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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전 7시20분께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김종필 전 총리 부인 박영옥씨의 발인식이 치러졌다. 김 전 총리, 딸 김예리(오른쪽 셋째)씨, 며느리 김리디아(오른쪽 둘째)씨, 박씨의 동생 박준홍(맨 오른쪽) 전 친박연합 대표 등 유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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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JP 부인 박영옥씨 장례식
▶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 박영옥(86)씨가 지난 21일 숨졌다. 발인은 25일이었다. 충남 부여의 김 전 총리 가족묘지에 묻혔다. 남편은 거물이었지만 본인은 겉으로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삶도 쉽지 않았다. 역사가 그의 가족에게 상처를 남겼다. 주로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 등으로 불린다. ‘사회주의자 박상희의 딸’이기도 하다. 그의 장례식장을 지켜봤다.
그는 그냥 자기 자신으로는 기억되지는 못했다. 24일 오전 11시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층에 화환이 늘어서 있다. ‘대구 신명여고 35회 동창회’ 화환 앞을 지나치면 빈소 입구가 보인다. 495㎡(150평) 넓이의 30호실 빈소 입구에 걸린 ‘근조-고 박영옥 여사 장례식’ 플래카드 아래 기자들이 서 있다. 부조함 옆에 ‘부조는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는 글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영정 좌우에 화환이 늘어서 있다. 영정 왼편에 차례대로 노태우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정의화 국회의장, 이완구 총리의 화환이 있다. 오른편에 박근혜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의 화환이 서 있다. 오전 11시 남편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주로 빈소 안 내실에서 휠체어에 앉아 조문객을 맞았다. 김 전 총리의 부인 박영옥씨의 5일장 내내 조문객이 오고 갔다. 박씨는 서울 순천향대학 병원에서 21일 밤 숨졌다. 척추협착증과 요도암으로 투병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는 21일부터 5일장으로 치러졌다.
부모 박상희-조귀분, 황태성 소개로 결혼
박씨는 일단 ‘김종필의 아내’였다. 24일 오후 1시25분께 조문하고 나온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은 “(내가) 중구 국회의원이 된 이후 세배 가면 여사님이(박영옥씨가) 늘 차도 타주시고 잘해주셨다. 해마다 세배하러 갔다”고 <한겨레>에 말했다. 나 의원은 “정갈하게 내조하지 않았을까”라고 덧붙였다. ‘정갈하게 내조한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 박씨에 대한 주된 기억일 것이다. 김 전 총리는 두차례 총리를 지냈다. 1971년 6월~1975년 12월 처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치적 연합 이후 1998년 8월~2000년 1월 두번째로 총리직을 수행했다.
박씨는 누군가의 아내이기 전에 잘 교육받은 ‘신여성’이었다. 박씨는 1929년 9월26일 경북 선산군에서 박상희·조귀분 부부의 장녀로 태어났다. 출신 소학교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9년 대구 신명여학교(현 신명고)에 35회로 입학했다. 신명여학교 앞에 ‘영남 최초의 여학교’라거나 ‘근대 여성 교육의 산실’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907년 미국 장로교계 선교사가 설립했다. 민족교육 학풍이 강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인 3월8일 전교생이 ‘대구 3·8 만세 운동’에 참가한 사건이 유명하다. 고등교육을 받은 ‘배운 여자’는 그때 극소수였다. 국가통계포털에서 ‘교육정도별 인구 및 비율’ 자료를 보면, 1955년 당시 여고생은 5만5300명으로 전체 여성 인구의 0.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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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영옥씨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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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2월30일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부인 박영옥씨와 방한한 미국 영화배우 대니 케이와 만났을 때, 박씨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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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2인자-국무총리 등
남편은 현대사의 거물이었지만
부인은 조용하고 가정적이었다
“정치인 아내지만 정치 모릅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따랐던
진보적 민족주의자 박상희의 딸
대구10월사건 때 중재하다
경찰 총 맞은 아버지 죽음 아파해
그걸 알고도 제이피는 결혼했다 피학살자 유족회 도운 어머니 조씨 1950년 6·25가 벌어지자 박 전 대통령과 김 전 총리는 육군 정보국에서 함께 근무했다. 육군 정보국이 대구에 주둔하던 당시 김 전 총리는 박씨를 처음 만났다. 김 전 총리는 첫 만남을 이렇게 기록한다. “어느 날 문을 확 열고 나오다가 (육군본부) 사무실 앞에서 서성거리는 여인과 마주쳤다. 순간 마음에 모닥불과도 같은 강렬한 열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누구를 면회 오셨습니까?’ ‘저…실장님을….’ 여인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어 올랐고 그것이 하나의 환한 달덩이와도 같이 황홀하게 어려왔다. ‘어떻게 되십니까?’ ‘저…조카가 찾아왔다고 하시면….’ ‘네 알겠습니다.’”(<비원의 번영탑>·진명문화사·1967) 김 전 총리는 소위였고 정보실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령이었다. 김 전 총리와 박씨는 1951년 2월 대구에서 결혼했다. 연좌제 피해자가 될 위기에 있던 사회주의자의 딸과 방첩이 임무인 육군 정보국 장교가 결혼한 것이다. 박씨는 김 전 총리의 배려로 1956년 숙명여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졸업하지는 못했다. 1960년 4·19가 일어났다. 6·25 때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이 북한군과 남한군 양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국군 양민학살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피학살자 유족회를 결성해 국가 차원의 조사와 배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제시대 야학 활동가였던 김 전 총리의 장모 조씨는 이때 역사에 등장한다. 피학살자 유족회 일을 도왔다. 1960년 피학살자 유족회에서 활동했던 학살 피해자 유가족 김하종씨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60년 당시 대구시 동성로에 있던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사무실에서 소위 몸뻬를 입은 조○○를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몸뻬 아줌마로 불렸으며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의 부녀부장, 또는 선산유족회 부녀부장으로 활동했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조○○’이 ‘조귀분’이다. 학살에 참여한 극우단체 회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61년 5·16 쿠데타 뒤 상황이 정반대로 변했다. 당시 ‘혁명공약’ 1항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 것이었다. 김하종씨는 쿠데타 뒤 판결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2010년 재심을 청구해 뒤늦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하종씨는 2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나는 1960년 경주 피학살자 유족회와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군수사령관을 했다. 김 전 총리의 장모 조귀분씨가 대구의 경북유족회 사무실을 찾아 만났고 이후 조씨 집 등에서 모두 4번쯤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당시 조씨가 ‘사위가 울산유족회에 차량지원을 해줬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씨는 연좌제의 피해자가 될 뻔한 시동생이 대통령이 되고 그의 측근인 사위가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비판자를 연좌제로 처벌하는 모순된 시대를 조용히 살다가, 1993년 11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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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이자 김종필 전 총리 부인 박영옥씨의 아버지인 박상희는 대구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진보적 민족주의자·독립운동가였다.
박준홍 전 친박연합 대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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