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는 흔적을 남긴다’라는 과학수사계의 격언이 있다. 용산경찰서 과학수사팀 정훈성 팀장과 황래홍 경위가 지난 13일 신고된 침입절도 현장에서 범인이 남긴 지문을 채취하고 있다. 지문채취 키트와 족흔 키트, 특수 플래시, 고성능 카메라는 과학수사팀의 기본장비다. 침입절도범의 흔적을 포착할 수단이다.
|
[토요판] 르포
침입절도 초동수사 현장
▶ “100명의 죽음은 재앙이지만 600만의 죽음은 통계”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대중은 연쇄살인이나 엽기적인 범죄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절도는 시시하고 별것 아닌 범죄로 여겨집니다. 수만건의 절도는 대중에게 그저 통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범죄 피해자 한명 한명에게는 잊을 수 없는 대사건입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 훔치는 침입절도는 당사자에겐 공포스런 사건입니다. 여름 휴가철에 많이 발생하는 침입절도 사건 초동수사 현장을 찾았습니다.
십계명에 어긋나는 범죄가 매년 29만건 이상 벌어진다. 교황은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열번째 계율)고 가르치지만, 그의 방문 하루 전날에도 절도 범죄는 일어났다. 지난 13일 저녁 6시55분 서울 용산경찰서 9인용 경찰승합차가 후암동 ㄱ빌라 앞에 섰다. 과학수사팀 정훈성 팀장과 황래홍 경위가 과학수사 장비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이날 늦은 오후 이 빌라에 거주하는 미국 국적 외국인 부부가 집 근처 지구대에 도난 신고를 했다. 장병덕 형사과장과 이호성 강력1팀장, 통역을 맡을 순경 등 다른 경찰 5명도 수사 현장에 합류했다. ㄱ빌라는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남산 오르는 길 중턱 고급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이날 일몰시간 저녁 7시28분까지 약 30분이 남았다. 해가 진 뒤엔 범죄의 흔적들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4층짜리 ㄱ빌라 주위를 둘러싼 3~4층짜리 빌라와 연립주택 뒤로, 해가 지고 있다.
교황 방문 전날인 8월13일 미국 국적 외국인 부부 사는
용산구 빌라에서 절도 신고
용산서 과학수사팀 출동해
범인의 침입 동선부터 추적 누군가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침입절도는 피해자 마음에
공포와 상처를 남기는 범죄
2003년 7만7980건에서
2012년 9만1093건으로 늘어 3일간 모르다 보석함 열어본 뒤 눈치채 과학수사팀은 우선 범인의 침입 동선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ㄱ빌라 집터(지층)는 305.88㎡(약 92평)다. 성인 2명이 동시에 들어갈 만한 너비의 정문을 들어선 황 경위의 왼편에 너비 3~4m의 좁은 길이 있다. 잔디가 깔린 길을 5m 정도 진입하자 빌라 건물 뒤 좁은 정원이 나타났다. 정 팀장과 황 경위는 건물 1층 뒤편을 감싸는 허리 높이 펜스의 흔적을 살폈다. 철제 펜스 윗부분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군데군데 사람이 밟은 듯 먼지가 없는 부분이 발견됐다. “여기 보세요, 먼지 없는 부분이 있죠? 범인이 펜스를 밟고 2층 베란다로 올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황 경위는 캐논 5D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로 펜스에 남은 범인의 흔적을 연신 찍는다. 며칠 전 범인도 지금 과학수사팀이 밟은 잔디를 똑같이 밟고 서 있었을 것이다. 도둑은 그 잔디를 밟고, 고개를 들어, 지금 정 팀장이 바라보는 2층 베란다 난간을 똑같이 쳐다봤을 것이다. 피해자는 이날 경찰에 “7월11일~8월11일 한 달간 미국에 다녀왔다”고 진술했다. 216.27㎡(약 66평)의 집 현관을 열었을 때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베란다 유리문도 닫혀 있었다. 다만 거실에 신발 자국이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러다 13일 오후 보석함을 열어보고 귀중품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부부는 ‘금반지 2개, 금팔찌 4개, 금십자가 2개’를 도난당했다고 뒤늦게 신고했다. 피해자 부부와 두 딸이 약 3일간 범죄의 흔적이 남아 있었을 거실과 베란다에서 평소처럼 생활했다. 용산서 과학수사팀은 이틀 동안 ‘더럽혀진’ 범죄의 흔적을 찾아내야 한다. 정 팀장과 황 경위는 저녁 7시5분께 뒷베란다 쪽 거실 문 앞에 섰다. 거실 유리문을 열어 방금 전에 서 있던 뒤편 정원을 내려다봤다. 정 팀장이 바라다보는 정원 잔디밭 위에 7월11일부터 8월11일 사이의 어느 날, 범인이 서 있었을 게다. 과학수사팀은 남아 있는 신발 흔적 앞에서 족흔적 키트를 열었다. 족흔을 채취하는 필름을 대고 광원을 비췄다. 정 팀장이 족흔을 추출하는 중간중간 황 경위는 카메라로 필름을 계속 촬영했다. 과학수사팀은 늘 자외선을 비출 수 있는 특수 플래시, 디에스엘아르 카메라, 족흔적 키트, 지문 키트를 차에 싣고 다닌다. 범인이 신었을 신발의 족흔을 추출한 뒤 데이터베이스와 탐문수사를 통해 신발 제품을 짚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약 3일간 피해자 식구들이 현장을 훼손한 셈입니다. 거실 족흔과 펜스의 장갑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훼손된 것치곤 비교적 양호한 현장입니다. 족흔적 보이시죠? 이 방향(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가는 방향)으로 찍혀 있는데 갑자기 거실 앞에서 방향이 뒤섞입니다. 서성거린 흔적이 보입니다. 바로 훔칠 물건을 물색한 것이 아니고 도주할 길을 먼저 살폈다는 뜻입니다.” 설명하는 정 팀장의 이마에 벌써 땀이 맺혔다. 이날 최저 기온은 22.5℃다. 입추(7일)가 지났지만 아직 덥다. 족흔 추출을 마친 2명은 안방을 지나 보석함이 보관됐던 작은방으로 향했다. 과학수사팀은 보석함에 남아 있는 물건을 잠시 꺼냈다. 빈 보관함을 들고 아직 희미하게 일광이 남은 베란다로 나갔다. 본격적으로 지문 채취 작업이 시작된다. 지문 채취용 브러시에 분말을 살짝 묻혀 보석함을 톡톡 두드리듯 살살 붓질했다. 보석함에 남은 지문에 미세한 분말이 묻었다. 지문 채취 스티커를 분말이 묻은 지문 부위에 붙였다 뗐다. 파란색 특수 플래시가 작업 내내 이미 어둑해진 보석함 주위를 비췄다. 정 팀장이 추출 작업을 하는 사이사이, 황 경위는 연신 5D 카메라로 지문 부위를 접사(가까이서 촬영)했다. 정 팀장은 추출한 지문을 찍은 사진을 확대해 살폈다. “지문이 몇개 추출되는데, 지문 옆에 목장갑 끼고 만진 흔적도 보이네요. 아마 범인은 장갑을 꼈을 거고, 지금 보이는 지문은 피해자 부부 지문일 겁니다.” 정 팀장의 이런 가설은 증거로 입증되어야 한다. 피해자 부부의 지문을 채취해 보석함에서 추출한 지문과 대조해야 한다. 1880년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의사 헨리 폴즈가 고안한 이래 지문 감식법은 많은 범죄를 해결해왔다. 붓질하는 정 팀장의 등에 ‘과학수사 KCSI’ 글자가 뚜렷하다. “역사가 20세기를 과학의 세기로 기억한다면, 그 과학의 상당 부분은 범죄자들을 잡는 데 쓰였다”(범죄 저널리스트 콜린 에번스)는 문장은 과학수사의 역사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과학수사의 역사에 근대의 역사가 얽힌다. 헨리 폴즈가 고안한 지문 감식법을 발전시켜 현대적인 지문 분류법을 완성한 이는 19세기 말 식민지 인도 경찰로 근무했던 에드워드 리처드 헨리였다. 제국의 과학자들은 식민지의 범죄자를 지문 감식을 통해 수월하게 잡아들였다. 한국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는 1955년 내무부 소속 기관으로 탄생했다. 그리고 2014년 일선 경찰서 과학수사팀은 절도 사건에서도 지문 채취 기술을 활용한다. 침입절도 수감자 208명 설문조사한 결과
용산경찰서 과학수사팀 황래홍 경위가 펜스 위에 범인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촬영하고 있다.
|
기사공유하기