동시에 다 꺼진 것처럼요. 국정조사가 필요한데 이제 용산참사는 잊혀지고 있어요.” 정영신(42)씨가 말했다.

불타는 망루를 피해 탈출했다는 생존자 증언과 달리 왜 철거민 윤용헌, 이성수씨가 망루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인지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대중의 뇌리엔 정운찬 전 총리가 2009년 10월 농성장을 방문하고 참사 355일 만에 희생자 장례가 치러졌다는 것 정도가 남았다. 이 전 대통령이 쓴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에는 용산참사에 대한 기술 자체가 없다. 마치 없었던 사건처럼. 진압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현재 한국공항공사 사장이다.

서울 강남 ‘좌파 카페’ 벙커에
시민들이 속속 집결하다
명진스님·정봉주·용산참사 유족 등
“엠비가 탕진한 세금 100조 환수”
1.7㎞ 떨어진 엠비 자택 앞으로

엠비에겐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이들은 ‘쫓겨난’ 시간이었다
고양이 복장을 하고 구호는 “야옹”
대통령 집 도착했지만 ‘출타중’
그래도 이색시위는 즐거웠다

엠비 사식추진위원회, 떼인 돈에 빡친 시민…

“자, 이제 수금하러 갑시다!”

오후 2시20분. 명쫓사 대표 명진 스님과 정봉주 전 의원이 대열의 앞에 섰다. 옆에 용산참사 유족과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섰다. 그 뒤에 참가자 50여명이 섰다. 주로 30~40대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도 있었다.

지난달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며 삭발한 탓에 정 전 의원의 머리칼은 1㎝ 남짓 되었다. 행진을 시작하기 전 그가 연설을 했다. “엠비가 날려버린 국고 100조원이 얼마인지 사람들이 체감을 못합니다. 그 돈은 대학생 등록금 후불제를 10년간 할 수 있는 돈이에요. 우리 아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대학 다닐 수 있는 돈인데!”

‘수금하러 가는 길’이 그러나 꼭 비장한 분위기는 아니다. 참여자들은 엉덩이 부분에 털 달린 꼬리 장식을 달았고, 구호는 누군가가 “쥐를 잡자”고 외치면 “야옹!” 정도를 외치는 수준이다. “정봉주는 갔다 왔다. 이명박도 다녀오자(엠비 사식추진위원회)”, “사익 추구 자원외교, 챙겨먹은 내 돈 내놔(떼인 돈에 빡친 시민)” 등의 손팻말을 들었다. 곳곳에서 키득키득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양이 꼬리를 단 시민들이 청담동 ‘명품 거리’ 인도로 향했다. 명품 거리는 갤러리아백화점을 거점으로 삼성동 방향으로 이어진 청담동의 중심 같은 곳이다. 고급스러운 외관의 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서 손님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고양이 꼬리를 단 시민들은 돌체앤가바나, 애버크롬비, 오메가, 프라다 상점들을 차례차례 지나며 “야옹” 소리만 낼 뿐이다.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신사, 핸드백을 손에 든 사모님들이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곤 빤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행진 대열의 내용을 확인한 뒤 몇몇은 웃어 보였다. 시위의 내용에 공감해서인지, 익살맞은 행진 방식이 그냥 재밌어서인지 알 길은 없다.

“이런 건 좀 시민단체들이 배워야 해요. 시위가 재미있잖아요.” 수염을 깎지 않아 다소 초췌한 인상으로 나온 안진걸(42) 사무처장이 걸어가며 말했다.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주도한 그는 구속 기소됐다가 50여일 만에 보석으로 석방됐다.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은 안씨에게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및 일방교통방해 혐의 등)을 선고했다.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 건과 관련해 늦어지면서 1심 판결까지 7년이 걸렸다.

양아무개(40)씨는 2008년 촛불집회 참석 이후 어떤 집회에도 나오지 않았다가 7년 만에 ‘엠비 둘레길’에 나왔다. 미권스 회원인 그는 물리적인 충돌이 빚어지는 집회 방식에 부정적이다. “강남 사람들은 과격 시위 하면 겁내요. 이렇게 재미있는 방식으로 눈길을 끄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웃을 일 없이 사는데, 일단 재밌잖아요. 과격 시위는 오는 손님 내쫓는 불친절한 식당 같은 거예요.”

압구정 아파트를 지나던 도중 연예인 노홍철씨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시위대와 마주쳤다. 시민들은 “같이해요!”라고 말했지만 노씨는 “고생 많으십니다”라고 답하고 이내 사라졌다.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사람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명진 스님이 “쥐고기는 질렸다. 닭고기로 바꿔달라”고 새로운 구호를 제안하자 참가자들이 한바탕 웃었다. 스님의 윗입술이 텄다. “내가 하도 욕을 많이 해서 입술이 텄나봐. 옛날에는 쥐(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유)만 잡으면 됐는데 이젠 쥐와 닭(박근혜 대통령을 비유) 다 잡아야 하니 피곤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부르는 속어가 문어였다. 한동안 뜸하더니 다시 대통령을 동물에 비유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시위대는 성수대교 남단을 지나 압구정역 인근 성형외과 병원들이 밀집한 거리를 지났다. 중국어로 쓰인 간판들이 경쟁하듯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중국 연변 거리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몇 년 새 강남에는 영어 대신 중국어 간판이 부쩍 늘었다. 외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고양이 시위대’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경찰은 시위대가 건널목을 천천히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아이고, 강남 경찰 인심 좋네! 강북에선 맨날 쫓겨다니기 바쁜데!” 누군가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경관이 미소를 지었다. 강남경찰서에서 일하는 한 정보과 형사가 정봉주 전 의원에게 다가와 “오늘은 분위기가 지난해보다 좋다”고 말을 건넸다. 정 전 의원은 “벙커에 자주 와서 커피 마시고 가라”고 농을 건넸다.

논현로 139길. 을지병원에서 학동역으로 이어진 논현로 중간 즈음 나오는 작은 골목길이다. 이 골목길은 이명박 전 대통령 자택으로 이어진다. 시위대가 골목길 앞에 도착했다. 경찰이 출입을 통제했다. 시위대 대표단만 이 전 대통령 자택까지 걸을 수 있도록 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오후 3시30분께 명진 스님, 정봉주 전 의원, 용산참사 유족이 시위대 대표로 사저 앞까지 걸어갔다. 감귤빛 기와를 얹은 고풍스런 3층짜리 집 담벼락이 나타났다. 방패를 든 경찰이 2m 너비의 골목길을 여러 겹으로 통제했다. 대표단은 더는 걸어갈 수 없었다. 골목길을 지나던 주민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시했다.

“제 남편(고 이상림)은 먹고살려고 망루에 올라갔다가 비참하게 죽어서 나왔는데 이명박은 이렇게 호화스런 저택에 살고 있군요. 분통이 터집니다.” 용산참사 유족 전재숙씨가 행진을 막아선 경찰 앞에서 하소연하듯 말했다. 정봉주 전 의원이 프랑스 철학자 장 아메리의 발언을 전하며 집회 마무리 발언을 했다. “잘못된 과거를 나태하고 값싸게 용서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값싸게 용서해선 안 됩니다. 처벌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게 해야 합니다. 오늘 엠비 둘레길은 이것을 상기하는 자리이길 바랍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자택 앞에 설치된 볼록거울에 전경들이 비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출판기념회 패러디 행사도 열릴 듯

수금은 예정된 실패였다. 어차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시민들이 집 앞에 도착한 시각 출타중이었다. 그럼에도 둘레길을 걸은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모자를 푹 눌러쓴 최원명(35)씨는 “어차피 오늘의 시위가 크게 이슈가 되지 않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엠비가 자서전까지 내며 자기 변명으로만 일관하는데 가만있을 수만은 없잖나. 그냥 가만있기 싫어서 나온 것이니 즐거웠다”고 말했다. 최씨는 엠비 둘레길 행사를 준비한 실무자다. <대통령의 시간>의 또다른 출판기념회를 열어볼 계획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민들은 발걸음을 돌려 청담동 벙커로 돌아갔다. 대열 앞에서 확성기를 든 남성이 무언가 계속 외쳐댔지만 10차선의 넓은 도산대로에 울려퍼지기엔 미약했다. 고양이 젤리는 주인의 가방에서 쌔근쌔근 잠에 빠졌다. 일요일 오후의 강남 거리는 한적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마지막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지난 5년간 국민을 위해 매 순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기에 후회나 아쉬움은 없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가장 행복한 일꾼이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이 느꼈던 행복함의 깊이는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그의 책 <대통령의 시간> 소개문 표현대로 “그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의 몫이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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