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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9 19:35 수정 : 2014.08.31 11:13

‘서촌 옥상화가’ 김미경씨가 28일 서울 종로구 옥인동 한 다세대 빌라의 옥상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인왕산과 그 아래 서촌 풍경이 그의 그림 주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서촌 ‘옥상 화가’ 김미경의 하루

▶ 지금 행복하십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십니까? 여기 예전보다 훨씬 돈도 못 벌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지만 너무 행복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에서 서촌 옥상화가로 변신한 김미경씨입니다. 땡볕 아래서 인왕산과 한옥지붕 그림만 그려도 너무 좋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기사를 읽은 뒤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서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책임은 못 집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나”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새벽. 김미경(54)씨는 주섬주섬 종이와 화판, 마실 물, 펜, 낚시의자 등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의 작업실, 옥상으로 가기 위해서다. 요즘 같은 불볕더위에는 낮에 작업을 하기가 힘들다. 햇볕이 기승을 부리기 전, 새벽이 그림 그리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그는 서촌의 ‘옥상화가’다.

그는 올해 초부터 서촌 곳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 동네를 일컫는 명칭이다. 처음에는 길거리에 앉아서 거리 풍경을 그렸다. 거리에서 누군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보기 드물다.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나가기도 하고 뒤에 서서 한참을 구경하다 가기도 했다. 가장 압권은 지난 4월 경복궁 서쪽 영추문 쪽에서 통의동과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릴 때 일어난 일이다. 202경비단 소속의 한 경찰관이 와서 “여기서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며 쫓아냈다. ‘보안 지역’이기 때문이란다. 청와대와 가까운 이곳은 길거리에서 행인보다 경찰을 더 자주 볼 수 있는 지역이다. 그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영추문 앞 화단에서 간이의자에 앉아 스케치북으로 몇시간 그림을 그리는 일이 대한민국 국가 보안에 어떤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존경받는 자리 내던지고
가난한 전업화가 선택
빵집 아르바이트 하면서
하루종일 서촌 옥상에서
동네 풍경을 그리며 산다

“여기서 이러면 안됩니다”
경찰이 쫓아내기도 하고
시원한 얼음물 갖다주며
격려해주는 사람도 있다
그림으로 먹고살기 꿈꾼다

경찰관한테 쫓겨난 뒤 국민신문고에 민원

너무 화가 나서 국민신문고(epeople.go.kr)에 민원을 제기했다. 경복궁 영추문 앞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법적 근거를 제시해 달라고. 청와대 쪽을 향해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고 통행에 불편을 준 것도 아닌데 왜 개인의 예술 활동을 제한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냐고. 그는 혹시라도 법적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터무니없는 일이라서 친구들을 여럿 끌고 와서 다 함께 그림을 그리는 ‘그림 시위’를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경찰청에서 장문의 사과글과 함께 그림을 그려도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올해 상반기 인사이동으로 전입한 직원이 모든 일을 통제한다는 생각으로 근무를 하다가 생긴 실수라는 설명과 함께. 그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고 그 뒤 지나가는 전경들이 그림을 그리는 그를 보고 인사를 할 지경이 됐다.

그는 길거리를 그리다가 옥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엇보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좋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예전부터 새 모형을 수집해 왔다. 무엇보다 새의 시선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림도 이른바 ‘버즈아이 뷰’, 즉 하늘에서 바라본 그림을 좋아했다. 하늘에서 동서남북을 훤히 보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그림 말이다. 옥상에서 보는 풍경은 마치 새처럼 하늘에서 보는 풍경 같았다. 주로 인왕산을 배경으로 풍경을 그린다. 신(新)인왕제색도인 셈이다.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그린 수묵화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그는 아름다운재단의 사무총장이었다. 79학번으로 신입생 때 10·26과 12·12 사태를 겪고, 광주항쟁이 일어난 시기에 대학을 다닌 그가 어떤 생활을 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대학원 시절 여성운동을 했던 그는 <여성신문> 편집장을 거쳐 1988년 <한겨레>가 창간할 때 참가해 기자 생활을 17년 했다.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에 전력투구한 인생을 살았던 셈이다. 결혼도 그에게는 하나의 사회적 도전이었다. 1992년 그의 결혼은 방송, 신문에 실리며 화제가 됐다. ‘석사 아내와 고졸 남편’이라는 제목이었다. 골수 페미니스트였던 그는 남편의 경제권이나 남편 중심의 가족 속으로 편입되는 결혼에 엄청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좌지우지할 시집도 재산도 없고 나의 커리어를 존중해 주는 남자’. 그가 남편을 선택한 중요한 기준 중 하나였다.

미국생활 7년, 뭔가가 바뀌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7년간 미국 생활을 하면서 많은 게 바뀌었다. 그는 이혼을 했고, 대학교 3학년이 되는 딸을 미국에 남겨둔 채 혼자 돌아왔다. 아름다운재단이 사무총장 자리를 제안했고 의미도 있고 ‘폼’도 나는 그 자리를 당연히 그는 고맙게 받아들였다. 신문사에 일할 때부터 ‘일중독자’로 유명한 그가 일이 힘들어서 못할 자리도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변해 있었다. 그의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우던 사회적 자아가 개인적 자아에 밀려난 것이다. 미국 생활을 정리해 쓴 <브루클린 오후 2시>에서 그는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내가 어느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신문사에서 일하고… 그 방패막이들이 완전히 무장해제된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존엄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천둥벌거숭이로도 존엄할 수 있는 내 속 존엄성의 알갱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이런 자리에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닌 존엄한 사람이 아니라,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현재의 내가 바로 존엄한 나다.’ 수십년간 억눌려 있던 개인적 자아가 한국문화원의 리셉셔니스트(안내원)로 일하며 “천둥벌거숭이” 생활을 했던 미국 생활 동안 활짝 꽃폈다.

옥상화가 김미경씨가 그린 신(新)인왕제색도 중 하나. (※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아름다운재단 옥상에서 보는 인왕산과 그 산자락 아래 펼쳐져 있는 한옥 지붕을 보는 순간부터 이걸 그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펜이 있는 스마트폰을 사서 무작정 그렸다. 2012년 6월8일에 그린 인왕산 전경이 돌아와서 그린 첫 그림이다. 그리고 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미친 듯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그렸다. 일하다가 짬만 나면 그림을 그리러 달려나갔다.

그런데 마음속에는 갈등이 일었다. 정말로 열심히 일해야 하는 자리, 헌신해야 하는 자리를 맡고 있으면서 이렇게 그림만 그려도 되는 것인가. 맡은 일이 공익적인 성향이 강한 만큼 죄책감도 커졌다. 아름다운재단의 주요한 후원자인 가수 이효리씨에게 그의 강아지를 그려서 선물한다든가 가수 이적씨에게 달팽이를 그려 준다든가 하는 식으로 ‘일과 취미의 조화’를 해보려고 시도했지만 ‘그림만 그리고 싶다’는 열망은 계속 커져갔다. 나중에는 원형탈모가 오고 몸이 아플 정도로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일종의 ‘신내림’이었던 셈이다.

그는 지난해 말 일을 아예 그만두고 화가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모두 말렸다. 반응은 비슷했다. “그림 그리는 사무총장, 얼마나 멋지냐. 그림은 취미로 해라.” 모아놓은 재산도 없는 그가 그림만 그려서는 굶어죽기 딱 좋았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1년이라도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살고 싶었다. 먹고사는 걸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는 결심이 섰다. 적게 벌면 적게 쓰면 된다.

그림값, 일당만큼만 돼도 먹고살지

그의 옥상화가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아침에 화판을 옆구리에 끼고 마실 물과 앉아 있을 의자, 펜 등이 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꼼짝 않고 앉아서 그림을 그린다. 경찰이나 경비원 등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며 쫓아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림에 관심을 보이며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더 많다. “추울 때는 따뜻한 차 한잔, 더울 땐 시원한 얼음물이나 먹을거리를 갖다주는 사람이 많아요.” 이렇게 하루에 여덟시간 이상씩 그림을 그린다. 40×30㎝의 그림 한장을 그리는 데 100시간 정도 걸린다. 지금은 옥인동 47번지가 내려다보이는 한 3층 다세대 빌라의 옥상에서 인왕산과 그 아래 동네를 그리고 있다. 개발과 보존의 경계선에서 위태위태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곳이다. 친일파 윤덕영의 한옥집이 내려다보이는 이 전경을 그는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풍경”이라고 표현했다. 뒤를 돌아보니 청와대 지붕이 보였다. “아마 저를 누가 감시하고 있긴 할 거예요. 여기에선 옥상에서 뭘 하면 다 걸리더라고요.”

일주일에 세번은 저녁에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예전에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아름다운재단 가까이에 있는 가게다. 예전 부하직원이었던 간사 등에게 빵을 판다.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서 빵 사라고 세일즈를 하죠. 완전 완판녀예요.” 가끔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단다. 미국 생활 7년 동안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산 경험을 가진 그에게 그런 눈초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원래부터 화가의 꿈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기자 생활을 하면서 사내 미술동호회에서 일주일에 한시간씩 스케치를 한 정도가 미술 경력의 다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돌아온 뒤 참여연대에서 하는 미술수업 ‘서울드로잉’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자신이 미술에 이만큼의 열정이 있는지, 내가 이런 정도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미술 선생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인간은 누에고치라는 거예요. 누에고치는 평생 실을 하나도 안 뽑고 죽는 경우도 많지만 뽑기 시작하면 끝없이 나온다는 거죠. 나는 누구나 화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을 뽑지 않았을 뿐이죠.”

그가 가난한 화가의 삶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을까. “옥상에 앉아서 한참 그림을 그리다 보면 가끔 내가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너무 좋아요. 한때 지나가는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1년은 이렇게 살 거예요.” 그는 내년 2월에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여기에서 몇점이라도 그림이 팔려서 계속 화가를 하면 좋겠다는 게 꿈이다. 그림값을 비싸게 받을 생각은 없다. “아르바이트로 하는 교열일을 온종일 하면 10만원 정도 벌더라구요. 제 그림도 걸린 시간만큼 그 정도 가격만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 전업 화가를 해도 먹고살 수 있지 않겠어요.”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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