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뒷줄 왼쪽)씨와 응우옌떤런(뒷줄 오른쪽 모자 쓴 이)씨가 8일 낮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수요집회’에 참석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왼쪽)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를 위로하며 함께 서 있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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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 1975년 종전된 베트남전쟁에 연인원 32만명을 파견한 한국군은 9000명에 이르는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의혹과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 학살에서 살아난 두 명이 광복 70년, 베트남전 종전 40년을 맞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습니다. 방한 중 이들의 일정은 이들이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들의 방한 일정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지난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사단법인 평화박물관의 갤러리 ‘스페이스99’. 광복 70년, 베트남전 종전 40년을 맞아 개막한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사진전에 초대된 응우옌떤런(64)씨와 응우옌티탄(55)씨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사진전 개막을 축하하기 위한 리셉션이 전날 뜻하지 않게 취소된데다, 자신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헤집어 놓은 전쟁이 한국에선 ‘기념’할 일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사진전을 연 이재갑 작가가 이들을 전시장 한쪽 조그만 방으로 안내했다. 한국 이곳저곳의 전쟁 기념탑이 찍힌 사진들이 영사기를 통해 어두운 천장에 투사되고 있었다. 베트남 곳곳에 한국군을 ‘증오’하는 60여개의 증오비가 세워져 있는 것과 달리, 한국 땅 도처엔 100여개의 참전 기념비가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한국에선 베트남 참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과, 베트남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전쟁 비석에 관한 작업을 해왔다는 이 작가는 전시장에 대한 설명을 마친 뒤 이들에게 “응원이 됐으면 한다”며 웃었다. 런씨와 탄씨는 주먹을 쥐어 흔들어 보이며 이 작가를 따라 잠시 환한 표정을 지었다. 런씨는 앞서 한국-베트남 시민모임에서 선물한 둥근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를 받을 때 런씨가 “귀한 자리에서 쓰겠다”고 했던 모자다. 이 두 사람과 함께 방한한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증거와 흔적)박물관의 후인응옥번(53) 관장은 “우리 박물관에도 아픈 사진들이 걸려 있다. 전쟁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했으니 작가도 아팠을 것이다. 우린 한국 군인들도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사과할 때 그들의 마음도 편해질 것”이라고 했다. 전날 인근 조계사 일대를 에워싸고 평화박물관의 사진전 개막을 막아선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등 300여명의 참전군인들을 염두에 둔 말이다. 일제히 군복과 선글라스를 쓰고 나온 참전군인들은 서너시간 동안 군가를 틀고 고함을 내지르며 자신들이 양민 학살범으로 매도당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개막 행사는 취소됐고 런씨와 탄씨는 조계사 인근에서 비공개로 열린 기자간담회를 통해 “진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인데, 그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며 울먹였다. 전시장을 둘러보던 중 평화박물관의 석미화 사무처장이 자신에게 온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다음날 대구 경북대학교에서 예정된 간담회 장소가 변경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학교 쪽에서 평화박물관을 이적단체라고 했대요.” 박물관 관계자들 사이로 근심어린 표정들이 지나갔다.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만남 전시장은 베트남과 한국에 세워진 전쟁 관련 비석들, 민간인 학살 상황을 증언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으로 채워졌다. 사람들의 사진 앞엔 뿌연 비닐이 차양처럼 설치돼 있었다. 이 작가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사체를 처리할 때 주로 비닐을 썼다. 이들에게 비닐은 미군의 비상식량 ‘시레이션’과 함께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라고 했다. 뿌연 비닐 너머의 한 사진 속엔 주름이 자글자글한, 퀭한 눈의 한 베트남 할머니가 설움이 북받치는 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린 손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전하고 싶지만, 전하지 못하는 어떤 말을 곱씹는 듯했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한국 군인들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자라서도 이 말을 기억하거라.” 런씨와 탄씨가 사진전 뒤 참석한 ‘수요집회’의 한 손팻말에 적힌 글이다. 할머니가 전하고 싶지만, 전하지 못한 말이 아니었을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매주 수요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연다. 이날은 150여명의 참석자들이 모였다. 런씨와 탄씨는 사진전 관람을 마친 뒤 집회장으로 걸어가 김복동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의 뒤편에 섰다.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었고 둘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가 이내 결연해졌다. 누군가 편한 표정을 주문하자 그제야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다시는 어떤 전쟁에서도, 성폭력 피해자나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탄씨는 “할머니들과 한국 친구들에게 인사드린다. 제 이름은 응우옌티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생존자다. 학살 때 8살이었다”고 말했다. 탄씨의 발언마다 집회 참석자들은 안타까움의 탄식을 뱉어냈다. 탄씨는 집회가 끝난 뒤 승합차에 오르는 할머니들을 부축했다. 런씨와 탄씨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만난 건 이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방한 첫날 숙소에 여장을 풀자마자 찾은 곳이 바로 할머니들이 모인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이었다. 방한 첫날인 4일 오후 늦게 나눔의 집에 도착한 이들을 평화박물관의 공동대표이기도 한 이옥선(88) 할머니를 비롯해 7명의 할머니들이 맞았다. 런씨는 1966년 2~3월 모두 1004명이 숨진 빈딘성 떠이빈사(옛 빈안사) 학살의 생존자다. 학살 당일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고 고아로 자랐다. 탄씨는 1968년 2월12일 주민 74명이 희생된 퐁니·퐁넛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그날 어머니와 남동생·언니·이모·조카 등 5명의 가족을 잃었다. 이들의 사연을 들은 유희남(87) 할머니는 “전쟁 피해자의 괴로움과 슬픔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같은 피해자로 만나니 정말 반갑다”고 했다. 가해자가 한국군과 일본군이란 것만 다를 뿐인 두 피해자들은 쉽게 공감했고 기꺼이 아픔을 나눴다. 베트남엔 증오비, 한국엔 기념비“한국 군인도 전쟁 피해자라 생각”
행사장 에워싼 고엽제전우회 보며
“진실 인정하지 않아 가슴 아파”
위안부 할머니와 나눈 공감·아픔 국회서 기자회견 열어 학살 증언
어머니 얘기 땐 말 잇지 못하지만
“참전군인들 용서하고 싶은 마음”
양심있는 한국인에게 ‘위로’받아
“이제 한국인들 무섭지 않아요” 첫 기자회견과 인터뷰, 위로 방한 사흘째인 6일 런씨와 탄씨는 한국의 국회를 찾았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잔인한 학살과 고통스런 비명으로 기억되는 학살의 소리는 생생하게 제 머릿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다시 되돌리고 나면 보름은 잠도 못 자고 몸이 아픕니다. 하지만 그날을 기억하고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제 생의 마지막 소임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국회의사당 정론관에서 런씨와 탄씨는 그간 수백번도 더 반복해 이야기해온 학살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베트남으로 자신들을 찾아온 이가 아닌 다른 한국인들에게, 그것도 한국 땅의 공개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고통스런 증언에 대한 반응은 바로 다음날 전해졌다. 7일 오후 조계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사진전 개막 행사는 취소됐다. 이들은 대신 머물던 인근 호텔의 조그만 방에서 비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침대를 걷어내고, 다른 방에서 의자를 빌려와 겨우 10여명의 취재진과 두 명의 베트남인, 한 명의 통역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되기도 전 런씨는 “나가서 저분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기자들에게 얘기하면 전달이 되는 것이냐”며 조급해했다. 창밖에선 고엽제 전우회가 부르는 애국가가 들려왔다. 그는 “참전 용사들을 만나면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려 한다.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 못했을 것이다. 한국 국민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그들에게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에 있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솔직한 제 심정을 토로하고 싶다”고 했다.
9일 오후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대구광역시지부 회원들이 대구 경북대학교 교내에서 집회를 여는 모습. 정춘광(73·왼쪽 둘째) 고엽제 전우회 대구지부장은 “어느 나라 전쟁이든 소수 양민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진 박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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