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볼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환자들을 만난 순간 무너져내렸다. 한국에서 만났던 평범한 환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1월20일 시에라리온 프리타운 에볼라 치료소의 환자 임마누엘의 모습. 사진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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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시에라리온의 ‘에볼라 치료소’
▶ 서아프리카 일대에 에볼라 바이러스 사태가 발생한 지 1년이 됐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집계로 서아프리카에서만 7373명(2014년 12월 기준)이 숨진 무서운 질병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에볼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실태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에볼라 치료를 위해 시에라리온을 다녀온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교수가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지금 서아프리카에 가장 필요한 건 국제적 관심과 지원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합니다.
드디어 시에라리온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1월17일(현지시각)이었다. 아프리카 중부 대서양 연안에 놓인 어떤 나라. 그곳으로 비행기가 날았다. 비행기 안은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유럽 사람들로 더 북적였다. 이곳에 한국 사람 9명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 승객 대부분은 한번도 와보지 않았던 대륙으로,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앓고 있는 질병 ‘에볼라’(Ebola)를 치료하러 가는 의료진이었다. 우리는 막연한 친밀감과 동지애를 느꼈다. 18일 새벽 비행기는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의 룽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아 유 에볼라 파이터?”
“아 유 에볼라 파이터?”(당신은 에볼라와 싸우려고 온 사람인가요?)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마스크를 한 40내 남성 직원이 내게 물었다. “예스.” 짧게 대답하자 그는 “굿 럭”(행운을 빈다)이라고 답해주었다. 뜨거운 적도의 대지가 뿜어내는 열기 속에서 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전쟁터에 왔구나. 이제 파이터로서 할 일을 해야겠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둠에 잠겨 있던 프리타운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번뇌가 있었는지 모른다. 지난해 3월 ‘국경 없는 의사회’가 서아프리카 3국(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다고 알렸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그해 8월 “전세계적인 공중보건의 위기”라고 선언할 때까지만 해도 에볼라는 내게 감염내과 의사로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어떤 질병에 불과했다.
합류 결심하자 가족들은 울었다
1월18일 시에라리온에 도착했다
가건물 형태의 허름한 치료소에
30여명 환자가 신음하고 있었다 “마미 마미” 하며 엄마를 찾던
일곱살 카누와 네살 시세이에게
열이 내리는 기적이 벌어졌다
그러나 3주차 때 감염환자 급증
9명의 죽음에 심한 자책감 천진난만한 표정 아이들에 긴장 풀려 고드리치에 마련된 에볼라 치료소(ETC)에 도착했다. 중환자실 24병상 등 100병상 규모를 갖췄다. 치료소라고 하지만 정식 병원도 아니고 지난해 말 영국 정부가 급히 지은 1층짜리 가건물 같은 곳이다. 슬레이트 따위의 벽, 천막을 두른 허름한 지붕들, 그 안에 에볼라 환자들과 40여명의 의료진이 에볼라와의 전투를 벌였다. 치료소에 도착해서도 기본 안전교육을 받아야 해서 도착 나흘 뒤에서야 첫 환자를 맞닥뜨렸다. 그는 열일곱살 소년 임마누엘이었다. 임마누엘은 2주 전 이곳에 입원했다. 여러번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 간신히 버텨 살아남은 소년이었다. 후유증으로 엉덩이에 욕창이 생겼고 팔과 다리는 기능이 떨어져 왼팔만 살짝 들 수 있어 온종일 누워 있었다. 임마누엘은 인공호흡기를 달고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에볼라 환자라서 처음에는 겁을 먹었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의료진을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에 경직된 마음은 한순간 풀어졌다. 그냥 한국에서 흔히 봐왔던 환자들과 똑같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임마누엘은 에볼라에 걸린 부모로부터 전염됐는데 부모는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치료소에 실려온 많은 아이들이 그랬다. 에볼라는 원래 콩고민주공화국에 있는 강 이름이다. 1976년 이 일대에서 에볼라 질병이 처음 발견되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숙주로는 박쥐나 유인원이 의심되지만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에볼라에 걸리면 7~14일 안에 숨지는 경우가 많은데 치사율은 50~89%로 높다. 임상연구가 완전히 끝난 치료제는 아직 없다. 현지에서는 환자에게 영양과 수액을 공급하고 환자 스스로 이겨내길 기대하는 보조 치료밖에 할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임마누엘과 비슷한 시기에 실려온 아이들이 있었다. 일곱살 여자아이 카누와 네살 사내아이 시세이였다. 내가 맡은 첫 소아 환자였다. 어린 에볼라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 숨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고열과 구토, 설사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들은 뭘 물어도 귀찮은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했다. 의료진은 국적을 불문하고 사전에 약속한 것도 아닌데 하나둘씩 이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초콜릿 등을 가져다주었다.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인식하도록 노력했다. 기적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며칠 뒤 열이 떨어지고 물과 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날 때쯤에는 침대에서 내려와 몇발짝 걷기도 했다. 의료진은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며 아이들과 인사했다. 카누는 매니큐어 선물을 가장 좋아했다. 안타깝게도 카누의 아버지는 에볼라로 숨졌다. 어머니도 에볼라에 걸렸는데 이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 겨우 카누의 작은아버지에게 연락이 닿아 퇴원시켰는데 카누는 부모 없이 살아가야 할 처지였다. 카누가 아플 때 “마미, 마미” 하며 엄마를 찾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예순 넘은 어떤 할머니와의 기억은 가슴이 아프다. 비교적 상태가 좋은 환자였다. 치료소로 딸이 전화를 걸어와 펑펑 울며 걱정했지만 할머니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지금 괜찮은 편이니 힘내세요. 밥 잘 먹고 견디면 곧 좋아질 거예요”라고 말해줬다. 할머니는 그다음 날부터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 의식이 없었다. 에볼라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질병이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던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손에 맥이 탁 풀렸다. 할머니는 며칠 뒤 숨졌다. 1진 의료진이 근무할 때까지(1월20일께) 치료소 입원 환자가 30명을 넘어서기도 했지만 2진이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전반적인 환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에라리온 정부도 환자 수 감소를 발표하면서 이제 이 나라에서 에볼라 전투가 끝을 향해 가는구나 하고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감염병은 대규모 유행이 완전 종식되기까지 산발적으로 유행이 계속되기에 몇개월간은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진다. 산발적 유행 상황이 벌어지지 않길 기대했지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근무 3주차 때 감염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루 3~4명씩 일주일 내내 계속 들어왔다. 환자 급증의 배경은 이랬다. 어선 한 척이 프리타운 애버딘 항구에서 배로 2~3시간 떨어진 바나나섬 주변으로 출항했다. 선원 중 한 명이 발열과 구토, 설사를 동반하면서 앓더니 3일 만에 배 안에서 숨졌다. 선원들은 겁이 나 그 환자의 주검을 바다에 버리고 2~3일 더 고기를 잡고 나서 항구로 돌아왔다고 한다. 발열을 동반한 사망자가 있을 경우 보건당국에 신고하고 선원들은 21일간 에볼라 발병 여부를 관찰하면서 격리조치됐어야 하는데 선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에볼라에 걸린 선원들은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까지 감염시켰고 많은 환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에볼라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치료소로 중증 환자들이 몰려왔다. 일주일 사이 13명의 환자가 입원했는데 그중 4명만 살아남았다. 이 환자들이 입원했을 때 의료진은 모두 무거운 중압감에 시달렸다. 아침 회의 때 가끔 농담도 하곤 했던 의료진에게선 미소가 사라졌다. 몰려드는 환자들로 밤근무도 많아지고 피로도가 증가했다. 감염내과 의사로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다 살릴 수 없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제이콥이라는 이름의 선원(22)이 기억난다. “꼭 살아남으라”라고 말하며 손을 잡아주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던 제이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동안 생사를 오가며 고생하던 그는 다행히 회복해 치료소를 제 발로 걸어 나갔다. 제이콥을 껴안아주며 느꼈던 따스한 체온을 잊을 수 없다. 근무 5주째인 2월 말께였다. 의료진 3진이 치료소에 도착했다. 이제 우리는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사흘 전 낮근무를 마친 뒤 퇴근해 숙소에 들어갔는데 치료소의 병원장 역할을 하던 여자 의사 지나(50)가 어딘가로 심각하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한국 의료진과 가장 친하게 지내던 세르비아 남자 간호사 밀란(26)이 며칠 전부터 몸이 안 좋아 쉬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미열이 있었고 말라리아 진단을 받아 빨리 나으라고 격려했었다. 그는 이날 아침부터 고열이 났고 에볼라 확진 판정을 받았다. 한국에 관심이 많아 한국 간호사들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던 그가 에볼라에 걸렸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다. 밀란은 우리가 떠나기 직전까지도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한국 의료진은 함께 찍은 사진을 태극기에 붙여 밀란의 침대에 세워준 뒤 회복을 기원하는 글을 침상에 붙여주었다. 아무 탈 없이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마지막까지 에볼라는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의료진 2진은 2월22일 귀국했다. 다행히 밀란이 나중에 회복해 퇴원까지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밀란은 한국 의료진 한명 한명에게 이메일을 보내어 감사 인사를 해주었다. 5월께 한국에 들른다고 하는데 그때 밀란을 만나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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